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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100]가정교육의 지혜를 배워보자, 한석봉과 어머니

가정교육의 지혜를 알아볼 수 있는 한석봉과 어머니 이야기를 들어보자.---대본---나레이션가정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한석봉과 어머니의 일화를 통해 참 된 교육의 가치를 발견해보는 건 어떨까요?떡 장사를 하며 아들 뒷바라지를 하던 한석봉의 어머니는 글 공부를 위해 아들을 전라남도 영암의 중림정사로 떠나보냅니다.어머니는 10년 동안 학업에만 매진하라며 보고 싶어도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를 하는데요, 한석봉은 어머니의 큰 가르침을 받아 굳은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서죠.3년이 지나고 어머니가 그리웠던 한석봉은 한밤에 집으로 돌아옵니다.한석봉은 반가운 마음에 어머니께 달려 들어가지만 어머니는 갑자기 찾아온 아들의 모습에 많이 놀랍니다. 어머니는 집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물었고 한석봉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글 솜씨를 자만하며 글방을 나와도 된다고 어머니께 말합니다.그의 말에 어머니는 참 된 가르침을 주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됩니다.불을 끈 상태로 한석봉은 종이에 글을 쓰고, 어머니는 내일 장에 내다 팔 떡을 썰어내자는 것이었습니다.불을 끈 상태에서 누가 더 예쁘게 쓰고, 써느냐에 대한 대결이었던 것이죠.어머니는 한석봉이 이기면 공부를 그만하고 지금 집으로 돌아와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석봉이 진다면 지금 바로 다시 공부를 위해 죽림정사로 떠나야 된다고도 하셨죠.칠흑같이 깜깜한 방안에서 어머니는 떡을 썰고 한석봉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한참 후 어머니가 다시 불을 켰습니다.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어머니가 썬 떡은 하나같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반면 한석봉이 쓴 글씨는 삐뚤빼뚤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습니다.어머니는 한석봉의 글씨를 보고 다시 돌아가라고 냉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그 후 한석봉은 어머니의 뜻을 헤아리고 더욱 공부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합니다.결국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킨 한석봉은 훗날 서도의 명인이자 한문의 본고장인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명필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자막도산서원 전교당석봉 한호 (1543~1605)나레이션조선의 명필가인 한석봉의 서체는 당시 많은 이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퇴계선생이 세운 도산서원 전교당의 현판 역시 한석봉의 작품이지요.우리가 주로 한석봉이라고 알고 있는 그의 정식 이름은 ‘한호’입니다.‘석봉’은 그의 호입니다.추사 김정희 선생과 쌍벽을 이룬 그의 서예실력은 조선중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는데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국의 주요 문화재들에서 그의 글씨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한석봉의)글씨는 중국의 왕희지체(중국 최고의 서예가인 왕희지의 글씨체)를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왕희지체의 서법을 계속 학습하고 이 것을 자기화 시켜서 조선시대의 많은 서예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한석봉의 글씨체는)방정하고 단정한 서체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나레이션가정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한석봉과 어머니의 일화를 통해 참 된 교육의 가치를 발견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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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대한민국의 영토 독도

한국문화100 독도편 대본 내레이션한반도 동쪽의 작은 섬. 천연기념물 336호. 바다를 거치는 새들의 안식처.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여 다양한 어종이 모여드는 황금어장. 천연가스층이 발견된 해저자원의 보물창고. 신라시대 사람 이사부부터 조선의 안용복 그리고 1950년 해방 이후 독도의용수비대원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곳.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저는 대한민국의 영토 독도입니다. 평화로운 섬인 저 독도는 아픈 과거로 지금까지 상처 받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의 첫 희생물이었습니다. 제국주의 야욕에 불타던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1905년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위해 독도를 주인 없는 섬이라며 불법 편입합니다. 그런데 저 독도가 과연 일본의 주장대로 주인 없는 섬이었을까요? 1145년에 발간된 삼국사기를 포함하여 한국의 수많은 옛 문헌과 지도들은 독도를 오랜 옛날부터 한국의 영토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1454년 제작된 세종실록지리지는 울릉도와 독도의 위치를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1900년 대한제국은 칙명 제 41호로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다시 한 번 명확히 합니다. 일본의 기록은 어떨까요? 일본은 1905년 이전에는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일본 문헌은 독도가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17세기 말 일본은 공식문서를 통해 독도가 공식영토가 아니라고 스스로 인정합니다. 1877년 일본정부 최고 행정기관인 태정관은 일본 전역의 지적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밀한 조사 끝에 독도가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110년간 숨겨져 있다가 1987년에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 태정관 문서는 독도가 일본영토가 아님을 일본정부가 공식 확인한 명백한 증거입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카이로, 포츠담 선언 등 전후 처리 과정에서 패전국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모든 지역으로부터 쫓겨납니다. 