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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100] 전통잠수문화 상징, 해녀

해녀는 몸에 아무런 장치 없이 맨몸으로 잠수해서 전복ㆍ소라ㆍ미역ㆍ우뭇가사리 등 해산물을 직업적으로 채취하는 여자를 말한다. 해녀의 본고장인 제주에서는 이들을 ‘잠녀(潛女)’ 혹은 ‘잠수(潛嫂)’라 부르는데, 이들 잠녀는 전통적 잠수문화의 상징이자 제주여인의 강인한 삶과 독특한 문화를 상징하는 결정체이다나레이션-----------------------------------------------------------------------------------------------평화로운 잔잔한 물결과, 때로는 거센 파도가 치는 낭만의 바다, 이 곳은 그녀들의 삶과 직결된 곳이다.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 때에는 제주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들을 볼 수 있다. 기계장치 없이, 맨 몸과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의한 호흡 조절로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성을 해녀라 부른다. 인터뷰해녀의 유래?(해녀의 시초의 역사적 자료는 없지만) 추정해본다면 제주도의 토질이 척박하고 땅에서보다는 바다에서 생산되는 것 들이 많기 때문에 (물질이 시작되었고) 옛 당시에는 남녀가 모두 바닷물에 들어가(해산물을)채취하는 일을 했지만, 남성들도 있었지만 남성들은 조선시대에 규모가 줄어들며 여성들이 그 빈틈을 채우며 지금까지도 여성들이 물질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해녀들은 수중장비 없이 물옷을 입고 물질준비를 한다.물안경, 태왁망사리, 빗창 등 물질도구를 챙기면 모든 준비는 끝이 난다. 특별한 재능과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다, 생계를 지키다보니 해녀가 돼 있었다고 한다.빈손으로 물속에 들어가 망사리 가득 해삼물을 따왔고 어머니들은 그것으로 자식들을 키웠다. 인터뷰고천혜자/ 제주도 해녀누구한테 배우긴~, 스스로 하다 보니 배워진 거지~다른 사람들 하는 거 보고 나도 하게 됐지, 장광자/제주도 해녀나는 건넛마을 바다에 있는 해녀인데, 우리 할머니도 어머니도 해녀였고,우리는 학교 갈 생각은 안 하고 어머니 따라가 놀다 보면 배우게 됐고,어머니 따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해녀가 됐지 예전에는 관광손님도 없다 보니깐, 바다 물건을 잡아서 팔대도 없었던 거 같아. 그래서 바다 해초 따서 밭에 거름을 주고, 돈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미역, 우리가 어른이 돼서 보니깐 우리 어머니들이 미역을 팔아서 자식들 시집도 보내고 우리 어머님들이 이렇게 우리를 키워주셨지~ 나레이션옛 부터 지금까지 바다는 늘 아낌없이 내어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또한 해녀들에게 불턱은 돌담의 바람을 막고 불을 지펴 추위를 녹여주는 사랑방 역할을 한다 자막불턱해녀들이 바닷가 양지뜸에서 불을 쬐는곳수련,교육, 위계질서 등 해녀 공동체의 상징 인터뷰이승훈/ 제주해녀박물관 관장과거에 해녀 분들이 바닷가에서 물질을 하면 체온이 낮아지면 체온을 올리기 위해서 불을 피워놓고 몸을 녹이는 장소인데요, 그 장소에서 여러 해녀들이 몸을 녹이고 어린 해녀에게는 해양의 지식을 가르치고 경력이 많은 해녀 분에게는 노하우를 배우며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는 민주적으로 결정을 해서 모든 마을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나레이션 물속에 들어가면 해녀들은 아픈 몸도, 나이도 잊는다고 한다또한 해녀들은 채취기간과 금채기간 등을 규약으로 정해놓고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자생적인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해녀들은 바다밭을 단순 채취의 대상이 아닌 끈임없이 가꾸며 자연과의 공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터뷰 장광자/제주도 해녀그렇게 힘든 점은 없는데 소라를 채취하던가, 그러면 수심 깊은데 가면 전복도 따고 소라도 잡고 오다 저 쪽에 있는(소라를) 보고는 아까워서 그것까지 가지고 오려면 숨이 깔딱 넘어갈 때가 있지, 그 (숨비)소리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고, 자연으로 쉬익~소리가 나와. 호이~ 허이~ 숨 돌아오는 숨비소리지! 또 물건 많이 잡는 날이면 그날 기분도 좋고 피로도 풀리고, 못 잡은 날은 힘도 많이 들고 죽을 거 같고 (그래) 이들 해녀는 전통적 잠수문화의 상징이자 여인의 강인한 삶과 독특한 문화를 상징하는 결정체이다. 바다 속 깊은 곳에는 그녀들의 신비한 삶이 담겨있다. 진취성과 더불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공동체 문화. 바다의 어멍, 해녀는 우리 소중한 문화유산이다------------------------------------BGM - 해녀, 이름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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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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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한반도의 평양은 역사상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역사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평양이 가지는 의미와 배경 주요 사건들에 대해 알아본다. ----------------------------------------------------------------------------------------------- 평양편 여러분, 안녕하세요!한국문화100 평양편 소개를 맡은 역사 교사 문인식입니다. 반갑습니다.여러분들은 평양이라고 하면 주로 뭐가 떠오르시나요?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아마 이런 북한의 정치인들이 떠오를 겁니다.이들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우리는 평양에 대해 자세히 모르고 있는데요.사실 대한민국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는인구 천만의 도시 서울도 아니고, 백제의 도시 공주도 아니고,천년 고도의 도시 경주도 아닌, 바로 평양입니다.이 평양에 대해서 자세하게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느끼시기에 평양이란 말이 어렵게 느껴지실 수 있겠지만,우리 고유어인 '부루나'라는 말을 한자로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부루'라는 말은 평평하다는 뜻이고요, '나'라는 말은 땅이라는 뜻이에요.합쳐서 말하면 평평한 땅이라는 거죠.여러분들이 실제로 평양에 가보면, 산도 없이 드넓은 평야가 있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그렇게 넓은 평야는 남한에서는 '호남평야' 밖에 비견될 곳이 없어요.이렇게 넓은 땅에 대동강이 흐르고 있습니다.대동강이 흐르기 때문에 땅은 한결 더 비옥해지고 사람들이 살기 좋아지는 것이죠.