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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100]예와 의를 지킨 조선시대 순고한 정신, 선비

조선시대 선비정신을 배우고 느껴보자 ---대본---나레이션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유교적 인격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선비는 관직이나 신분의 의미보다는 지성과 실천을 겸비한 인격체로서의 추상적인 의미를 지니는 사람을 뜻합니다. 선비들은 기본적으로 양반 계층에서만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한문용어로는 사대부라고 하는데요, 유교의 도를 실현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교의 가장 높은 가르침인 ‘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아야 합니다. ‘살신성인’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선비들은 열심히 학문을 닦았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공부한 학문을 자기 자신의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들, 특히 백성들과 나누어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이 것이 바로 선비 정신입니다. - 인터뷰오늘날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선비정신은 남을 배려하는 배려의 정신이 꼭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만 아는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우리 세상을 평화롭고 자유롭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정신이 선비정신의 밑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레이션선비정신은 의리와 지조를 중요시합니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떳떳한 도리인 의리를 지키고, 그 신념을 흔들림 없이 지켜내는지가 선비들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인터뷰선비정신은 인의예지 그대로 마음을 다스리고 인정이 있고 또 예의가 바르고 가정을 다스리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이게 바로 선비정신입니다.글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선비)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선비들의 생활은 첫째,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공부라는 것이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위한 공부를 한 것입니다.그 다음에 일상생활을 절제 있게 했습니다.선비들은 배운 것을 실천하는 분들이었습니다.예를 들어 나라에 위급이 닥친 임진왜란 때나 일제 치하에서 나라를 빼앗길 위기 때는 목숨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서 싸운 거죠, 그러니깐 이해가 먼저가 아니고 옳고 그른 것이 먼저고 옳은 것을 위해서는 목숨도 바친다는 것이 선비정신인 거죠. 나레이션오늘처럼 혼탁한 사회에서 나라와 정의를 위해 의리와 신념을 지키는 선비의 모습!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선비에게 꼭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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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0

[한국문화100]한반도의 중심 산줄기, 백두대간

NA : 이곳은 강원도 태백시 철암역, 나는 이번학기 백두대간에 관해 레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백두대간을 알아보러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 백두대간은 어떤 것일까? 막연하게 다가오는 궁금증을 안고 백두대간의 협곡을 지나는 V-train을 따라 아름다운 우리강산을 감상했다. ? (자막) 백두대간 협곡열차(V-train) 강원 태백 철암역 ↔ 경북 봉화 분천역 구간을 운행하는 KORAIL 관광 열차. ? (자막) 백두대간 협곡열차(V-train) 좁은 협곡 사이 절벽과 바위산이 보이는 창밖의 풍경을 자연 그대로 오감으로 느끼며, 힐링으로 이어지는게 특징. ? NA : 도시를 떠나 좁디좁은 산골짜기 협곡을 달리는 기차 속에서 백두대간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속에 벅차오르는 감정이 느껴졌다. 한반도를 이루는 뼈대! 백두대간은 무엇인지 이번 여행을 통해 알아보려 한다. ? 먼저 찾아간 곳은 국민들이 백두대간에 대해 올바로 알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이다. ? int 유경희 숲해설가 / 조령산자연휴양림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자연적 상징으로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인식 체계로 여겨졌고, 한반도의 모든 물줄기를 잉태한 생명력이 시작되고 이어지는 중심지입니다. ?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1개의 정간, 13개의 정맥 10개의 강이 있습니다. 백두대간을 경계로 하여 동쪽은 영동지방, 서쪽은 영서지방, 지방마다 독특한 언어와 음식, 주거환경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 NA : 생태교육장을 둘러보며 백두대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 (자막) 백두대간 생태교육장 우리나라 중심 산줄기인 백두대간의 역사, 문화, 생태 정보를 다양한 전시 체험매체로 구성하여 보전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 ? NA : 백두대간은 언제부터 이 땅을 이해하는 지리인식체계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성호사설 등을 통해 길게는 천여 년, 짧게는 수백 년간 백두대간으로 불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우리 선조들은 산맥을 표기할 때 땅 위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과 강을 그려 산에서 산으로만 이어지도록 하였고, 실제 지형과 일치하는 지리학적으로 자연스러운 선을 표현했다. ? 반면, 일제의 침략을 받은 일제 강점기 때는 땅속의 지질 구조를 기준으로 산맥을 표기했고, 그리하여 산맥은 강에 의해 여러 차례 끊기고 실제 지형에 일치하지 않는, 인위적인 선으로 표현되었다. ? 현재까지 우리들에게 백두대간을 태백산맥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현실의 안타깝게 느껴졌다. ? 현재 백두대간은 어떻게 보전되고 있는지 이를 위해 힘쓰고 있는 보전회를 찾아갔다. ? int 김경한 사무국장 / 백두대간보전회 (백두대간 보전회는)크게 5가지 활동을 하고 있는데, 야생동물 보호활동, 생태 숲 조성운동, 백두대간 생태 체험 학습, 산불 조심 홍보 활동, 백두대간 산림 정화운동, 5가지를 우선 크게 볼 수 있어요. 백두대간을 말하면, 즐길 수도 있어야 하고, 보전도 해야 하고, 양면성이 있어요. 건설 쪽 활용방안 말고, 국민들이 정서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끔 등산도 하고, 체험도 하고, 산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방안을 찾아서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 NA : 보전회 에서는 백두대간의 보전을 위해 국가 그 이상의 활동을 하고 계셨다. 과거 나라를 구하기 위해 활동했던 독립 운동가들만이 애국자가 아니라 보전회 회원들에게도 한반도의 산줄기를 지키고픈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20년이상 해발 1,000m의 산을 꾸준히 올랐다는 보전회 사무국장님께 백두대간은 어떤 의미로 다가 오는지 여쭤봤다. ? int 김경한 사무국장 / 백두대간보전회 처음 제가 백두대간 보전회에 들어왔을 때 저는 사실 백두대간에 대해 아는 게 없었어요. (보전회에) 들어와서 백두대간에 대해 뭘까 고민을 하고 찾아보고 하다 보니까 저 역시도 백두대간 하면 지금도 울컥하는 마음이 있어요.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가 있는데, 백두대간 하면 저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먹는 물의 근원이 백두대간에서 떨어져서 각 강으로 지리로 다 흘러가거든요. 물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물이 없으면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물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백두대간 하면 물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 NA : 나는 백두대간을 몸소 느끼기 위해 산을 걷기로 했다. 산줄기를 경계로 고개를 넘어가며, 동쪽 서쪽 마을 사람들이 서로 왕래하고, 지역과 문화가 구분되어 교류를 이룬 백두대간! 세계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강을 통해 발전 했듯 우리의 문화는 이 백두대간을 따라 발전해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자막) 백두대간(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가장 크고 긴 산줄기 백두대간은 1의 대간과 1개의 정간 및 13개 정맥 체계로 되어 있다. ? NA : 산 정상에 올라 백두대간을 바라보니 처음 기차를 타며 느꼈던 마음 속 벅차오름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 (자막) 함백산(咸白山) 함백산은 강원도 태백시와 정선군 고한읍의 경계에 있는 해발 1,572,9m의 산으로 우리나라에서 6번째 높은 백두대간의 고봉 가운데 하나. ? NA : 한반도 중심산줄기 백두대간 우리민족에게 백두대간은 문화의 울타리였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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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3