저 독도도 한국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1946년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677호는 독도를 분명한 한국의 행정관할 구역으로 선포합니다. 인터뷰성일종 / (사)독도사랑운동본부 부총재분명히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일본과 우리가 이러한 가치의 문제 때문에 많이 싸우게 될 겁니다. (독도가 일본의 것이라고)잘못 교육받은 일본의 메인스트림(주류사회)과 우리의 젊은이들이 대응을 하게 될 텐데요. 그에 대한 일환으로 순수한 국민운동으로, 막연히 독도는 정부가 지켜줄 것이라고 지금도 국민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서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전체가 소중한 영토에 대한 교육을 통해서 일본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민부 / 한국교원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독도는 우리의 땅임에 틀림이 없고 또한 국제법적으로도 현재 우리가 이 땅을 소유하고 있고 방공식별구역이라든지 항공식별구역 등등 국제조약을 통한 국제 협약에서도 현재 이 부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이 문제는 얼마든지 우리가 논쟁을 해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만 일본은 자기들이 시네마현에 편입을 했다고 하는 1905년 사실 하나만 가지고 줄기차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독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 국력을 튼튼히 해서 조금도 허술한 면이 없도록 독도를 잘 지킬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레이션저 독도는 대한민국 주권회복에 상징입니다. 저를 둘러싼 일본의 역사왜곡문제는 건전한 한일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치명적인 현안입니다. 동반자적 관계로 미래를 열기 위해 일본의 끊임없는 도발적 행동으로부터 평화의 섬, 저 독도를 기억하고 지켜주세요. 저는 영원히 한반도의 동쪽 끝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로 자랑스럽게 서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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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농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다, 풍물 굿

농악이라 불리는 풍물 굿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대본---내레이션이때 농사꾼들의 능률을 올려주기 위해서 한데 모여 흥을 돋우는 의식을 벌였는데 이를 풍물 굿 이라고 한다.주로 농사를 할 때 행해져 농악으로도 알려져 있는 풍물 굿은 농경사회를 이뤄온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을 알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농촌문화다.풍물 굿이 주로 타악기를 이용한 흥겨운 리듬의 굿판을 벌이는 게 기본 형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때때로 춤과 노래등의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재미를 더해주곤 한다.뿐만 아니라 서로 음식도 나누어 먹고 대화도 하는 등 다목적 기능의 종합예능 형태를 띠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버라이어티 행사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풍물 굿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한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공동노동을 하면서 노동의 애환을 달래주는 음악과 춤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한다.그러나 풍물 굿은 두레라는 강력한 조직에 힘입어 상당히 체계적으로 발달하였다. 인터뷰풍물 굿이란 농악이라고도 하는데요, 소위 풍물 꾕과리, 징, 장구, 북, 소고 등의 타악기들을 동원을 하고 여기에 음악적인 요소, 무용적인 요소, 연극적인 요소 등이 종합적으로 결합되어져 만들어지는 우리나라의 전통 공연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물 굿은 이른바 집단적인 신명이라고 하는 (한국인들이 신난다고 하는 것) 것을 가장 깊고 포괄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그런 역동성을 가지고 있는 공연 예술이라는 점에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겠습니다.내레이션풍물 굿의 형태와 특징은 지역마다 각기 다른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 한 팀들을 통해 풍물 굿을 만나보자.자막이서들소리보존회 (경상북도)경북 청도군 이서면에서 전승되는 농업노동 풍물굿으로 주민들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내레이션우리선조들의 마을 공동 문화상을 알아 볼 수 있는 대표 전통 문화, 풍물 굿. 농경문화가 없어지면서 자연스레 풍물 굿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전통문화를 지키는 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한 이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는 계속되리라 믿는다.앞으로도 풍물 굿은 한국 최고의 농민예술로 우리들에게 많은 울림을 줄 것이다. 시대는 변했지만 한민족의 한과 정서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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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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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3