저 먼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이곳에서(평양에서) 사람들은 살았답니다.유명한 구석기 유적인 평남상원검은모루동굴이 바로 평양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이 유적에서는 신기하게도 물소, 원숭이와 같은 뼈들이 나오는데요.이 당시에 한반도가 훨씬 더 따뜻했음을 보여주는 유적 유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제 시대가 흘러 최초의 문명 최초의 우리나라 국가가 탄생하게 되죠.바로 어디입니까, 여러분 단군할아버지 아시죠?그렇습니다. 고조선입니다. 고조선의 수도 또한 평양이었습니다.이 고조선의 수도를 왕검성이라고 하는데요.왕검성의 위치가 만주라고 하기도 하고, 그리고 평양에 있기도 하고,이동했다고 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학설이 존재합니다.근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단군 조선 이후에 위만 조선일 때수도 왕검성은 확실히 평양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고조선은 이 왕검성, 평양을 거점으로 해서 중국의 한과남쪽의 진과의 중계 무역을 통해 이득을 얻기도 했죠.그러나 중국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한무제의 침략에 의해결국 고조선은 왕검성이 함락하게 되면서 멸망하게 됩니다. 시대가 흘러 삼국시대에 가보겠습니다.북쪽에 고구려, 남쪽에 백제, 신라가 있는 삼국시대 평양은 누구 땅이었을까요?그렇습니다. 드넓은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가 평양의 주인이었죠.원래 고구려의 수도는 압록강이 흐르는 국내성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맞물리게 되면서고구려는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게 되죠.본격적으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겠다는 겁니다.고구려는 평양을 수도로 했을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는데요.북으로는 부여와 숙신을 정복하고,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찍어 눌러 충주까지 밀어내는 등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게 바로 평양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전성기를 부가하던 고구려, 하지만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그 당대에 최고의 외교가였던 신라의 김춘추가 배를 타고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게 되죠.그래서 당 태종을 만나 담판을 짓습니다.신라와 당이 손잡은 거죠. 이렇게 결성된 나당 연합군은 660년 의자왕이 이끌던 백제를 멸망시키고,668년 평양성으로 다가오게 됩니다.결국 나당연합군과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분열로 인해서 고구려는 멸망하게 됩니다.이렇게 잠시 잊혔던 도시 평양은 고려 때 다시금 주목받습니다.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죠.고구려가 이룩했던 그 넓은 땅을 회복하고 싶었던 고려는 북진정책을 추진하게 되고,북진정책의 거점으로서 평양을 선택하게 됩니다.실제로 고려의 많은 왕들은 개경이 아니라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싶어 했어요.그리고 진취적인 기상을 가졌던 묘청은 수도를 아예 서경으로 옮기자는 운동을 벌였습니다.이게 정말 유명한 서경천도운동인데요.나중에 일제강점기 때에 민족사학자였던 신채호는 서경천도운동을 가지고 이렇게 표현했습니다.한민족의 역사상 일천 년대에 제일 가는 대사건이다.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수도가 평양으로 옮겨지고 더욱더 진취적으로 나아갔다면우리 천년의 역사가 바뀌지 않았겠나 하는 그런 아쉬움에서 이런 말을 했던 게 아닌가 싶네요.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조선이 건국되고 200년이 흐른 뒤1592년 4월 14일 부산 앞바다에 웬 배들이 가득 메워서 부산으로 건너옵니다.그렇습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죠. 약 15만이 넘는 일본군은 약 20일 만에 한성을 함락시킵니다.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서 평양까지 차지하게 되죠.이렇게 빼앗긴 평양은 1593년 1월에 명나라가 참전해서 조명 연합군에 의해 탈환되게 됩니다.북쪽에 만주를 통일했던 여진족의 후손 후금은 또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통해평양을 침입하게 되는데 이때에도 평양은 전쟁터가 됩니다.제가 이렇게만 말하면 마치 무슨 평양이 전쟁터인 거처럼그렇게 생각하지겠지만 꼭 그렇지마는 않습니다.평양은 원래부터 비옥한 땅이 있었고, 그리고 중국의 사절단이 오가는 중요한 길목이었어요.그래서 풍족하고 문화적으로도 발전되었으며 없는 게 없는 아주 발달된 도시였습니다.그래서 조선시대 관리들이 가고 싶은 곳 3개를 꼽으라고 하면그중에 한 곳에 평양이 꼭 뽑혔다고 하네요. 여러분들은 우리나라가 최강 대국 미국과 전쟁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조선 때 미국과 전쟁을 치렀던 때가 있습니다. 바로 신미양요인데요.이 신미양요의 발단이 되는 사건이 바로 평양에서 발생했습니다.역사 공부 조금 하신 분들은 알 텐데요.바로 제너럴 셔먼 호 사건입니다.대동강 물을 거슬러 상선, 미국의 제너럴 셔먼 호가 쭉쭉 쭉 올라갔습니다.드디어 평양까지 갔죠. 평양까지 간 제너럴 셔먼 호 무엇을 요구했을까요?통상, 거래, 사고팔기 이런 걸 원했어요.그런데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는 그런 게 불가능했어요. 왜 그랬을까요?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지배자가 누구였냐면, 쇄국정책의 아이콘 바로 흥선대원군이었어요.당연히 거래 같은 게 될 리가 없었죠. 그래서 여기서 갈등이 빚어지는데요.이 갈등 속에서 제너럴 셔먼 호의 공격에 의해 평양 백성들이 죽게 되면서뿔난 관군들이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우게 되고그리고 잡힌 선원들을 성난 군중들이 막 몽둥이로 때려죽이면서 여기서 사건이 터집니다.나중에 미국은 이것을 빌미로 쳐들어오게 되는데요.이것이 바로 강화도를 배경으로 벌어진 신미양요에요. 1910년 일제에 의해서 조선은 합방되게 됩니다. 강제적으로 합방되고 말았죠.일제강점기에 물산장려운동이라는 독립운동의 종류 중에 하나가 바로 평양에서 펼쳐지게 됩니다.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맞서서 우리 것으로 만 살자, 내 살림 내 것으로 라는 구호를 앞세워 가지고국산품 애용, 근검절약 등을 통해 우리의 토종기업 등을 육성시키고자 하는 물산장려운동이평양에 살고 있던 조만식에 의해 진행되게 됩니다.이러한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기는 평양에서도 이렇게 있었네요. 8월 15일 우리 민족이 그렇게 염원하던 광복을 맞이하게 됐습니다.하지만 기쁨도 잠시 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발생하게 됩니다.그래서 평양은 우리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가깝지만 먼 곳이 되었죠.언젠가 우리 발로 가서 우리 눈으로 평양을 직접 보는 그날이 오기를 기원하면서평양에 대한 소개를 여기서 마치겠습니다.이상 역사교사 문인식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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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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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9