[한국문화100] 세계화 된 국제공인스포츠, 태권도

대표적인 한민족 고유의 무술로, 우리나라에서 창시되어 세계화된 국제공인스포츠이다. 우리 고유 무술 태권도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대본)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된 투기 스포츠 신체 단련과 정신적 무장을 통한 올바른 인간화를 중시 또 다른 대한민국의 국기 태권도다. 무기 없이 손과 발을 이용해 공격과 방어하는 무도, 태권도다 조선, 중국, 일본의 최고의 무예를 집대성한 동아시아 무예사의 보고, 무예도보 통지. 무예도보통지에서 권법은 무기가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키울 수 있는 능력을 보고 하였다. 조선적 권법을 체계화한 무예도보통지는 오늘날 맨손무예의 원형이 되었고, 이후 발차기 등의 동작들은 오랜 세월이 흐르며 태권도로 발전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인터뷰 강규진/ 태권도진흥재단 교육부담당관 태권도의 란? 태권도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국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심신 수련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무예이며, 태권도는 무기 없이 손과 발을 이용해 공격과 방어하는 무도이다. 우리민족의 기상이 넘치는 태권도의 힘과 기술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자. 태권도의 태권도 3대 기본 구성이란? 기본발차기 태권도에서 중시되는 기본 구성을 알아보자. 품새는 혼자서 상대를 가상하고 한 자리에서 두 동작이상을 순간적으로 행하여 힘과 유연성 등 호흡과 동작의 완급을 발전시키는 동작이다 겨루기는 품새를 통해 익힌 공격방어의 기술을 응용하여 실제로 상대편과 대결하는 기술이다. 마지막으로 격파는 손과 발 등의 공격 및 방어의 부위를 각종 보조 기구를 통하여 강화 단련함으로써 파괴력을 기르는 것으로 품새 겨루기와 함께 태권도를 구성하고 있다. 태권도의 국제화? 태권도가 특유의 장점으로는 대한민국의 문화가 태권도 속에 담겨있습니다. 외국 사람들이 태권도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사범에 대한 존경심, 상대에 대한 이해(존중), 스스로 몸과 마음을 수련할 수 있다는 점이 있고, 또 하나의 이유로는 가족 스포츠로 할머니, 할아버지, 손자 등 가족끼리 함께 할 수 있는 스포츠로 세계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오게 된 것입니다. - 오늘날 태권도가 세계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수많은 태권도인들의 분투가 밑받침되었다.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던 단체를 하나로 통합했으며, 세계태권도연맹을 중심으로 태권도는 전 세계에 크게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1980년 국제 올림픽위원회 프로그램 위원회에서 태권도가 공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94년 9월 4일. 파리 IOC 제 103차 총회에서 여든 다섯명의 IOC 위원의 전원 찬성으로 마침내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 하계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태권도가 세계로 전파 된지 불과 40년 만에 지구촌 스포츠로서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또한 1967년 최초로 태권도를 주제로 문화콘텐츠가 제작되었고, 무도에서 무예로 스포츠로 다시 세계의 문화로 무한한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세계 속 한류 상징이 된 우리의 태권도. 국가와 인종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예절과 자신감을 주는 스포츠이자 앞으로도 널리 알려야 할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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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0