[한국문화100]우리의 문자, 한글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과 가치에 대해 알아본다. --------------------------------------------------------------------------------------- 내레이션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 뜻을 담아서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딱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깨우쳐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내레이션 조선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말은 할 수 있어도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하여 세종대왕은 우리의 고유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되었다. 내레이션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양반 사대부들은 한글이라는 문자의 출현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젖어 있어, 한자에 비해 한글을 낮잡아 보는 태도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내레이션 세종대왕은 한글이 점차 보급되면 서민들이 생각과 뜻을 글로 적을 수 있게 되고, 이로 인해 일상생활에서 한글이 활용되어, 서민들의 생활 개선과 의식 성장을 가져올 것이라 굳게 믿었다. 인터뷰 정희원 /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한글의 창제정신은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 창제 시에 쓰셨던 어제 서문에 나타나 있는데요,우리가 보통 자주, 실용, 애민 이렇게 세 가지로 정리를 할 수 있겠습니다.자주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말이 중국말하고는 다르다. 그래서 우리만의 독자적인글자가 필요하겠다고 말씀하신 부분에 자주정신이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고요.실용정신은 쉬운 글을 만들어서 사람마다 널리 편안하게 쓰게 하겠다고 하신 데서우리가 실용정신을 엿볼 수 있고요.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게 애민정신인데,어리석은 백성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혹은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글을 몰라서 나타내지 못하니까 이것을 매우 안타깝고 가엾게 여겨서 새 글을 만들겠다고 하셨죠.그래서 자주정신, 실용정신, 그리고 애민정신 이렇게 3가지가 한글창제의 동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레이션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은 우주의 원리를 담고 세상 모든 소리를 담을 수 있는 문자를 만들고자 했다. 하늘과 땅, 사람의 모습을 담은 현대의 한글은 자음과 모음 24자를 조합하여 무려 11,172자의 글자를 만들 수 있다. 내레이션 한글의 글자형태는 발음하는 소리에 근거하여 사람의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보고 만들었다. 예를 들어 미음은 ‘ㅁ’, ‘ㅁ’, 미음에서 발음이 더 세어지면 비읍으로 ‘ㅂ’,‘ㅂ’, 다시 비읍에서 발음이 좀 더 세어지면 피읖으로, ‘ㅍ’, ‘ㅍ’, 이처럼 글자의 형태와 소리 나는 구조가 일치하면 기억하기 쉬워져 처음 접하는 외국인도 한 시간 정도 배우면 문자 시스템을 이해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글은 배우기 쉽게 만들어졌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슬기로운 자는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칠 것이오, 어리석은 자는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 라고 전해지고 있다. 내레이션 한글 사용을 확대하는 데에는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양반 사대부 계층에서는 여성도 한문 교육을 받는 일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여성들끼리, 또는 여성과 남성이 편지를 주고받을 때에는 주로 한글을 많이 사용했던 기록들이 남아 있다. 내레이션 우리 민족의 글에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여서 사용한 사람은 주시경이다. 주시경은 개화기에 우리말과 글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교육과 연구에 힘쓴 사람인데, 그 후로 ‘한글’이라는 명칭이 일반화 되었다. 내레이션 백성들이 쉽고 편리하게 문자 생활을 도모하도록 만든 한글, 세계에서 유일하게 만든 사람과 창제시기, 창제 원리까지 알고 있는 신비한 문자 한글은 교육을 통해 세계 속에 알리는 것뿐 아니라 한글을 활용한 디자인 제품을 통해서도 세계적으로 그 모습을 알리고 있다고 한다. 인터뷰 이건만 / 이건만 CEO 가장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유산이 뭘까 하다가 우리의 자연 발생적인 문화의 대표성을제가 고민해 보고 연구를 해본 결과 한글이라는 주제가 가장 한국을 대표하는 주제 같아요. 내국인들도 좋아하지만 특히 외국인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거 같아요.다른 데 가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문양이고, 특히 한글이 디자인적인 요소로 완벽하거든요. 굉장히 모던한 스타일이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적 요소로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한글이 들어간 제품들을 보면 훨씬 더 선호하고, 굉장히 좋아들 하는 거 같습니다. 내레이션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만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얼이 담겨 있으며, 고유 언어를 잃은 민족은 더 이상 민족이라 말하기 어렵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은 우리말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역경을 헤치고 ‘한글’을 지켜내어 민족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앞으로도 한글을 잘 보존하고 발전 시켜 나감으로써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널리 알리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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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조선 최고의 의학전서, 동의보감