[한국문화100]드넓은 영토를 개척한 광개토대왕

한민족의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확장 시켰던 광개토대왕에 대해 알아본다. ------------------------------------------------------------------------------------------- Na 이곳은 충북 충주에 위치한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전시관에는 고구려가 만주부터 남한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던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바로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구려 비석, 충주 고구려비이다. int 박경애 / 충주 문화관광 해설사 한반도의 유일한 (고구려) 석비라는 사실 만으로도 굉장히 큰 역사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비 비문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서 그때 당시에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넘어서 이곳 충주지역까지 진출했었던 확실한 증거자료입니다. Na 한민족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고구려의 장수왕 시대의 기록이 남아 있는 충주 고구려비, Na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까지 그 기초를 닦아 놓은 왕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장수왕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이다. Na 어느 나라나 어느 민족이나 자랑할 만한 왕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여러 가지 업적 가운데 나라를 키우고 영토를 확장하는 왕만큼 존경받는 왕이 없을 것이다. Na 그래서인지, 광개토대왕을 가리키는 완전한 이름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인데, 이 이름은 땅을 넓게 차지하고 나라를 잘 다스린 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int 고운기 /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는 주로 중국 쪽 나라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광개토대왕비에는 그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와의 관계 그리고 또 바다 건너 일본과의 관계 이런 것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보면은 광개토대왕은 북쪽으로는 중국에 여러 나라들과 활발한 외교전을 벌였는가 하면 또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면서 남진정책의 시발점도 바로 광개토대왕 때 부터 이루어졌고, 광개토대왕은 동서남북을 통틀어서 고구려의 영토를 최대한 확장시켜 나갔던 그런 왕이었고, 이런 기록들이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집니다. Na 중국 지린 성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경기도 구리시에서는 후손들에게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과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고자 실제 크기의 광개토대왕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그 비문의 내용을 일부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Na ‘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Na 왕위에 올라 20여년의 기간 동안 나라를 부국하게 만들기 위해 쉴 틈없이 달렸던 광개토대왕은 39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게 된다. int 고운기 /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고구려의) 국경이 확대가 되고, 또 그 확대된 국경 속에서 나라가 온전히 이어나갈 수 있게끔 그 틀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 언제 드러나냐면 그의 아들인 장수왕 때 드러나요. 장수왕은 왕위에 무려 70년을 넘게 있었어요. 그리고 이름도 장수왕이에요. 장수왕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고구려가 있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정말로 잘 물려받았던 것이 뭐냐면, 이렇게 큰 나라를 지키고 유지해 나가는 데에는 전쟁만 가지고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무력에 의한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서 70년을 고구려를 끌고 갔거든요. 그것이야말로 사실 우리가 고구려의 역사 속에서 특히 5세기에 광개토대왕에게 배워야 하는 가장 훌륭한 역사적 교훈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죠. Na 우리민족을 일컫는 말 중에 배달의 민족이라는 말이 있다. 배달의 뜻은 고구려의 기상과 뜻을 널리 펼쳤던 우리 민족을 높게 나타내는 말이다. 단순히 군사력으로 영토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가와 백성을 아우르는 통솔력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확장시켰던 광개토대왕, 그는 서양의 정복 왕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비견되는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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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0

[한국문화100]마을 신앙의 중심 서낭당

