다양한 문화유산정보를 한자리에서 만나보세요.
제작년도: 1920년 4월 28일
야외에서 촬영한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가족 사진인 <고궁3128>의 유리원판이다. 나시모토노미야 모리사마 왕 부부, 영친왕 부부, 영친왕비의 여동생 노리코 부부, 모리마사 왕의 양자 梨本德彦 부부(추정)를 촬영한 사진이다.
좌측에서부터 모리마사 왕의 양자 나시모토 노리히코(梨本德彦, 1922~2007) 부부(추정), 나시모토노미야 모리사마 왕(梨本宮守正, 1874~1951)과 그의 아내 나시모토노미야 이츠코(梨本宮伊都子, 1882~1976), 그 우측에는 영친왕(英親王, 1897~1970)과 영친왕비(李方子, 1901~1989)가 서 있다. 그리고 영친왕비 우측 옆에는 노리코(規子) 부부 내외가 서 있다. 양복을 입은 梨本德彦(추정)을 제외하고는 남자는 군복을 착용하고 있으며 여성들은 기모노를 입고 있다. 유리원판은 보관용지에 들어 있으며 보관용지 앞에는 “日本橋俱樂部/NO./昭和 20年4月28日/樣/拾枚”라고 쓰여 있다. 20/4/28/拾枚는 손으로 쓴 글이며, 나머지는 인쇄된 것이다. 昭和 20년은 1944년으로 영친왕의 나이는 48세이다.
제공기관
국립고궁박물관
제작년도: 1921년
큰 아들 이진[1세]을 안고 바라보는 영친왕 부부 사진이다.
제공기관
국립고궁박물관
순종은 1909년 1월 7일부터 6박 7일 간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을 순행 한 이후, 19일에 서북부의 끝인 신의주까지 순행을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어서 1909년 1월 27일 부터 2월 3일까지 7박 8일 동안 평양 → 의주 → 신의주 → 평양 → 개성 등지를 순행한 후 서울로 돌아왔다. 이 순행에는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궁내부 201명 · 내각 49명 · 통감부 29명 등 총 279명이 호종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중 한국인이 198명, 일본인이 81명이었다. 서북 순행의 모든 과정을 촬영하기 위해 사진사 3명과 무라카미(村上) 사진점 점원 2명이 궁정열차에 탑승했는데 현재 전하는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의 사진은 이때 찍은 것들로 추정된다.
이 사진은 1909년 1월 31일 정주역에서 출발을 기다리는 수행관리들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제공기관
국립고궁박물관
제작년도: 1699년
창덕궁 홍문관에 걸었던 편액(扁額)으로 1699년(숙종 25) 당시 홍문관 응교(應敎)였던 김진규(金鎭圭, 1658~1716년)의 글씨이다. 옥당은 홍문관(弘文館)의 다른 이름이다. 사헌부 · 사간원을 합쳐 양사(兩司)라고 하는데 여기에 홍문관을 합해 삼사(三司)라고 불렸다. 세종 때 주로 경연(經筵)의 업무를 하던 집현전이 세조 때 사육신(死六臣)사건으로 폐지되었다가 성종 때에 이르러 홍문관으로 부활하였다. 학술 기관으로 왕의 자문에 응하였으며 양사와 함께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도 하였다.
제공기관
국립고궁박물관
제작년도: 1887년
관인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중요한 신표(信標)의 하나로 신분이나 용도에 따라 재질이나 크기 등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성문화되어 엄격히 규정되었다. 관인은 용도에 따라 크게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관청의 이름이 새겨진 관청인, 관직의 이름이 새겨진 관직인이 대부분이며 이외에 문서의 서식과 임금의 결재를 나타내는 관인과 각종 패와 목제 물품에 불로 달구어 찍는 낙인(烙印) 있다. 각 관청의 인장은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이 있는 기관은 당상관이, 그 이하의 관청은 그 기관의 장이 사용하였다.
내무부 소속 공작사의 발급문서에 사용되던 관인의 나무 본이다. 공작사는 내무부의 토목, 건축, 제조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부서에서 현대식 증기선을 구입하여 세금 운반에 활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887년 《승정원일기》에 내무부 소속 7사의 관인 주조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제공기관
국립고궁박물관
제작년도: 1910년대 말~ 1920년대 초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영친왕과 일행을 촬영한 것이다.
제공기관
국립고궁박물관
순종은 1909년 1월 7일부터 6박 7일 간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을 순행 한 이후, 19일에 서북부의 끝인 신의주까지 순행을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어서 1909년 1월 27일 부터 2월 3일까지 7박 8일 동안 평양 → 의주 → 신의주 → 평양 → 개성 등지를 순행한 후 서울로 돌아왔다. 이 순행에는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궁내부 201명 · 내각 49명 · 통감부 29명 등 총 279명이 호종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중 한국인이 198명, 일본인이 81명이었다. 서북 순행의 모든 과정을 촬영하기 위해 사진사 3명과 무라카미(村上) 사진점 점원 2명이 궁정열차에 탑승했는데 현재 전하는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의 사진은 이때 찍은 것들로 추정된다.
이 사진은 1909년 2월 1일 평양 만수대에 오르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제공기관
국립고궁박물관
순종은 1909년 1월 7일부터 6박 7일 간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을 순행 한 이후, 19일에 서북부의 끝인 신의주까지 순행을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어서 1909년 1월 27일 부터 2월 3일까지 7박 8일 동안 평양 → 의주 → 신의주 → 평양 → 개성 등지를 순행한 후 서울로 돌아왔다. 이 순행에는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궁내부 201명 · 내각 49명 · 통감부 29명 등 총 279명이 호종원으로 참여하였다. 이 중 한국인이 198명, 일본인이 81명이었다. 서북 순행의 모든 과정을 촬영하기 위해 사진사 3명과 무라카미(村上) 사진점 점원 2명이 궁정열차에 탑승했는데 현재 전하는 《순종황제 서북순행 사진첩》 의 사진은 이때 찍은 것들로 추정된다.
이 사진은 1909년 2월 1일 평양 만수대에서 기념촬영을 한 것이다.
제공기관
국립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