[한국문화100]한반도의 평양은 역사상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역사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평양이 가지는 의미와 배경 주요 사건들에 대해 알아본다. ----------------------------------------------------------------------------------------------- 평양편 여러분, 안녕하세요!한국문화100 평양편 소개를 맡은 역사 교사 문인식입니다. 반갑습니다.여러분들은 평양이라고 하면 주로 뭐가 떠오르시나요?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아마 이런 북한의 정치인들이 떠오를 겁니다.이들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우리는 평양에 대해 자세히 모르고 있는데요.사실 대한민국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는인구 천만의 도시 서울도 아니고, 백제의 도시 공주도 아니고,천년 고도의 도시 경주도 아닌, 바로 평양입니다.이 평양에 대해서 자세하게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느끼시기에 평양이란 말이 어렵게 느껴지실 수 있겠지만,우리 고유어인 '부루나'라는 말을 한자로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부루'라는 말은 평평하다는 뜻이고요, '나'라는 말은 땅이라는 뜻이에요.합쳐서 말하면 평평한 땅이라는 거죠.여러분들이 실제로 평양에 가보면, 산도 없이 드넓은 평야가 있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그렇게 넓은 평야는 남한에서는 '호남평야' 밖에 비견될 곳이 없어요.이렇게 넓은 땅에 대동강이 흐르고 있습니다.대동강이 흐르기 때문에 땅은 한결 더 비옥해지고 사람들이 살기 좋아지는 것이죠.저 먼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이곳에서(평양에서) 사람들은 살았답니다.유명한 구석기 유적인 평남상원검은모루동굴이 바로 평양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이 유적에서는 신기하게도 물소, 원숭이와 같은 뼈들이 나오는데요.이 당시에 한반도가 훨씬 더 따뜻했음을 보여주는 유적 유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제 시대가 흘러 최초의 문명 최초의 우리나라 국가가 탄생하게 되죠.바로 어디입니까, 여러분 단군할아버지 아시죠?그렇습니다. 고조선입니다. 고조선의 수도 또한 평양이었습니다.이 고조선의 수도를 왕검성이라고 하는데요.왕검성의 위치가 만주라고 하기도 하고, 그리고 평양에 있기도 하고,이동했다고 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학설이 존재합니다.근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단군 조선 이후에 위만 조선일 때수도 왕검성은 확실히 평양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고조선은 이 왕검성, 평양을 거점으로 해서 중국의 한과남쪽의 진과의 중계 무역을 통해 이득을 얻기도 했죠.그러나 중국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한무제의 침략에 의해결국 고조선은 왕검성이 함락하게 되면서 멸망하게 됩니다. 시대가 흘러 삼국시대에 가보겠습니다.북쪽에 고구려, 남쪽에 백제, 신라가 있는 삼국시대 평양은 누구 땅이었을까요?그렇습니다. 드넓은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가 평양의 주인이었죠.원래 고구려의 수도는 압록강이 흐르는 국내성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맞물리게 되면서고구려는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게 되죠.본격적으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겠다는 겁니다.고구려는 평양을 수도로 했을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는데요.북으로는 부여와 숙신을 정복하고,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찍어 눌러 충주까지 밀어내는 등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게 바로 평양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전성기를 부가하던 고구려, 하지만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그 당대에 최고의 외교가였던 신라의 김춘추가 배를 타고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게 되죠.그래서 당 태종을 만나 담판을 짓습니다.신라와 당이 손잡은 거죠. 이렇게 결성된 나당 연합군은 660년 의자왕이 이끌던 백제를 멸망시키고,668년 평양성으로 다가오게 됩니다.결국 나당연합군과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분열로 인해서 고구려는 멸망하게 됩니다.이렇게 잠시 잊혔던 도시 평양은 고려 때 다시금 주목받습니다.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죠.고구려가 이룩했던 그 넓은 땅을 회복하고 싶었던 고려는 북진정책을 추진하게 되고,북진정책의 거점으로서 평양을 선택하게 됩니다.실제로 고려의 많은 왕들은 개경이 아니라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싶어 했어요.그리고 진취적인 기상을 가졌던 묘청은 수도를 아예 서경으로 옮기자는 운동을 벌였습니다.이게 정말 유명한 서경천도운동인데요.나중에 일제강점기 때에 민족사학자였던 신채호는 서경천도운동을 가지고 이렇게 표현했습니다.한민족의 역사상 일천 년대에 제일 가는 대사건이다.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수도가 평양으로 옮겨지고 더욱더 진취적으로 나아갔다면우리 천년의 역사가 바뀌지 않았겠나 하는 그런 아쉬움에서 이런 말을 했던 게 아닌가 싶네요.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조선이 건국되고 200년이 흐른 뒤1592년 4월 14일 부산 앞바다에 웬 배들이 가득 메워서 부산으로 건너옵니다.그렇습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죠. 약 15만이 넘는 일본군은 약 20일 만에 한성을 함락시킵니다.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서 평양까지 차지하게 되죠.이렇게 빼앗긴 평양은 1593년 1월에 명나라가 참전해서 조명 연합군에 의해 탈환되게 됩니다.북쪽에 만주를 통일했던 여진족의 후손 후금은 또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통해평양을 침입하게 되는데 이때에도 평양은 전쟁터가 됩니다.제가 이렇게만 말하면 마치 무슨 평양이 전쟁터인 거처럼그렇게 생각하지겠지만 꼭 그렇지마는 않습니다.평양은 원래부터 비옥한 땅이 있었고, 그리고 중국의 사절단이 오가는 중요한 길목이었어요.그래서 풍족하고 문화적으로도 발전되었으며 없는 게 없는 아주 발달된 도시였습니다.그래서 조선시대 관리들이 가고 싶은 곳 3개를 꼽으라고 하면그중에 한 곳에 평양이 꼭 뽑혔다고 하네요. 여러분들은 우리나라가 최강 대국 미국과 전쟁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조선 때 미국과 전쟁을 치렀던 때가 있습니다. 바로 신미양요인데요.이 신미양요의 발단이 되는 사건이 바로 평양에서 발생했습니다.역사 공부 조금 하신 분들은 알 텐데요.바로 제너럴 셔먼 호 사건입니다.대동강 물을 거슬러 상선, 미국의 제너럴 셔먼 호가 쭉쭉 쭉 올라갔습니다.드디어 평양까지 갔죠. 평양까지 간 제너럴 셔먼 호 무엇을 요구했을까요?통상, 거래, 사고팔기 이런 걸 원했어요.그런데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는 그런 게 불가능했어요. 왜 그랬을까요?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지배자가 누구였냐면, 쇄국정책의 아이콘 바로 흥선대원군이었어요.당연히 거래 같은 게 될 리가 없었죠. 그래서 여기서 갈등이 빚어지는데요.이 갈등 속에서 제너럴 셔먼 호의 공격에 의해 평양 백성들이 죽게 되면서뿔난 관군들이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우게 되고그리고 잡힌 선원들을 성난 군중들이 막 몽둥이로 때려죽이면서 여기서 사건이 터집니다.나중에 미국은 이것을 빌미로 쳐들어오게 되는데요.이것이 바로 강화도를 배경으로 벌어진 신미양요에요. 1910년 일제에 의해서 조선은 합방되게 됩니다. 강제적으로 합방되고 말았죠.일제강점기에 물산장려운동이라는 독립운동의 종류 중에 하나가 바로 평양에서 펼쳐지게 됩니다.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맞서서 우리 것으로 만 살자, 내 살림 내 것으로 라는 구호를 앞세워 가지고국산품 애용, 근검절약 등을 통해 우리의 토종기업 등을 육성시키고자 하는 물산장려운동이평양에 살고 있던 조만식에 의해 진행되게 됩니다.이러한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기는 평양에서도 이렇게 있었네요. 8월 15일 우리 민족이 그렇게 염원하던 광복을 맞이하게 됐습니다.하지만 기쁨도 잠시 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발생하게 됩니다.그래서 평양은 우리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가깝지만 먼 곳이 되었죠.언젠가 우리 발로 가서 우리 눈으로 평양을 직접 보는 그날이 오기를 기원하면서평양에 대한 소개를 여기서 마치겠습니다.이상 역사교사 문인식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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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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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9