민중의 염원과 기원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마을 신앙의 중심 서낭당의가치를 재조명한다. 제목 : 마을 신앙의 중심 서낭당 내레이션 성황은 서낭당에 모신 신을 뜻하는 것으로 성황당과 서낭당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지금은 산업화와 도시화로 많이 사라졌지만 마을 어귀나 산허리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돌무더기, 오래된 나무, 작은 당집 그리고 나무와 당집이 같이 있는 형태 등으로 서낭당은 존재했다. 서낭당에는 오방색을 뜻하는 오색띠가 매어져 있거나 금줄이 쳐져 있는데 이러한 것은 복을 부르고 사악함을 쫓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서낭당을 개인적 혹은 마을공동체 신앙의 수호신 삼아 섬겼다. 인터뷰 김창호 /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서낭당이 지금은 많이 없어졌습니다. 남아있는 서낭당들도 무형문화재라는 입장에서 보존되고 있는 차원인데요. 사실, 서낭당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마을 공동체의 표상과도 같은 것입니다. 서낭제를 통해서 마을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도 하고 그 안에서 다음세대에 대한 마을의 전통을 교육하는 것도 일어납니다. 굉장히 순기능적인 여러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마을이 옛날 같지 않고 아파트와 같은 분할된 가구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공간으로 변해서 옛날에 한마을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가 되었던 모습은 찾기가 힘든데,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것이라는 입장 이외에도 한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을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서낭당을 통해서 주어졌던 것인데요. 그런 부분들이 오늘날에도 꼭 필요하고 없어졌기 때문에 아쉬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막 성황당 1937년 발표된 정비석의 단편소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토속신앙과 인간의 삶을 신선하고 조화롭게 묘사 내레이션 우리의 문학과 노래에는 서낭당이 자주 언급되었다. 그만큼 우리 민중들과 가까웠던 것이 서낭당이다. 정비석의 소설 성황당은 후미진 평안도 산골에서 숯을 구워먹고 사는 순이 부부와 그녀를 노리는 사내들의 이야기를 원초적이고 관능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특히, 성황당과 순이의 관계를 통해 토속신앙과 인간의 삶을 신선하고 조화롭게 묘사했다. 자막 깊은 산중에서 숯을 구워 생계를 꾸려가는 현보의 아내 순이는 모든 일을 성황님의 은덕으로 여기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현보를 도와 숯가마에 불을 때던 순이가 더위를 참지 못하여 옷을 벗고 개울에서 목을 할 때, 예전부터 순이를 노리고 있던 산림간수 긴상이 그녀의 옷을 감추고 협박을 한다. 순이는 이에 단호히 대항하고 앙심을 품은 긴상은 순이의 남편 현보를 산림법 위반으로 고발하여 감옥에 가둔다. 이때, 순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칠성이 찾아와 긴상과 칠성은 순이를 사이에 두고 격투를 벌인다. 며칠 뒤, 다시 칠성이 나타나 순이에게 현보가 3년은 감옥에서 지내야 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같이 도망칠 것을 종용한다. 그가 가져온 분홍 항라적삼과 수박색 목메린스 치마에 마음이 끌린 순이는 칠성을 따라나선다. 그러나 30리쯤 갔을 때 산을 떠나 살아야 한다는 사실과 현보에 대한 그리움, 무엇보다도 성황님의 벌에 대한 무서움 때문에 순이는 칠성에게서 도망쳐 집으로 돌아온다. 순이가 “성황님 ! 성황님 !” 을 외며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방안에서는 “에헴” 하는 현보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밤 따라 접동새와 부엉새 소리는 순이의 가슴을 파고드는 듯이 정다운 것이었다. 자막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마을 내레이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민속적 전통과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에서는 두 가지 형태의 서낭당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하회마을 가장중앙에는 삼신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가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하회마을이 조성될 때 심은 것으로 여겨지는 나무의 수령은 6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신목을 서낭당 삼아 정월대보름에는 제를 올리며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과 공동의 소망을 빌기도 한다. 인터뷰 손주호 / 대구광역시 지금 만나고 있는 연인과 안 싸울 수는 없겠지만, 싸우더라도 서로 잘 잡으면서 이 운명 끝까지 꼭 가져가고 싶습니다. 김명숙 / 서울특별시 저를 비롯해서 제 가족과 친지, 주위의 분들, 다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김문배 / 서울특별시 곧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가 무사히 잘 태어나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그것을 빌러 왔습니다. 내레이션 특히, 삼신당은 자식을 귀하게 여겨 후손이 잉태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잘 들어주어 마을 전체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하회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앞산의 중턱에는 또 다른 서낭당인 중당이 조성되어 있다. 서낭당과 같은 마을제당은 주민들의 종교심성을 공유할 수 있는 신성한 영역이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마을의 신을 중당에 모셔와 제사 지내고 서로의 안녕을 기원한다. 해설사 인터뷰 박순화 / 안동문화관광해설사 중당은 국신당을 모셨어요. 국신당은(공민왕의 모신 것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70여일을 몽진을 오셨어요.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그래서 안동에는 공민왕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조성되었지 않나 싶습니다. 풍산류씨들이 하회마을에서 많은 인재가 특히, 영의정 서애 유성룡 대감 같은 명재상이 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자막 국신당은 신격화된 고려의 공민왕을 의미하며 특히 안동지역에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신앙되고 있다. 자막 강원도 강릉시 내레이션 강원 강릉시에서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강릉단오제 기간 동안 대관령산신을 모셔와 서낭제를 지낸다. 자막 학산서낭당 강릉단오제의 주신 대관령국사성황 범일국사가 태어난 학산의 서낭당으로 매년 음력 4월15일 머물러 굿과 제례를 올린다. 내레이션 강릉고을을 지켜주는 대관령 산신께 제사하고 험준한 대관령 산길의 안전을 기원하며 풍작과 풍어 집안의 태평 등을 기원한다. 제를 시작으로 진행되는 강릉단오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축제로 신과 인간이 자연스럽게 만나 하나가 되는 만남의 공간이다. 서낭당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섬기는 것은 단순히 기원의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식, 심적인 유대, 연대감을 강화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민중이 가깝게 여기는 마을제당이자 개인제당이었던 서낭당.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야할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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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0