현재까지도 인용되는 한의학의 대표서적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우리 민족의 의학서로 역사적의의가 높으며 의학지식과 치료법에 관한 백과사전이다. 유네스코 기록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동의보감의 가치를 알아보고 동의보감의 탄생과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 동의보감 대본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염병이 번지며 백성들이 고통을 받을 때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조대왕은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병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의학 서적을 제작하게 명하였다. 선조대왕은 태의인 신하 허준을 부르시고 “의학서를 편찬하라” 이와 같이 하교하셨다. 이러한 임금의 뜻을 받들어 허준은 왕실이 가지고 있던 여러 의학서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며 의서를 완성했으니, 이 책이 바로 동의보감이다. 인터뷰 김요한/ 산의학박물관 학예연구사 Q. 동의보감이랑 무엇인가? 동의보감은 의학서적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단순한 의학 서적이 아니라 그 시대를 집대성한 백과사전인데요, 동의는 중국이 북의와 남의로 나뉘어서 큰 양대 산맥으로 이루고 있었는데 이것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동의라는 제 3의 길을 간다는 의미를 띄며, 또 보감이라는 것은 감이라는 글자가 백과사전처럼 명확하게 객관적인 진실 된 내용만 담긴 주로 역사책이나 법전에 쓰이는 단어인데요, 그렇게 해서 이 둘이 합친 것이 동의보감으로, 길게 말하면 중국과는 또 다른 한의학적 길을 가는 백과사전이라는 뜻의 이름을 의미합니다. 나래이션 동의보감은 실제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경험한 의학 정보를 정리한 것은 물론이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의학 서적을 하나로 모아 집대성한 ‘동양 의학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일반인들을 위한 의학 서적이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의학서적 최초, 세계 기록 유산으로 동의보감이 등재되었다. 세계기록유산 동의보감, 어떻게 구성되어있을까 ? 인터뷰 김쾌정/ 허준박물관장 Q. 동의보감은 어떻게 구성 되어있나요? 동의보감은 25권 25책으로 구성되었으며 크게 5가지로 구분되어있습니다.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침구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동의보감에는 1212가지 방대한 약재가 등장하고 그 가운데서 637가지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중심으로 향약명이라고 해서 한글기록으로 일반서민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제작되어있습니다. 나래이션 동의보감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4권으로 구성된 내경편은 인체 내부의 구조와 문제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으며 외형편은 몸의 겉에서 관찰되는 부위의 기능과 질병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잡병편에는 질병의 원인과 증상 및 이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방법에 대한 기록이며. 탕액편은 약재 채취와 약을 달이는 내용 등, 또한 백성들을 위한 처방이 담겨 있다. 약재의 효능을 기술할 때 우리 땅에서 나는 향약명을 함께 써서 백성들 또한 약초를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침구편에는 침과 뜸을 만드는 법, 혈 자리 찾는 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목차 2권까지 포함해 동의보감은 모두 25권 25책으로 완성된 종합 의학 서적이다.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어떻게 활용 되었을까? 동의보감은 처음 목활자로 만들었으나 전하지 않고 이후 목판본으로 출간된 것이 전하고 있다. 글을 잘 쓰는 이가 판목위에 글자본를 작성하고 전문 각수가 글자를 새기게 된다. 글자새김이 끝나면 활판에 먹물을 묻혀 글자를 찍어내는데 방대한 양으로 동의보감은 편찬을마치고도 판각과 인쇄에만 3년이 걸렸다 당시 동의보감이 전국으로 널리 퍼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발달된 목판인쇄문화가 있어서 일 것이다. 나레이션 동의보감은 병이 발생하기 전 신체의 조화를 중시여기는 ‘양생’에 중심사상을 두고 있다. 동의보감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첫째, 하루의 금기는 저녁에 배부르게 먹지 말것 둘째, 한달의 금기는 그믐에 술을 많이 먹지 말것 셋째, 한해의 금기는 겨울에 멀리 가지 말 것 이 기록은 반드시 하지 말아야 금기사항이다. 이와 같이 동의보감에는 조선시대에도 예방차원의 양생법을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의보감에서 사람의 몸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신형장부도이다. 신형장부도는 살아 있는 사람의 체내에서 정기신의흐름과 오장육부의 운행을 그린 일종의 개념도인 것이다. 동의보감 신형장부도는 자연과 사람의 조화, 오장육부건강을 설명하고 있다. 허준은 오장육부를 건강하게 할 수 있는 예방법을 기록해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게 했다. 얼굴은 자주 만져주면 혈압, 동맥경화 등의 치료를 도와주는 효과가 있다. 귀는 신장과 관계가 깊다. 장수하기 위해서는 귀를 자주 만지는 것이 좋다. 이러한 예방법등은 인체에 저항력이 충분하다면 병이 생길 수 없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동의보감은 인체 내적인 조화와 균형을 중요하게 여겼고, 간편한 민간요법으로 처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의보감. 동아시아 최고의 의학백서! 독창적이고 명료한 기록, 동의보감에 담긴 건강한 삶과 생명을 이야기는 선조들이 후대에 남겨준 귀중한 기록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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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조선시대의 지식인의 상징, 퇴계 이황