[한국문화100]마을 공동의 문화공간 정자나무

[한국문화100]마을 공동의 문화공간 정자나무 예로부터 마을의 휴식과 신앙 또는 회합이 이루어졌던 정자나무의 가치를 재조명해본다. 정자나무편 대본 내레이션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의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정작, 사람들은 서로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혹시,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고 계신가요?혹시, 마을주민들과 서로 인사하며 지내시나요?혹시, 마을주민들과 모여서 어울린 적이 있으신가요? 사람은 넘쳐나도 삭막하기만한 현대의 도시. 서로가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만한 공간과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이기는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마을사람들이 정을 나누던 공간이 있었습니다. 마을 초입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모여 마을 일을 의논하거나 쉬기도 했던 오래된 고목. 우리 조상들은 편안한 그늘을 제공해주던 큰 나무를 정자나무라 부르며 사랑방처럼 함께 머물렀습니다. 정자나무는 한결같은 포근함으로 어른들에게는 휴식을 아이들에게는 놀이공간을 제공하였습니다. 정자나무의 넉넉한 규모와 수령처럼 정자나무와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인터뷰김판조그전에는 집이 초가삼간이잖아요. 늘어진 초가집인데 더워서 못살아. 그러니까 점심을 먹으면 다 나온거예요. 다 나와서 오후 세시정도 되어 조금 서늘해지면 그때 일터로 나갔는데 꽉차버려요, 여기가. 이렇게 올라가서 저렇게 늘어진 가지에다가 훈주(줄타기)도 타고 여기 나뭇가지에다가 그네도 매어놓고 그네도 타고 그랬어요. 어르신들이 나뭇가지 찢어진다고 못하게 했지. 내레이션현대의 도시들이 들어나고 사람들이 각자 바빠지면서 정자나무는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습니다. 하지만 다시금, 늘 정이 넘쳤던 정자나무의 모습을 기억하고 따뜻하며 푸근했던 그 순기능을 살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름지기재단과 서울디자인재단이 공동으로 기획하는 마을정자나무프로젝트입니다. 자막마을정자나무 가꾸기 프로젝트, 아름지기재단, 서울디자인재단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350세 느티나무 인터뷰장영석 / 아름지기재단 사무국장그동안 먹고 사는 문제, 급속히 산업화되고 경제적인 부분들을 쫓다가 결국은 다시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고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를 전통에서 힌트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자나무만 하더라도 그냥 단순히 오래된 나무일뿐이지만 사람들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그 아래 같이 모여서 사람 살만한 동네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되거든요. 요즘 만들어지는 그 어떤 최신식의 건물이나 현대적인 공간보다도 사람들에게 더 큰 위안을 줄 수 있는 곳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정자나무 하나하나를 고쳐가는 것이 단지 자연보호 운동이 아니고 더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김순희이런 공간이 생기니까 동네도 아름답고 공기도 좋은데 환경이 깨끗해지니까 살기 좋고 보기 좋지요. 박지훈주변에 자주 왔는데요. 정비된 후에 풍경도 더 괜찮아 진 것 같고 포근한 기분이 들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내레이션정자나무는 단순히 마을의 큰 나무가 아니라 사람, 자연, 문화가 어우러지던 마을의 상징적인 소통 공간이었습니다. 사람사이의 단절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 정자나무가 가지는 정의 가치는 우리가 다시 연결되어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인터뷰방영자안락하고 시원하고 굉장히 정서적으로 좋네요. 이혜숙(혼잡한)도심 속에 있는 느낌이 안 들고 편안하고 어느 시골에 와있는 그런 느낌이 드네요. 내레이션마을 공동의 문화 공간 정자나무,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야할 우리의 문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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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0