[한국문화100]조선시대의 지식인의 상징, 퇴계 이황

조선시대 학자인 퇴계선생의 업적을 알아보자 ---대본--- 자막)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퇴계의 업적을 귀감 삼아 현재 우리의 삶 속에 많은 가르침과 교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나레이션청렴결백한 공직자이자 우수한 교육자, 그리고 성리학을 발전시킨 사상가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비인 퇴계이황. 퇴계 이황의 업적은 60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퇴계의 여러 업적중 가장 두드러 지는 것은 학자로서의 모습이다. 중국의 주자 이후에 동양에서 최고의 학자가 퇴계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그가 이처럼 많은 이들에 존경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가 학문을 연구한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퇴계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공직자로서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가 벼슬을 79번이나 사퇴했다는 이야기는 후세에 많은 귀감이 되는 좋은 일화다. 또한 도산서원을 비롯한 서원건립에 힘을 써서 많은 제자를 양성했는데, 출세를 하기 위해 학문을 닦는 안 좋은 학습 풍토를 개선하는데 퇴계 선생이 일조를 한 것이다. -인터뷰퇴계 선생이 살아 계실 당시에는 벼슬을 한다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습니다.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과거 공부를 해서 벼슬 정승판서가 되면 부귀영화가 다 따라왔어요.그런데 퇴계 선생은 임금이 벼슬을 주면 사양했습니다.그 횟수가 70번이 넘습니다.명종이란 임금이 퇴계 선생을 모시려고 했는데 안 오시니깐 화공을 보내서 도산서원을 그리게 했어요.퇴계 선생이 도산을 기술한 도산기라는 글이 있는데 그 것을 (그림에)쓰게 하고, 그 다음에 신하들을 시켜서 ‘명현부지탄’이라 ‘어진선비를 불러도 안오는 것을 탄식하노라’ 하는 시를 만들어서 임금이 자기 침실의 병풍에 쳐놓고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퇴계 선생 이후에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가 퇴계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많은 학자가 나오고 풍속이 순화해지고 도덕적인 수준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퇴계 선생이 직접 기른 제자들 중에는 나라에 기둥이 되는 명신들이 많았습니다. 자막퇴계이황(1501~1570) 나레이션그는 올바른 교육 문화를 위해서 손수 교과서를 만들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수립하였다. 또 항상 모범적인 태도로 바람직한 선비상을 보여 제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육자 이기도 했다. 그는 2000여편이 넘는 시를 남긴 문학자이자 효와 예법을 중시하고 실행한 인격자이며 성리학을 알린 사상가 등 다양한 방면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자막 매화시28년동안 매화에 관하여 지은 시를 모아 놓은 책이다.매화를 사랑한 퇴계 선생은 75제 107수에 달하는 많은 시를 남겼다. 무불경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조심하고 공경하여야 한다는 뜻. 도산십이곡퇴계선생이 도산의 산수를 소요하여 읊은 시조 성학십도유교철학의 주요체계 10가지를 도식으로 나타낸 것으로 68세떄에 작성하여 선조대왕께 보냄. 퇴계선생서절요퇴계선생의 중요한 서간(용건을 알리는 메모)을 모아놓은 책 퇴계선생언행록퇴계선생의 평소 언행을 기록해 둔 책으로 1613년 도산서원에서 간행함 나레이션특히 성리학의 심성론을 발전시키고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규명하는 등 조선시대 도학의 기본틀을 정립하였는데 큰 공을 세웠다. 유학의 철학적인 부분을 성리학이라고 부른다. 공자 시절 성현의 가르침들은 많았지만 이가 학문적으로 체계화 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13세기 송나라때와서 주자를 중심으로 학문적인 체계를 이루게 되는데 이를 성리학 이라고 부른다. 이 성리학을 발전시키고 널리 알린 대학자가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이다. 자막주자(1130~1200)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성리학)을 집대성한 학자. 도산서당퇴계선생이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직접 머무르면서 제자를 가르치던 곳 인터뷰사실 퇴계 선생은 조선의 유학자이기에 앞서 일본,독일,영국 등에 알려진 세계적인 유학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퇴계 선생이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우리의 역사를 당생과 당파의 역사로 매도한 것 때문입니다. 성리학, 주자학, 유학이 폄하된 면이 있습니다.그러나 학문적으로 일본과 독일 같은 곳에서 퇴계학 연구가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레이션지금도 일본과 독일 등에서는 퇴계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퇴계의 업적을 귀감 삼아 현재 우리의 삶 속에 많은 가르침과 교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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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대한민국의 영토 독도