조선시대 학자인 퇴계선생의 업적을 알아보자 ---대본--- 자막)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퇴계의 업적을 귀감 삼아 현재 우리의 삶 속에 많은 가르침과 교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나레이션청렴결백한 공직자이자 우수한 교육자, 그리고 성리학을 발전시킨 사상가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비인 퇴계이황. 퇴계 이황의 업적은 60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퇴계의 여러 업적중 가장 두드러 지는 것은 학자로서의 모습이다. 중국의 주자 이후에 동양에서 최고의 학자가 퇴계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그가 이처럼 많은 이들에 존경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가 학문을 연구한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퇴계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공직자로서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가 벼슬을 79번이나 사퇴했다는 이야기는 후세에 많은 귀감이 되는 좋은 일화다. 또한 도산서원을 비롯한 서원건립에 힘을 써서 많은 제자를 양성했는데, 출세를 하기 위해 학문을 닦는 안 좋은 학습 풍토를 개선하는데 퇴계 선생이 일조를 한 것이다. -인터뷰퇴계 선생이 살아 계실 당시에는 벼슬을 한다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습니다.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과거 공부를 해서 벼슬 정승판서가 되면 부귀영화가 다 따라왔어요.그런데 퇴계 선생은 임금이 벼슬을 주면 사양했습니다.그 횟수가 70번이 넘습니다.명종이란 임금이 퇴계 선생을 모시려고 했는데 안 오시니깐 화공을 보내서 도산서원을 그리게 했어요.퇴계 선생이 도산을 기술한 도산기라는 글이 있는데 그 것을 (그림에)쓰게 하고, 그 다음에 신하들을 시켜서 ‘명현부지탄’이라 ‘어진선비를 불러도 안오는 것을 탄식하노라’ 하는 시를 만들어서 임금이 자기 침실의 병풍에 쳐놓고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퇴계 선생 이후에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가 퇴계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많은 학자가 나오고 풍속이 순화해지고 도덕적인 수준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퇴계 선생이 직접 기른 제자들 중에는 나라에 기둥이 되는 명신들이 많았습니다. 자막퇴계이황(1501~1570) 나레이션그는 올바른 교육 문화를 위해서 손수 교과서를 만들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수립하였다. 또 항상 모범적인 태도로 바람직한 선비상을 보여 제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육자 이기도 했다. 그는 2000여편이 넘는 시를 남긴 문학자이자 효와 예법을 중시하고 실행한 인격자이며 성리학을 알린 사상가 등 다양한 방면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자막 매화시28년동안 매화에 관하여 지은 시를 모아 놓은 책이다.매화를 사랑한 퇴계 선생은 75제 107수에 달하는 많은 시를 남겼다. 무불경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조심하고 공경하여야 한다는 뜻. 도산십이곡퇴계선생이 도산의 산수를 소요하여 읊은 시조 성학십도유교철학의 주요체계 10가지를 도식으로 나타낸 것으로 68세떄에 작성하여 선조대왕께 보냄. 퇴계선생서절요퇴계선생의 중요한 서간(용건을 알리는 메모)을 모아놓은 책 퇴계선생언행록퇴계선생의 평소 언행을 기록해 둔 책으로 1613년 도산서원에서 간행함 나레이션특히 성리학의 심성론을 발전시키고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규명하는 등 조선시대 도학의 기본틀을 정립하였는데 큰 공을 세웠다. 유학의 철학적인 부분을 성리학이라고 부른다. 공자 시절 성현의 가르침들은 많았지만 이가 학문적으로 체계화 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13세기 송나라때와서 주자를 중심으로 학문적인 체계를 이루게 되는데 이를 성리학 이라고 부른다. 이 성리학을 발전시키고 널리 알린 대학자가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이다. 자막주자(1130~1200)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성리학)을 집대성한 학자. 도산서당퇴계선생이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직접 머무르면서 제자를 가르치던 곳 인터뷰사실 퇴계 선생은 조선의 유학자이기에 앞서 일본,독일,영국 등에 알려진 세계적인 유학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퇴계 선생이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우리의 역사를 당생과 당파의 역사로 매도한 것 때문입니다. 성리학, 주자학, 유학이 폄하된 면이 있습니다.그러나 학문적으로 일본과 독일 같은 곳에서 퇴계학 연구가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레이션지금도 일본과 독일 등에서는 퇴계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퇴계의 업적을 귀감 삼아 현재 우리의 삶 속에 많은 가르침과 교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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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질서이자 삶의 지혜, 풍수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조화롭게 계승시켜온 조상들의 삶의 지혜 풍수에 대해 알아본다. ---------------------------------------------------------------------------------------------------------- 자막 : 풍수(風水) 내레이션 : 풍수,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바람’과 ‘물’이라는 뜻입니다. 동아시아만의 땅과 공간을 해석하고 활용하는 고유한 사상인 풍수는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국가의 자연관을 잘 나타내고 있고, 실제로 조경과 건축 등에 영향을 미쳤던 사상인데요. 자막 :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국가의 자연관을 잘 나타내고 실제로 조경과 건축 등에 영향을 미쳤던 사상, 풍수 내레이션 : 풍수 사상은 중국 전국 시대 말기 이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 시대 이전에 전래되었는데, 일반적으로는 주로 묘지나 주택, 명당과 같은 터를 잡을 때 풍수가 쓰였습니다. 자막 : 풍수사상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 이전부터 시작,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이전에 전래됨. 내레이션 : 우리나라에 풍수이론이 수용된 시기를 추정하면, 역사적 문헌에 8세기임을 나타내고 있는데요. 도선이라는 사람이 풍수지리설의 시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막 : 풍수의 이론은 중국에서 비롯되었으나 8세기경 우리나라에 도입된 뒤 우리 나람의 생각과 가치가 더해짐. 자막 : 도선(道詵, 827~898) 도선은 신라 말기의 승려이자 우리나라 풍수설의 대가. 통일신라시대 김천 지역의 청암사를 창건한 승려로 도선 국사로 널리 알려짐. 내레이션 : 풍수는 땅의 질서와 이치를 이해하는 전통적 지혜이자 지리과학으로서, 현재까지 한국의 취락입지 및 조경, 공간배치와 구성, 건축 등에 널리 활용되고 되고 있습니다. 