[한국문화100]민족기원의 상징 단군

[한국문화100] 민족 기원의 상징 단군 한민족의 시조이자 고조선을 개국한 단군과 홍익인간 정신에 대해 알아본다. 단군대본 내레이션우리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 고조선.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던 시기, 부족들을 통합하여 고조선을 건국한 인물이 바로 한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단군이다. 자막고조선(기원전2333년) 요동과 한반도 서북구 지역에 존재한 최초의 국가단군 우리민족의 시조 내레이션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첫 기록은 고려 충렬왕 때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찾을 수 있으며 자막단군신화가 기록된 최초의 사서 삼국유사단군왕검이 아사달을 도읍으로 조선을 개국했다 내레이션특히, 고조선의 건국에는 우리 민족 시조 신화인 단군 신화가 포함되어 있다. 아주 오랜 옛날, 하늘의 신인 환인에게는 환웅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환웅은 아버지 환인에게 ‘하늘에서 살기보다 인간세계로 내려가서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고 말했고 이에 환인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라는 홍익인간 정신을 당부하며 자막홍익인간 홍 크다(규모가 거대한 모습) 성장 생산성 경쟁력 자유익 돕는다 더한다 이롭게 한가 빼앗음 착취 억압 방관사람 사이 관계 인간세상 공동체 내레이션인간세상 다스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백산 자락으로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 살던 환웅에게 어느 날, 곰과 호랑이가 나타나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빌게 된다. 곰과 호랑이의 정성을 갸륵하게 여긴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고 당부한다. 성질이 급한 호랑이는 약속한 기일을 참지 못하고 굴 밖으로 뛰쳐나와 사람이 되지 못했지만 환웅의 말을 믿고 잘 참은 곰은 결국 아름다운 여인이 된다. 사람들은 곰에서 변한 여자를 웅녀라고 불렀고 웅녀는 환웅과 결혼하여 건강한 아들을 낳게 된다. 이 아이가 고조선의 첫 번째 임금인 단군이다. 인터뷰윤명철 / 고조선단군학회장 동국대학교 교수일부에서는 곰과 호랑이의 존재 특히 곰이 웅녀로 변신한 다음에 환웅과 결혼했기 때문에 이것을 곰 토테미즘(자연물을 집단의 상징으로 삼는 형태)이라든지 아니면 신화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신화와 토테미즘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당시 곰과 연관되어 있던 특정한 집단일수도 있고요. 아니면 곰은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의 곰이 아니라 원래 우리 말, 특히 알타이어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단어가 있는데요. 그것은 우리 중앙아시아 전체에 퍼져있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바로 가미라고 불리는데요. 이 가미라는 것은 알타이어에서 무당을 뜻합니다. 감, 검, 금, 고마, 개마 이렇게 나타납니다. 이때 곰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의미의 곰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무당을 뜻하면서도 주로 밝음과 상대되는 어둠과 연관된 하늘에 대비되는 땅과 연관된 단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민족의 여러 개 지명, 산명, 인명 등에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이라는 것은 생물학적 의미의 곰 일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우리 알타이어 문화권에서 가지고 있는 감계언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한 개 집단과 땅 지역과 농경문화를 관리하는 지모신의 고마, 개마, 검 집단의 결혼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자막참성단(사적 136호)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 내레이션사적 제136호 참성단. 강화도 화도면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은 단군께서 제천의 대례를 행하고 뜻을 드높였던 곳이다. 그러한 뜻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어, 단군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를 건국한 것을 기리는 매년 10월3일 개천절에는 여전히 중요한 제천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자막 단기 4347년 개천대제 2014년 10월 3일 마니산 참성단 인터뷰이상복 / 강화군수1년 동안에 많은 고생을 해서 곡식도 잘 재배를 했고 또 여러 가지 보람 있는 일도 있었는데 그런 것에 대한 감사의 뜻도 하늘에 올리는 뿐만 아니라 내레이션각지의 단군성전에서도 개천절에는 어김없이 민족의 시조 단군을 기리는 행사를 거행하며 그 뜻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홍익인간,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단군 신화 속의 이념은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최고 이념으로 윤리의식과 사상적 전통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인토뷰김창환 / 국학원 사무총장우리나라 국조 단군이 나라를 건국할 때 이상적인 인간으로 생각한 것이 홍익인간입니다. 홍익인간은 말 그대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너와 내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이고 또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사상입니다. 우리가 지금 물질문명이나 경쟁 속에 사는 우리 사회에서는 너와 내가 분리 되어 있고 너와 내가 경쟁을 해서 이겨야지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홍익인간 사상은 나뿐만 아니고 상대방, 인간뿐만 아니고 자연 모두가 행복하고 이로운 세상을 꿈꾸는 그런 사상입니다. 내레이션단군신화에는 다른 나라의 신화에서와 달리 신들 혹은 인간과의 대립, 갈등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홍익인간의 이념에는 조화와 평화를 중시하는 세계관이 담겨있다. 단군. 단군과 그의 정신은 단순히 부정확한 역사와 과장된 신화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 마다 민족의 단합을 요구하는 구심체적 역할을 해왔다. 단군의 의미와 정신은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우리 민족의 출발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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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 내레이션 나는 1882년에 태어났습니다. 중국 청나라에 의해 강제로 태어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아버지 고종의 꿋꿋한 의지로 대한민국의 태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영원한 대한민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자막 나는 태극기입니다. 최초의 태극기 (1882) 내레이션 나는 네 번의 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자막 1890: 고종황제가 조선정부 외교 고문이었던 미국인 데니(O.N.Denny)에게 하사한 태극기 데니태극기(1890) 독립신문 제호에 도안된 태극기(1896) 프랑스에서 열렸던 파리박람회장 내 한국관에 게양되었던 태극기 파리만국박람회에 걸린 태극기 내레이션 지금의 완성된 나의 모습은 1949년 정부에서 42인 국기 제정위원회를 구성, 제정된 것입니다. 나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밝고 순수한 민족을 사랑합니다. 따뜻한 기운과 차가운 기운을 한데 모아 대자연의 진리를 형성합니다. 자막 따뜻한 양의 기운, 차가운 음의 기운, 하늘 건, 땅 곤, 물 감, 불 리 내레이션 건괘는 하늘을, 곤괘는 땅을, 감괘는 물을, 이괘는 불을 상징합니다. 태극을 중심을 통일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지 130년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나와 함께 울기도 했습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막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잊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유관순 3.1운동 당시 나는 각자 마음에 담겨져 있는 다양한 모습으로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남상락 태극기(1919) 충청남도 당진군 대호지면에서 3.1운동을 지위한 남상락이 만세시위 당시에 사용하고 죽을 때까지 간직한 태극기 태극기 목각판(1919)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내기 위해 만든 목각판 김세영 태극기(1919)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읍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세영이 보관한 태극기 각자 모양이 다른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했지만 조국 광복과 민족독립의 염원만은 하나였습니다. 한국광복군 서명 태극기(1945) 광복직후 안후이성 푸양에서 주둔하던 한국광복군 제 3지대 제 2지구대 대원들이 광복의 소감과 환국 이후 소망을 기록한 태극기 김구서명 태극기(1941)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께서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 내소원은 오직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 김구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도 나는 당신과 함께 싸웠습니다. "아빠, 우리는 잘 몰라요. 엄마도 간혹 말씀해주셨지만 아직도 우리는 왜 아빠가 그때 총탄에 맞아 돌아가셨는지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아빠, 어린 우리들을 끝까지 보살펴주세요" 5.18 민주열사의 자녀 내레이션 하지만 울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민족의 가장 행복한 순간인 조국의 해방의 순간에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며 열린 88서울 올림픽에도 대한민국을 외쳤던 붉은 악마의 응원에도 나는 대한민국과 함께 했습니다. 인터뷰 왜 태극기는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나요? 김보람 / 독립기념관 해설사 우리나라 태극기는 현재 그 모양과 보관방법, 처리방법이 법으로 정해져 있지만 이 법은 1949년에 발표가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우리나라에 정해진 양식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씩 다른 모양의 태극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는데요.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하던 때에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종류의 태극기가 사용되었습니다. 태극기를 보존하기 위한 마음가짐? 김보람 / 독립기념관 해설사 태극기는 (일제강점기) 당시 사람들에게는 빼앗겼던 나라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태극기에) 자신의 소망을 적거나 꿈을 적고 태극기를 죽을 때 까지 보관하시는 분도 계셨을 거예요. 그랬던 것처럼 태극기는 어떤 그림이나 나라를 상징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의 꿈과 희망을 같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조금 더 소중하게 생각해주시고 조금 더 친숙하고 가깝게 생각해 주시면 더욱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내레이션 치열했던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 정부수립, 시민항쟁, 그리고 2002년 월드컵까지 국민들이 슬프고 기쁜 순간에 언제나 내가 함께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한과 기쁨이 서려있는, 나는 당신 안에 언제나 살고 있습니다. 나는 태극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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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9