한국문화100 독도편 대본 내레이션한반도 동쪽의 작은 섬. 천연기념물 336호. 바다를 거치는 새들의 안식처.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여 다양한 어종이 모여드는 황금어장. 천연가스층이 발견된 해저자원의 보물창고. 신라시대 사람 이사부부터 조선의 안용복 그리고 1950년 해방 이후 독도의용수비대원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곳.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저는 대한민국의 영토 독도입니다. 평화로운 섬인 저 독도는 아픈 과거로 지금까지 상처 받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의 첫 희생물이었습니다. 제국주의 야욕에 불타던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1905년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위해 독도를 주인 없는 섬이라며 불법 편입합니다. 그런데 저 독도가 과연 일본의 주장대로 주인 없는 섬이었을까요? 1145년에 발간된 삼국사기를 포함하여 한국의 수많은 옛 문헌과 지도들은 독도를 오랜 옛날부터 한국의 영토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1454년 제작된 세종실록지리지는 울릉도와 독도의 위치를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1900년 대한제국은 칙명 제 41호로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다시 한 번 명확히 합니다. 일본의 기록은 어떨까요? 일본은 1905년 이전에는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일본 문헌은 독도가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17세기 말 일본은 공식문서를 통해 독도가 공식영토가 아니라고 스스로 인정합니다. 1877년 일본정부 최고 행정기관인 태정관은 일본 전역의 지적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밀한 조사 끝에 독도가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110년간 숨겨져 있다가 1987년에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 태정관 문서는 독도가 일본영토가 아님을 일본정부가 공식 확인한 명백한 증거입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카이로, 포츠담 선언 등 전후 처리 과정에서 패전국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모든 지역으로부터 쫓겨납니다. 저 독도도 한국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1946년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677호는 독도를 분명한 한국의 행정관할 구역으로 선포합니다. 인터뷰성일종 / (사)독도사랑운동본부 부총재분명히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일본과 우리가 이러한 가치의 문제 때문에 많이 싸우게 될 겁니다. (독도가 일본의 것이라고)잘못 교육받은 일본의 메인스트림(주류사회)과 우리의 젊은이들이 대응을 하게 될 텐데요. 그에 대한 일환으로 순수한 국민운동으로, 막연히 독도는 정부가 지켜줄 것이라고 지금도 국민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서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전체가 소중한 영토에 대한 교육을 통해서 일본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민부 / 한국교원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독도는 우리의 땅임에 틀림이 없고 또한 국제법적으로도 현재 우리가 이 땅을 소유하고 있고 방공식별구역이라든지 항공식별구역 등등 국제조약을 통한 국제 협약에서도 현재 이 부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이 문제는 얼마든지 우리가 논쟁을 해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만 일본은 자기들이 시네마현에 편입을 했다고 하는 1905년 사실 하나만 가지고 줄기차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독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 국력을 튼튼히 해서 조금도 허술한 면이 없도록 독도를 잘 지킬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레이션저 독도는 대한민국 주권회복에 상징입니다. 저를 둘러싼 일본의 역사왜곡문제는 건전한 한일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치명적인 현안입니다. 동반자적 관계로 미래를 열기 위해 일본의 끊임없는 도발적 행동으로부터 평화의 섬, 저 독도를 기억하고 지켜주세요. 저는 영원히 한반도의 동쪽 끝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로 자랑스럽게 서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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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떡, 그 속에 담긴 한국인의 다양한 이야기

한국의 전통음식인 떡에 대한 소개영상 한국문화 100 떡, 그 속에 담긴 한국인의 다양한 이야기 나레이션 한국의 거리에서는 떡집을 쉽게 찾아볼수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음식인 떡은 예로부터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즐겨먹던 친숙한 음식입니다. 요즘도 명절, 결혼식, 생일 등 다양한 행사에서 떡을 찾고 있는데요 왜 한국인들은 이토록 떡을 찾는 것 일까요? 쌀 농사를 주로 짓던 옛 선조들은 남은 쌀 재료와 잡곡을 섞어서 떡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정확히 언제부터 떡을 만들어 먹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발굴 된 떡시루 등을 놓고 볼 때 청동기 또는 초기 철기시대부터 먹지 않았을까 짐작이 됩니다. 한국인들에게 떡은 오랜기간동안 많은 사랑을 받는 전통음식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인공 조미료가 가미된 자극적인 음식과는 달리 쌀, 콩, 팥 등의 천연 재료만으로 만들어지는 웰빙 음식인 떡은 지금까지도 건강식으로 한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죠 먹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부터 떡은 크고 작은 행사에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음식이었습니다. 특히 결혼과 같은 집안의 경사에 떡은 필수품이었는데요 행사별 떡의 자세한 의미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인터뷰 혼례 때는 찰떡(찹쌀떡)을 가지고 인절미를 비롯한 여러 가지 떡을 만들어 이바지로 보내고 있어요. 그 우수한 떡의 세계화를 위해서 우리가 좀 더 노력하여 우수한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 속에 꽃피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백일 때는 하얀색으로 떡을 만들죠. 그건 맵쌀가루로 물을 반죽한 후 시루에 안쳐서 만드는데, 아이가 순수하게 무럭무럭 자라라는 의미로 만들고... 또 나쁜 것을 막아주고 건강하게 잘 자라라는 의미로 수수팥떡을 열 살까지 해서 먹습니다. 