인터뷰 : 이공원 / 서경대학교 경영대학원 풍수지리 교수 풍수지리는 장풍득수의 준말로서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는 원리가 풍수지리인데, 대부분 사람은 풍수를 미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풍수지리라는 것은 태양과 지구가 어떤 관계인지를 설명하는 이론이 되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특히 우리나라 한민족이 오천 년간 살아오면서 누리고 있는 문화의 많은 부분이 풍수에 깃들여져 있기 때문에 풍수지리는 우리 생활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내레이션 : 풍수지리의 이론은 매우 상식적이고 본능적이며 자연발생적인 것이 많은데요. 대표적인 예로 잠자리는 우리가 무의식, 무방비 상태에 있기에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데, 잠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안정감이 있으면서 편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막 : 풍수지리의 이론은 매우 상식적이고 본능적이며, 자연발생적인 것이 많음. 내레이션 : 잠자리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선 물론 방위에 따라 기운이 달라지지만, 우선적으로 머리를 방문에서 먼 곳에 두고 그 다음 창문에서 먼 곳에 두는 것이 좋다고 하는데요. 자막 : 잠자리를 편안하게 하기 위한 풍수 인테리어 - 머리를 방문에서 먼 곳에 두면 좋음 - 그 다음에는 창문에서 먼 곳에 두면 좋음 내레이션 : 풍수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대각선 시야가 가장 커야 외부 침입에 대한 불안감을 많이 덜 수 있고, 또한, 화장실도 침대에서 멀어야 좋다고 합니다. 자막 : 잠자리를 편안하게 하기 위한 풍수 인테리어 - 대각선 시야가 가장 커야 외부 침입에 대한 불안감 감소 - 화장실도 침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좋음 자막 : 조상들이 오랜 시간 땅과 자연을 세심한 관찰을 바탕으로 만든 삶의 지혜, 풍수(風水) 내레이션 :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조화롭게 계승시켜온 풍수,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땅에 대한 깨달음과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만든 삶의 지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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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9

[한국문화100] 한민족의 성산, 백두산

우리나라 최고 높은 산, 정상에 위치한 천지는 한민족의 성지이다.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한 한민족의 발상지인 백두산에 대해 알아보자. 백두산나레이션 높이 약 2,750m 총 면적 8천평방 킬로미터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백두산이다. 백색의 부석이 얹혀 있는 모습이 마치 흰머리와 같다 하여 백두산이라 부른다. 이민부/한국교원대 지리학과 교수Q. 백두산이란?백두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2744m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북아시아 대륙에서도 가장 높은 산지이고 특이하게도 화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깨끗하게 잘 만들어진 층층이 쌓인 성층화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화산채의 크기가 용암이 흘러내린 면적까지 하면 2만2천평 정도에 달하며 한반도의 10분의 1에 이르는 거대한 화산재입니다. 자막백두산 봄백두산의 봄은 6월 즈음에 돼서야 찾아온다. 장대한 백두 폭포로부터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해발 2000미터, 백두산의 고산화원에 냉랭한 찬바람을 이겨내고 백두산의 영기를 받은 꽃들이 피어오른다. 자막백두산 여름백두산의 연평균 기온은 영하7.3도고 최저 기온은 영하44도에 달한다. 7월 중 잠시나마 짧은 여름이 찾아온다. 수면 10미터 깊이 있는 돌이 마치 잡힐 듯 천지의 물은 맑다. 자막백두산 가을한반도에서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9월 초, 백두산에는 일찌감치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 가을이 시작되는 것이다. 곱게 물든 가을풍경은 백두산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이점수/ 사진작가Q. 백두산 등산 당시 모습?처음 백두산을 올랐을 때 웅장함과 장엄함의 기상적인 백두산의 느낌은 숨이 멈출 정도로 감개무량했습니다. 그리고 또 (백두산의 매력으로는) 가을에 백두산을 촬영 하다보면 온도가 내려가고 날씨가 추워지면 눈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10월이나 9월 하순에 백두산 등반 시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막백두산 겨울눈으로 뒤덮인 백두산의 설경이 장관인 이때. 바로 백두산의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계곡 위로 두껍게 쌓인 눈은 이듬해 7월까지도 녹지 않는다. 하지만 한겨울에도 50도가 높은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는 백두산 온천의 신기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백두산은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한민족의 발상지였으며,숭배되어 왔던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수난을 같이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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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예와 의를 지킨 조선시대 순고한 정신, 선비

조선시대 선비정신을 배우고 느껴보자 ---대본---나레이션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유교적 인격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선비는 관직이나 신분의 의미보다는 지성과 실천을 겸비한 인격체로서의 추상적인 의미를 지니는 사람을 뜻합니다. 