[한국문화100]우리의 문자, 한글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과 가치에 대해 알아본다. --------------------------------------------------------------------------------------- 내레이션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딱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내레이션 조선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말은 할 수 있어도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하여 세종대왕은 우리의 고유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되었다. 내레이션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양반 사대부들은 한글이라는 문자의 출현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젖어 있어, 한자에 비해 한글을 낮잡아 보는 태도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내레이션 세종대왕은 한글이 점차 보급되면 서민들이 생각과 뜻을 글로 적을 수 있게 되고, 이로 인해 일상생활에서 한글이 활용되어, 서민들의 생활 개선과 의식 성장을 가져올 것이라 굳게 믿었다. 인터뷰 정희원 /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한글의 창제정신은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 창제 시에 쓰셨던 어제 서문에 나타나 있는데요,우리가 보통 자주, 실용, 애민 이렇게 세 가지로 정리를 할 수 있겠습니다.자주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말이 중국말하고는 다르다. 그래서 우리만의 독자적인글자가 필요하겠다고 말씀하신 부분에 자주정신이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고요.실용정신은 쉬운 글을 만들어서 사람마다 널리 편안하게 쓰게 하겠다고 하신 데서우리가 실용정신을 엿볼 수 있고요.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게 애민정신인데,어리석은 백성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혹은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글을 몰라서 나타내지 못하니까 이것을 매우 안타깝고 가엾게 여겨서 새 글을 만들겠다고 하셨죠.그래서 자주정신, 실용정신, 그리고 애민정신 이렇게 3가지가 한글창제의 동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레이션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은 우주의 원리를 담고 세상 모든 소리를 담을 수 있는 문자를 만들고자 했다. 하늘과 땅, 사람의 모습을 담은 현대의 한글은 자음과 모음 24자를 조합하여 무려 11,172자의 글자를 만들 수 있다. 내레이션 한글의 글자형태는 발음하는 소리에 근거하여 사람의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보고 만들었다. 예를 들어 미음은 ‘ㅁ’, ‘ㅁ’, 미음에서 발음이 더 세어지면 비읍으로 ‘ㅂ’,‘ㅂ’, 다시 비읍에서 발음이 좀 더 세어지면 피읖으로, ‘ㅍ’, ‘ㅍ’, 이처럼 글자의 형태와 소리 나는 구조가 일치하면 기억하기 쉬워져 처음 접하는 외국인도 한 시간 정도 배우면 문자 시스템을 이해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글은 배우기 쉽게 만들어졌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슬기로운 자는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칠 것이오, 어리석은 자는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 라고 전해지고 있다. 내레이션 한글 사용을 확대하는 데에는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양반 사대부 계층에서는 여성도 한문 교육을 받는 일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여성들끼리, 또는 여성과 남성이 편지를 주고받을 때에는 주로 한글을 많이 사용했던 기록들이 남아 있다. 내레이션 우리 민족의 글에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여서 사용한 사람은 주시경이다. 주시경은 개화기에 우리말과 글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교육과 연구에 힘쓴 사람인데, 그 후로 ‘한글’이라는 명칭이 일반화 되었다. 내레이션 백성들이 쉽고 편리하게 문자 생활을 도모하도록 만든 한글, 세계에서 유일하게 만든 사람과 창제시기, 창제 원리까지 알고 있는 신비한 문자 한글은 교육을 통해 세계 속에 알리는 것뿐 아니라 한글을 활용한 디자인 제품을 통해서도 세계적으로 그 모습을 알리고 있다고 한다. 인터뷰 이건만 / 이건만 CEO 가장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유산이 뭘까 하다가 우리의 자연 발생적인 문화의 대표성을제가 고민해 보고 연구를 해본 결과 한글이라는 주제가 가장 한국을 대표하는 주제 같아요. 내국인들도 좋아하지만 특히 외국인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거 같아요.다른 데 가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문양이고, 특히 한글이 디자인적인 요소로 완벽하거든요. 굉장히 모던한 스타일이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적 요소로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한글이 들어간 제품들을 보면 훨씬 더 선호하고, 굉장히 좋아들 하는 거 같습니다. 내레이션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만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얼이 담겨 있으며, 고유 언어를 잃은 민족은 더 이상 민족이라 말하기 어렵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은 우리말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역경을 헤치고 ‘한글’을 지켜내어 민족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앞으로도 한글을 잘 보존하고 발전 시켜 나감으로써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널리 알리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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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가정교육의 지혜를 배워보자, 한석봉과 어머니

가정교육의 지혜를 알아볼 수 있는 한석봉과 어머니 이야기를 들어보자.---대본---나레이션가정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한석봉과 어머니의 일화를 통해 참 된 교육의 가치를 발견해보는 건 어떨까요?떡 장사를 하며 아들 뒷바라지를 하던 한석봉의 어머니는 글 공부를 위해 아들을 전라남도 영암의 중림정사로 떠나보냅니다.어머니는 10년 동안 학업에만 매진하라며 보고 싶어도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를 하는데요, 한석봉은 어머니의 큰 가르침을 받아 굳은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서죠.3년이 지나고 어머니가 그리웠던 한석봉은 한밤에 집으로 돌아옵니다.한석봉은 반가운 마음에 어머니께 달려 들어가지만 어머니는 갑자기 찾아온 아들의 모습에 많이 놀랍니다. 어머니는 집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물었고 한석봉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글 솜씨를 자만하며 글방을 나와도 된다고 어머니께 말합니다.그의 말에 어머니는 참 된 가르침을 주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됩니다.불을 끈 상태로 한석봉은 종이에 글을 쓰고, 어머니는 내일 장에 내다 팔 떡을 썰어내자는 것이었습니다.불을 끈 상태에서 누가 더 예쁘게 쓰고, 써느냐에 대한 대결이었던 것이죠.어머니는 한석봉이 이기면 공부를 그만하고 지금 집으로 돌아와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석봉이 진다면 지금 바로 다시 공부를 위해 죽림정사로 떠나야 된다고도 하셨죠.칠흑같이 깜깜한 방안에서 어머니는 떡을 썰고 한석봉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한참 후 어머니가 다시 불을 켰습니다.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어머니가 썬 떡은 하나같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반면 한석봉이 쓴 글씨는 삐뚤빼뚤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습니다.어머니는 한석봉의 글씨를 보고 다시 돌아가라고 냉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그 후 한석봉은 어머니의 뜻을 헤아리고 더욱 공부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합니다.결국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킨 한석봉은 훗날 서도의 명인이자 한문의 본고장인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명필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자막도산서원 전교당석봉 한호 (1543~1605)나레이션조선의 명필가인 한석봉의 서체는 당시 많은 이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퇴계선생이 세운 도산서원 전교당의 현판 역시 한석봉의 작품이지요.우리가 주로 한석봉이라고 알고 있는 그의 정식 이름은 ‘한호’입니다.‘석봉’은 그의 호입니다.추사 김정희 선생과 쌍벽을 이룬 그의 서예실력은 조선중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는데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국의 주요 문화재들에서 그의 글씨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한석봉의)글씨는 중국의 왕희지체(중국 최고의 서예가인 왕희지의 글씨체)를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왕희지체의 서법을 계속 학습하고 이 것을 자기화 시켜서 조선시대의 많은 서예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한석봉의 글씨체는)방정하고 단정한 서체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나레이션가정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한석봉과 어머니의 일화를 통해 참 된 교육의 가치를 발견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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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떡, 그 속에 담긴 한국인의 다양한 이야기