나레이션 과거에는 직접 집에서 떡을 만들어 이웃과 나누어 먹는 풍습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화가 되면서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웰빙 열풍을 타고 직접 떡을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데요, 집에서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떡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인터뷰 이것은 단자라고 하는 떡이에요. 단자라는 것은 안에 소가 들어간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삶는 떡입니다. 경단은 소가 없는 것을 말하고 이렇게 소가 들어간 것을 단자라고 합니다. (단자는)어린아이 생일과 어르신들 생신 상에 많이 올려요. 이렇게 소를 넣고 바람을 빼줘야 해요, 바람이 안 빠지면 삶을 때 터집니다. 잘 안 터지게 꼭꼭 주물러서 동그랗게 돌려준 다음에 삶으면 됩니다. 자막 - 물이 펄펄 끓을 때 단지를 넣어준다. - 단지가 서로 달라붙지 않게 가끔 저어준다. - 물위에 단지가 뜨면 (약 6~7분 정도) 건져낸다. - 건져낸 단지는 완전히 식을 때까지 찬물에 헹구어낸다, - 찬물에 헹궈낸 단지는 자연 건조 시킨다. 이때 설탕을 조금 뿌려주면 수분이 빨리 제거된다. 인터뷰 이제는 삶은 단지에 고물을 묻히는 작업입니다. 자막 - 카스테라가루, 거피 팥, 녹차 가루 등 식성과 기호에 따라 다양한 고물을 만들어 묻히면 된다. -대추와 해바라기 씨 등으로 마무리해주면 끝. 나레이션 자 이제는 여러분도 집에서 맛있는 떡을 만들어 볼 수 있겠죠? 최근 한류열풍으로 인해 k푸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떡을 찾고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참 많아 졌는데요, 우리 전통음식인 떡에 대한 외국인들이 반응이 상당이 흥미롭습니다. 인터뷰 매우 흥미롭고, 전통적입니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배우게 돼서 즐겁습니다. 우리 떡,한과가 크고 푸짐한 것 보다는 한입에 쏙들어가는 것, 고물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그냥 먹을 수 있는 것, 이처럼 더 기능적인 식품이 들어 가야되고, 아름다워야 되고, 또 좀 두고 먹어도 굳지 않아야 되고, 이런 점들이 더 보완이 된다면 정말 훌륭한 떡, 한과가 되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이)떡을 하면서 내가 먹는 떡이 아니라 나누어 먹는 떡으로, 항상 가족을 생각하고 내가 좋은 일이 있을 때에 동네사람이나 직장동료들과 나누어 먹는 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아마 떡은 사랑이고 나눔이고 우리민족성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내레이션 이처럼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떡은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즐길 수 있는 웰빙 식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 우수한 떡의 세계화를 위해서 우리가 좀 더 노력하여 우수한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 속에 꽃피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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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조선 최고의 의학전서, 동의보감

현재까지도 인용되는 한의학의 대표서적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우리 민족의 의학서로 역사적의의가 높으며 의학지식과 치료법에 관한 백과사전이다. 유네스코 기록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동의보감의 가치를 알아보고 동의보감의 탄생과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 동의보감 대본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염병이 번지며 백성들이 고통을 받을 때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조대왕은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병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의학 서적을 제작하게 명하였다. 선조대왕은 태의인 신하 허준을 부르시고 “의학서를 편찬하라” 이와 같이 하교하셨다. 이러한 임금의 뜻을 받들어 허준은 왕실이 가지고 있던 여러 의학서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며 의서를 완성했으니, 이 책이 바로 동의보감이다. 인터뷰 김요한/ 산의학박물관 학예연구사 Q. 동의보감이랑 무엇인가? 동의보감은 의학서적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단순한 의학 서적이 아니라 그 시대를 집대성한 백과사전인데요, 동의는 중국이 북의와 남의로 나뉘어서 큰 양대 산맥으로 이루고 있었는데 이것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동의라는 제 3의 길을 간다는 의미를 띄며, 또 보감이라는 것은 감이라는 글자가 백과사전처럼 명확하게 객관적인 진실 된 내용만 담긴 주로 역사책이나 법전에 쓰이는 단어인데요, 그렇게 해서 이 둘이 합친 것이 동의보감으로, 길게 말하면 중국과는 또 다른 한의학적 길을 가는 백과사전이라는 뜻의 이름을 의미합니다. 나래이션 동의보감은 실제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경험한 의학 정보를 정리한 것은 물론이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의학 서적을 하나로 모아 집대성한 ‘동양 의학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일반인들을 위한 의학 서적이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의학서적 최초, 세계 기록 유산으로 동의보감이 등재되었다. 세계기록유산 동의보감, 어떻게 구성되어있을까 ? 인터뷰 김쾌정/ 허준박물관장 Q. 동의보감은 어떻게 구성 되어있나요? 동의보감은 25권 25책으로 구성되었으며 크게 5가지로 구분되어있습니다.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침구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동의보감에는 1212가지 방대한 약재가 등장하고 그 가운데서 637가지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중심으로 향약명이라고 해서 한글기록으로 일반서민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제작되어있습니다. 나래이션 동의보감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4권으로 구성된 내경편은 인체 내부의 구조와 문제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으며 외형편은 몸의 겉에서 관찰되는 부위의 기능과 질병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잡병편에는 질병의 원인과 증상 및 이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방법에 대한 기록이며. 탕액편은 약재 채취와 약을 달이는 내용 등, 또한 백성들을 위한 처방이 담겨 있다. 