선비들은 기본적으로 양반 계층에서만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한문용어로는 사대부라고 하는데요, 유교의 도를 실현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교의 가장 높은 가르침인 ‘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아야 합니다. ‘살신성인’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선비들은 열심히 학문을 닦았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공부한 학문을 자기 자신의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들, 특히 백성들과 나누어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이 것이 바로 선비 정신입니다. - 인터뷰오늘날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선비정신은 남을 배려하는 배려의 정신이 꼭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만 아는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우리 세상을 평화롭고 자유롭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정신이 선비정신의 밑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레이션선비정신은 의리와 지조를 중요시합니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떳떳한 도리인 의리를 지키고, 그 신념을 흔들림 없이 지켜내는지가 선비들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인터뷰선비정신은 인의예지 그대로 마음을 다스리고 인정이 있고 또 예의가 바르고 가정을 다스리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이게 바로 선비정신입니다.글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선비)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선비들의 생활은 첫째,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공부라는 것이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위한 공부를 한 것입니다.그 다음에 일상생활을 절제 있게 했습니다.선비들은 배운 것을 실천하는 분들이었습니다.예를 들어 나라에 위급이 닥친 임진왜란 때나 일제 치하에서 나라를 빼앗길 위기 때는 목숨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서 싸운 거죠, 그러니깐 이해가 먼저가 아니고 옳고 그른 것이 먼저고 옳은 것을 위해서는 목숨도 바친다는 것이 선비정신인 거죠. 나레이션오늘처럼 혼탁한 사회에서 나라와 정의를 위해 의리와 신념을 지키는 선비의 모습!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선비에게 꼭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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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대한민국 국화, 무궁화

대한민국의 나라꽃[국화(國花)]이며, 예부터 한반도를 부르는 ‘근역(槿域)’의 유래이기도 하다. 한국문화100 무궁화편 대본 대한민국의 국화, 무궁화 내레이션 옛날 옛날에 장미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어린왕자가 있었습니다. 그 행성 옆에는 저 어린공주가 외롭고 쓸쓸하게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함께할 친구를 찾았죠. 자막 안녕, 무궁화 내레이션 아무도 찾지 않는 행성이지만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었어요. 궁금해진 저는 그 친구에게 말을 걸었지요. 넌 누구니? 안녕, 난 한국의 국화 무궁화라고 해. 오, 그래? 그럼 넌 어떤 꽃이니? 나는 한국인과 무려 오천년을 함께한 민족의 꽃으로 고조선 이전인 신시시대부터 한화로 불리며 한국인과 함께해왔지. 자막 무궁화는 고조선 이전인 신시시대부터 한화로 불린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내레이션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내 품종은 수 백 종으로 배우 다양해. 대표적으로 배달계, 홍단심계, 백단심계 등이 있지. 자막 무궁화의 품종은 수 백 여종으로 매우 다양함 대표적으로 배달계, 홍단심계, 백단심계가 있음 내레이션 이름만으로는 잘 모르겠는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니? 물론이지. 자막 배달계 흰색을 좋아하는 배달민족을 닮았다해서 배달계로 불리며 단심이 없는 순백의 무궁화 내레이션 우선 배달계 무궁화는 흰색을 좋아하는 배달민족을 닮았다고 해서 배달계라고 불려. 그리고 무궁화 중에 품종 수가 가장 많은 홍단심계는 붉은색 계통의 꽃잎과 단심으로 가지고 있어서 홍단심계로 불리지. 자막 홍단심계 붉은색 계통의 꽃임에 가운데 붉은 단심이 있으며 무궁화 중에 품종수가 가장 많음 내레이션 또 백단심계는 흰 꽃잎 가운데 붉은 단심이 있는 무궁화야. 자막 흰 꽃잎에 가운데 붉은 단심이 있음 재래종과 도입종의 교잡에서 선발한 무궁화 내레이션 아 그럼 넌 백단심계 무궁화구나 오, 똑똑한데? 아 그리고 꽃잎에 무늬가 있는 아사달계나 외국도입품종인 청단심계 무궁화도 있어 자막 청단심계 아사달계 아사달계는 꽃잎에 무늬가 있는 무궁화이며 청단심계는 외국도입품종이다. 내레이션 또한 나는 황실이나 귀족들에 의해서 국화가 정해진 다른 나라들과 달리 민중들에 의해서 나라꽃으로 정해졌단다. 오, 멋있다. 근데 왜 난 너를 한 번도 보지 못 했을까? 그건 한국인들이 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사실 나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거의 멸종될 뻔 했었어 일본인들이 민족정신을 말살 시킨다고 나를 보기만 해도 눈병이나고 진드기가 많이 꼬이는 꽃으로 매도했거든. 그 바람에 현대의 한국인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갖게 되었지 아, 그랬구나. 자막 일제강점기시대 때 무궁화는 일본의 민족정신 말살에 의해 거의 멸종 될 뻔 했다. 진드기가 많은 꽃, 눈병을 옮는 꽃 내레이션 하지만 이제 8월 8일을 무궁화의 날로 제정할 만큼 나에 대해 관심이 많아져서 괜찮아. 그런데 왜 하필 8월 8일이야? 그 이유는 8월에 내가 제일 만개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숫자 8을 옆으로 보면 무한대 기호가 되지? 응, 그렇네. 그 기호는 끝없이 반복되고 무궁하다는 뜻으로 내 이름의 뜻과도 같아 그리고 나는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는 걸 100일 동안 매일 반복해 이러한 나의 영원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한국인의 정신에 반영되어 있지. 너 정말 대단한 꽃이구나. 그런데 해가 지면 널 다시 볼 수 없는 거야? 아니야, 한국에 가면 날 다시 볼 수 있어 아 한국? 한국은 어디에 있어? 저기 있는 별 보여? 안녕, 무궁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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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9

[한국문화100] 전통잠수문화 상징, 해녀