한국의 전통음식인 떡에 대한 소개영상 한국문화 100 떡, 그 속에 담긴 한국인의 다양한 이야기 나레이션 한국의 거리에서는 떡집을 쉽게 찾아볼수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음식인 떡은 예로부터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즐겨먹던 친숙한 음식입니다. 요즘도 명절, 결혼식, 생일 등 다양한 행사에서 떡을 찾고 있는데요 왜 한국인들은 이토록 떡을 찾는 것 일까요? 쌀 농사를 주로 짓던 옛 선조들은 남은 쌀 재료와 잡곡을 섞어서 떡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정확히 언제부터 떡을 만들어 먹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발굴 된 떡시루 등을 놓고 볼 때 청동기 또는 초기 철기시대부터 먹지 않았을까 짐작이 됩니다. 한국인들에게 떡은 오랜기간동안 많은 사랑을 받는 전통음식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인공 조미료가 가미된 자극적인 음식과는 달리 쌀, 콩, 팥 등의 천연 재료만으로 만들어지는 웰빙 음식인 떡은 지금까지도 건강식으로 한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죠 먹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부터 떡은 크고 작은 행사에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음식이었습니다. 특히 결혼과 같은 집안의 경사에 떡은 필수품이었는데요 행사별 떡의 자세한 의미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인터뷰 혼례 때는 찰떡(찹쌀떡)을 가지고 인절미를 비롯한 여러 가지 떡을 만들어 이바지로 보내고 있어요. 그 우수한 떡의 세계화를 위해서 우리가 좀 더 노력하여 우수한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 속에 꽃피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백일 때는 하얀색으로 떡을 만들죠. 그건 맵쌀가루로 물을 반죽한 후 시루에 안쳐서 만드는데, 아이가 순수하게 무럭무럭 자라라는 의미로 만들고... 또 나쁜 것을 막아주고 건강하게 잘 자라라는 의미로 수수팥떡을 열 살까지 해서 먹습니다. 나레이션 과거에는 직접 집에서 떡을 만들어 이웃과 나누어 먹는 풍습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화가 되면서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웰빙 열풍을 타고 직접 떡을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데요, 집에서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떡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인터뷰 이것은 단자라고 하는 떡이에요. 단자라는 것은 안에 소가 들어간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삶는 떡입니다. 경단은 소가 없는 것을 말하고 이렇게 소가 들어간 것을 단자라고 합니다. (단자는)어린아이 생일과 어르신들 생신 상에 많이 올려요. 이렇게 소를 넣고 바람을 빼줘야 해요, 바람이 안 빠지면 삶을 때 터집니다. 잘 안 터지게 꼭꼭 주물러서 동그랗게 돌려준 다음에 삶으면 됩니다. 자막 - 물이 펄펄 끓을 때 단지를 넣어준다. - 단지가 서로 달라붙지 않게 가끔 저어준다. - 물위에 단지가 뜨면 (약 6~7분 정도) 건져낸다. - 건져낸 단지는 완전히 식을 때까지 찬물에 헹구어낸다, - 찬물에 헹궈낸 단지는 자연 건조 시킨다. 이때 설탕을 조금 뿌려주면 수분이 빨리 제거된다. 인터뷰 이제는 삶은 단지에 고물을 묻히는 작업입니다. 자막 - 카스테라가루, 거피 팥, 녹차 가루 등 식성과 기호에 따라 다양한 고물을 만들어 묻히면 된다. -대추와 해바라기 씨 등으로 마무리해주면 끝. 나레이션 자 이제는 여러분도 집에서 맛있는 떡을 만들어 볼 수 있겠죠? 최근 한류열풍으로 인해 k푸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떡을 찾고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참 많아 졌는데요, 우리 전통음식인 떡에 대한 외국인들이 반응이 상당이 흥미롭습니다. 인터뷰 매우 흥미롭고, 전통적입니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배우게 돼서 즐겁습니다. 우리 떡,한과가 크고 푸짐한 것 보다는 한입에 쏙들어가는 것, 고물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그냥 먹을 수 있는 것, 이처럼 더 기능적인 식품이 들어 가야되고, 아름다워야 되고, 또 좀 두고 먹어도 굳지 않아야 되고, 이런 점들이 더 보완이 된다면 정말 훌륭한 떡, 한과가 되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이)떡을 하면서 내가 먹는 떡이 아니라 나누어 먹는 떡으로, 항상 가족을 생각하고 내가 좋은 일이 있을 때에 동네사람이나 직장동료들과 나누어 먹는 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아마 떡은 사랑이고 나눔이고 우리민족성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내레이션 이처럼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떡은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즐길 수 있는 웰빙 식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 우수한 떡의 세계화를 위해서 우리가 좀 더 노력하여 우수한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 속에 꽃피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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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김정호의 노력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이야기와 그 비화 ---대본---나레이션대동여지도는 조선후기 김정호가 제작하였다. 고지도 중에서 유일하게 풍수사상에 기초를 둔 산줄기 표현방식과 산악투영도법으로 국토 전체를 그린 대동여지도는 한국의 고지도 중에서 가장 문화상징성이 강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인터뷰대동여지도는 조선후기 지도학의 여러 장점들, 성과들을 종합한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우리나라 지도중에서 가장 큰 지도이고요, 축척이 약 1:165,000 정도의 축척을 가진 지도입니다.남북으로는 약 6.6m 동서로 약 4.2m 정도의 크기를 가지는 지도입니다.아주 큰 축척의 지도이기 때문에 내용이 아주 풍부하고 정확하고 자세할 수 있었고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제작 되었다는 점입니다.목판으로 제작한 것은 여러벌을 제작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지도의 보급, 대중화, 공유화를 목적으로 했다는 점이 돋보입니다. 나레이션김정호는 조선후기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지도그리기가 취미였는데, 그의 영민함은 마을 사람 모두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는 사람들이 정확한 길을 알지 못해서 사고가 나는 것을 많이 보고 정확한 지도 만들기에 인생을 바칠 것을 결심한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도 그리기에 열중한다. 산과 바다, 겨울과 여름을 가리지 않고 떠난 그의 여정은 엄청난 고난의 길이였다. 굶주림과 병마로 쓰러지기가 부지기수였으며,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그가 백두산을 여 덟 차례나 올랐다는 설도 있을 정도였다. 1861년, 마침내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대동여지도가 완성됐다. 일설에 의하면 대동여지도를 본 대원군이 군가기밀 유출을 우려해 김정호를 옥에 가두었다고하는데 그 후에 그의 업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인터뷰그런데 최근에 많은 연구에 의하면 고산자 김정호 선생은 옥사를 하지도 않았고, 대원군이 옥에 가두지 않았다라는 것이 밝혀졌고요, 그리고 김정호가 딸과 함께 둘이서 굉장히 어렵게 핍박을 받아가면서 만들었다라고 일제강점기(자료)에 나와있었는데 그것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최근에 판명이 되고 있습니다.이게 대동여지도 복제본입니다. 여기 보시면 당저십이년신유 라고해서 철종12년 신유년 1861년에 간행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지도표’라고 하는 대동여지도에서 사용한 범례를 수록해 놓았습니다.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특징중에 하나는 기호를 많이 사용해서 매우 명확하고 지도학적으로 훌륭한 지도를 만들었다는 점에 있습니다.역을 기호로 표시하고 ‘역’이라는 글자는 쓰지 않은거죠. 그래서 ‘양재’라고만 표시를 했습니다. ‘부산진’이라고 한다면 ‘부산’만쓰고 사각형으로 표시를 한거죠. 나레이션김정호는 공적인 도움 없이 개인의 의지와 재능으로 혼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그가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대동여지도를 만들지 않았다는 설들이 많으나 그 사실 여부를 떠나 뛰어난 제도기술과 과학적 제도방법을 통해 가장 사실적인 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모두 동의할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실측에 의한 현대지도가 나오기 전까지 가장 정밀한 지도였다. 이 훌륭한 문화유산이 나오기까지 한 개인이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는지를 우리는 알아야한다.그의 위대함과 노고를 한번 더 되새겨 보는 일이어야 말로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고 알리는 시작일 것이다. ?