해녀는 몸에 아무런 장치 없이 맨몸으로 잠수해서 전복ㆍ소라ㆍ미역ㆍ우뭇가사리 등 해산물을 직업적으로 채취하는 여자를 말한다. 해녀의 본고장인 제주에서는 이들을 ‘잠녀(潛女)’ 혹은 ‘잠수(潛嫂)’라 부르는데, 이들 잠녀는 전통적 잠수문화의 상징이자 제주여인의 강인한 삶과 독특한 문화를 상징하는 결정체이다나레이션-----------------------------------------------------------------------------------------------평화로운 잔잔한 물결과, 때로는 거센 파도가 치는 낭만의 바다, 이 곳은 그녀들의 삶과 직결된 곳이다.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 때에는 제주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들을 볼 수 있다. 기계장치 없이, 맨 몸과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의한 호흡 조절로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성을 해녀라 부른다. 인터뷰해녀의 유래?(해녀의 시초의 역사적 자료는 없지만) 추정해본다면 제주도의 토질이 척박하고 땅에서보다는 바다에서 생산되는 것 들이 많기 때문에 (물질이 시작되었고) 옛 당시에는 남녀가 모두 바닷물에 들어가(해산물을)채취하는 일을 했지만, 남성들도 있었지만 남성들은 조선시대에 규모가 줄어들며 여성들이 그 빈틈을 채우며 지금까지도 여성들이 물질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해녀들은 수중장비 없이 물옷을 입고 물질준비를 한다.물안경, 태왁망사리, 빗창 등 물질도구를 챙기면 모든 준비는 끝이 난다. 특별한 재능과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다, 생계를 지키다보니 해녀가 돼 있었다고 한다.빈손으로 물속에 들어가 망사리 가득 해삼물을 따왔고 어머니들은 그것으로 자식들을 키웠다. 인터뷰고천혜자/ 제주도 해녀누구한테 배우긴~, 스스로 하다 보니 배워진 거지~다른 사람들 하는 거 보고 나도 하게 됐지, 장광자/제주도 해녀나는 건넛마을 바다에 있는 해녀인데, 우리 할머니도 어머니도 해녀였고,우리는 학교 갈 생각은 안 하고 어머니 따라가 놀다 보면 배우게 됐고,어머니 따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해녀가 됐지 예전에는 관광손님도 없다 보니깐, 바다 물건을 잡아서 팔대도 없었던 거 같아. 그래서 바다 해초 따서 밭에 거름을 주고, 돈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미역, 우리가 어른이 돼서 보니깐 우리 어머니들이 미역을 팔아서 자식들 시집도 보내고 우리 어머님들이 이렇게 우리를 키워주셨지~ 나레이션옛 부터 지금까지 바다는 늘 아낌없이 내어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또한 해녀들에게 불턱은 돌담의 바람을 막고 불을 지펴 추위를 녹여주는 사랑방 역할을 한다 자막불턱해녀들이 바닷가 양지뜸에서 불을 쬐는곳수련,교육, 위계질서 등 해녀 공동체의 상징 인터뷰이승훈/ 제주해녀박물관 관장과거에 해녀 분들이 바닷가에서 물질을 하면 체온이 낮아지면 체온을 올리기 위해서 불을 피워놓고 몸을 녹이는 장소인데요, 그 장소에서 여러 해녀들이 몸을 녹이고 어린 해녀에게는 해양의 지식을 가르치고 경력이 많은 해녀 분에게는 노하우를 배우며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는 민주적으로 결정을 해서 모든 마을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나레이션 물속에 들어가면 해녀들은 아픈 몸도, 나이도 잊는다고 한다또한 해녀들은 채취기간과 금채기간 등을 규약으로 정해놓고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자생적인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해녀들은 바다밭을 단순 채취의 대상이 아닌 끈임없이 가꾸며 자연과의 공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터뷰 장광자/제주도 해녀그렇게 힘든 점은 없는데 소라를 채취하던가, 그러면 수심 깊은데 가면 전복도 따고 소라도 잡고 오다 저 쪽에 있는(소라를) 보고는 아까워서 그것까지 가지고 오려면 숨이 깔딱 넘어갈 때가 있지, 그 (숨비)소리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고, 자연으로 쉬익~소리가 나와. 호이~ 허이~ 숨 돌아오는 숨비소리지! 또 물건 많이 잡는 날이면 그날 기분도 좋고 피로도 풀리고, 못 잡은 날은 힘도 많이 들고 죽을 거 같고 (그래) 이들 해녀는 전통적 잠수문화의 상징이자 여인의 강인한 삶과 독특한 문화를 상징하는 결정체이다. 바다 속 깊은 곳에는 그녀들의 신비한 삶이 담겨있다. 진취성과 더불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공동체 문화. 바다의 어멍, 해녀는 우리 소중한 문화유산이다------------------------------------BGM - 해녀, 이름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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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그리운 그 곳, 금강산

금강산은 우리강산 중 가장 빼어나고 수려한 상징물이다. 특히 남북화해 및 교류의 물꼬를 튼 상징이기도 하다. 동해에 임박한 태백산맥 북부의 아름다운 명승지, 금강산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민족의식의 샘터 금강산에 대하여 알아보자. 금강산 대본 자막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 - 송나라 시인 소동파 천길 흰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섬 진주알을 홑뿌렸는가신라 문인 최치원 금강산 관광 당시 인터뷰 김두진/관광객 금강산을 왔다 가는데감개가 무량합니다. 정선영/관광객 (금강산 방문에) 오늘 너무너무 기쁩니다. 자유롭게 만나고 서로 오며 가며 불편 없이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자막 산 전체가 수정으로 만들어진 듯 빛나는 보석 그 자체이다. 그리운 그 곳, 금강산 금강산의 동서 너비는 약 40KM, 남북길이는 약 60KM, 그 면적은 약 530㎢ 8개 연못, 선녀들이 찾았다던 전설이 내려오는 이곳은 아름다운 은빛 줄기를 가진 상팔담이다. 금강산관광 당시 인터뷰 김영덕/서양화가 대단합니다. 금강산 이쪽이 원래 물 맑고. 공기 맑고 단풍이 물들었는데, 완전히 순수한 붉은 색입니다. 붉은색으로 가기 전, 노란색, 주황색 (단풍의 경치가) 대단합니다. 자막 금강산에 담긴 수천가지의 색들이 어우러져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금강산의 가을은 기암절벽과 단풍이 어우러져 한곡의 멋진 풍악을 울린다 하여 풍악산이라 불려 운다 자막 세존봉에서 본 장전항 내금강에서 외금강 해금강으로 이어지는 금강산의 웅대한 면모. 이정수/사진작가 금강산을 보지 않고는 천하의 절경를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금강산을 조명할 때 가장 감사하다고 할까,자연이 주는 보배라고 느껴질 때 또 현재도 금강산은 훼손이 안됐다는 것을 보면.. 가장 큰 매력으로 뽑을 수 있습니다. 자막 봄에는 금강, 여름에는 봉래, 가을엔 풍악, 겨울엔 개골산 여러 이름을 갖은 금강산의 천 가지의 얼굴, 만 가지의 표정을 다시 볼 수 있도록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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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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