제작
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0

[한국문화100] 대한민국의 영토 독도

한국문화100 독도편 대본 내레이션한반도 동쪽의 작은 섬. 천연기념물 336호. 바다를 거치는 새들의 안식처.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여 다양한 어종이 모여드는 황금어장. 천연가스층이 발견된 해저자원의 보물창고. 신라시대 사람 이사부부터 조선의 안용복 그리고 1950년 해방 이후 독도의용수비대원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곳.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저는 대한민국의 영토 독도입니다. 평화로운 섬인 저 독도는 아픈 과거로 지금까지 상처 받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의 첫 희생물이었습니다. 제국주의 야욕에 불타던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1905년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위해 독도를 주인 없는 섬이라며 불법 편입합니다. 그런데 저 독도가 과연 일본의 주장대로 주인 없는 섬이었을까요? 1145년에 발간된 삼국사기를 포함하여 한국의 수많은 옛 문헌과 지도들은 독도를 오랜 옛날부터 한국의 영토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1454년 제작된 세종실록지리지는 울릉도와 독도의 위치를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1900년 대한제국은 칙명 제 41호로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다시 한 번 명확히 합니다. 일본의 기록은 어떨까요? 일본은 1905년 이전에는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일본 문헌은 독도가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17세기 말 일본은 공식문서를 통해 독도가 공식영토가 아니라고 스스로 인정합니다. 1877년 일본정부 최고 행정기관인 태정관은 일본 전역의 지적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밀한 조사 끝에 독도가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110년간 숨겨져 있다가 1987년에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 태정관 문서는 독도가 일본영토가 아님을 일본정부가 공식 확인한 명백한 증거입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카이로, 포츠담 선언 등 전후 처리 과정에서 패전국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모든 지역으로부터 쫓겨납니다. 저 독도도 한국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1946년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677호는 독도를 분명한 한국의 행정관할 구역으로 선포합니다. 인터뷰성일종 / (사)독도사랑운동본부 부총재분명히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일본과 우리가 이러한 가치의 문제 때문에 많이 싸우게 될 겁니다. (독도가 일본의 것이라고)잘못 교육받은 일본의 메인스트림(주류사회)과 우리의 젊은이들이 대응을 하게 될 텐데요. 그에 대한 일환으로 순수한 국민운동으로, 막연히 독도는 정부가 지켜줄 것이라고 지금도 국민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서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전체가 소중한 영토에 대한 교육을 통해서 일본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민부 / 한국교원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독도는 우리의 땅임에 틀림이 없고 또한 국제법적으로도 현재 우리가 이 땅을 소유하고 있고 방공식별구역이라든지 항공식별구역 등등 국제조약을 통한 국제 협약에서도 현재 이 부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이 문제는 얼마든지 우리가 논쟁을 해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만 일본은 자기들이 시네마현에 편입을 했다고 하는 1905년 사실 하나만 가지고 줄기차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독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 국력을 튼튼히 해서 조금도 허술한 면이 없도록 독도를 잘 지킬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레이션저 독도는 대한민국 주권회복에 상징입니다. 저를 둘러싼 일본의 역사왜곡문제는 건전한 한일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치명적인 현안입니다. 동반자적 관계로 미래를 열기 위해 일본의 끊임없는 도발적 행동으로부터 평화의 섬, 저 독도를 기억하고 지켜주세요. 저는 영원히 한반도의 동쪽 끝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로 자랑스럽게 서 있겠습니다. ?

제작
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0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