약재의 효능을 기술할 때 우리 땅에서 나는 향약명을 함께 써서 백성들 또한 약초를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침구편에는 침과 뜸을 만드는 법, 혈 자리 찾는 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목차 2권까지 포함해 동의보감은 모두 25권 25책으로 완성된 종합 의학 서적이다.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어떻게 활용 되었을까? 동의보감은 처음 목활자로 만들었으나 전하지 않고 이후 목판본으로 출간된 것이 전하고 있다. 글을 잘 쓰는 이가 판목위에 글자본를 작성하고 전문 각수가 글자를 새기게 된다. 글자새김이 끝나면 활판에 먹물을 묻혀 글자를 찍어내는데 방대한 양으로 동의보감은 편찬을마치고도 판각과 인쇄에만 3년이 걸렸다 당시 동의보감이 전국으로 널리 퍼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발달된 목판인쇄문화가 있어서 일 것이다. 나레이션 동의보감은 병이 발생하기 전 신체의 조화를 중시여기는 ‘양생’에 중심사상을 두고 있다. 동의보감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첫째, 하루의 금기는 저녁에 배부르게 먹지 말것 둘째, 한달의 금기는 그믐에 술을 많이 먹지 말것 셋째, 한해의 금기는 겨울에 멀리 가지 말 것 이 기록은 반드시 하지 말아야 금기사항이다. 이와 같이 동의보감에는 조선시대에도 예방차원의 양생법을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의보감에서 사람의 몸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신형장부도이다. 신형장부도는 살아 있는 사람의 체내에서 정기신의흐름과 오장육부의 운행을 그린 일종의 개념도인 것이다. 동의보감 신형장부도는 자연과 사람의 조화, 오장육부건강을 설명하고 있다. 허준은 오장육부를 건강하게 할 수 있는 예방법을 기록해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게 했다. 얼굴은 자주 만져주면 혈압, 동맥경화 등의 치료를 도와주는 효과가 있다. 귀는 신장과 관계가 깊다. 장수하기 위해서는 귀를 자주 만지는 것이 좋다. 이러한 예방법등은 인체에 저항력이 충분하다면 병이 생길 수 없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동의보감은 인체 내적인 조화와 균형을 중요하게 여겼고, 간편한 민간요법으로 처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의보감. 동아시아 최고의 의학백서! 독창적이고 명료한 기록, 동의보감에 담긴 건강한 삶과 생명을 이야기는 선조들이 후대에 남겨준 귀중한 기록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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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생명의 흙, 황토

황토는 한국인의 정서적 감흥에 가장 잘 부합되는 색깔과 느낌이다. 가치를 알아보고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황토 대본) 나레이션 중국 최고의 지리서 산해경, 세계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 최고의 의학전서 동의보감. 황토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문화와 역사에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황토는 구들방, 초가집 등 주거문화를 시작으로 조상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재산이었다. 또한 예로부터 살아있는 생명체라 하여 많은 약성을 가져 무병장수의 흙으로도 불려 왔다. 인터뷰 노희명/서울대학교 응용생물학부 교수 황토란? 황토는 말 그대로 누런 흙을 뜻합니다. 영어로 보면 loess로 독일어 어언을 갖고 있는데, 나일강 유역에서 처음으로 발견 됐음에 이러한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나레이션 생명의 흙 황토, 황토는 학술적으로 바람에 의하여 운반되는 쌓인 황색의 광물질을 의미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암석이 풍화되는 과정에 생긴 토양’을 총칭하여 황토라 한다. 황토는 단순한 흙이라는 범주를 뛰어 넘어 주거와 식생활뿐 아니라 다양한 생활 제품으로 이용되고 있다. 전라북도 고창, 황토로 유명한 이곳은 지하 6미터 아래에 있는 입자가 작고 색이 짙은 황토를 채굴 하는 곳이다. 고창황토를 연구하시는 박영택 선생님께 우리 고유의 황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인터뷰 박영택 /황토 명인 황토분말이나 건축자재를 만드는 황토의 채취장입니다. 산의 1미터정도 깎고 그 밑의 황토를 채취를 해서 황토를 가공해 황토제품을 제작합니다. 황토는 예로부터 조상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일부였지만 현재는 황토를 일상생활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충남 /계족산 하지만 이곳 계족산에서는 현대인들이 황토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다. 도심 속에 위치한 황톳길을 맨발로 걸으며 황토를 느끼고 상쾌한 기운도 얻어 갈 수 있는 곳이다. 최희주/ 신세대유치원 교사 저희 유치원의 슬로건이 자연생태 활동위주입니다. 자연 생태 활동 위주로 교육을 하다 보니 자연 황토가 건강에 도움이 많이 되고, 황토의 촉감놀이도 느낄 수 있으며 시멘트에서 사는 아이들보다는 자연에 어울러져 사는 아이들이 좋을 꺼 같아 오게 됐습니다. 흙과 우리 민족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흙을 어머니라고 부를 만큼 다양한 흙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황토의 유용성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우리 전통 흙 문화로 지키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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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본 고구려인의 삶

당시 고구려인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의미에 대해 나타낸 영상(대본)내레이션 고대 사회를 이해하고자 할 때 그림은 문자 이상의 많은 이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그림은 기호보다 쉽게 눈에 들어오고 마음속으로 읽히기 때문일 것이다.무덤 속에 그려진 벽화를 통해 고구려인의 삶과 생각을 담았던 고구려 고분벽화,찬란한 고구려의 역사가 담긴 고분벽화를 만나보자 내레이션 고구려 사람들이 언제부터 무덤 속에 벽화를 그렸는지 확실하게 밝혀진 건 없다.안악 삼호분 고분 벽화가 고구려 초기벽화의 모습을 나타내는 귀중한 자료로 전해지고 있다.고분벽화는 고구려가 도읍으로 삼았던 평양과 지안 지역을 중심으로 그리기 시작해점차 주변으로 퍼져 나갔고, 약 천삼백 년 뒤인 이십세기 초,고구려 멸망 후 소문으로만 떠돌던 벽화에 대한 이야기가평안남도 강서군수를 지내던 이우영이라는 사람에 의해 다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내레이션 무덤 속에 잠들어 있던 고분벽화,벽화 속에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인터뷰 고구려 고분벽화는 주로 고구려 사람들이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해서그들의 생각이 나 소망을 펼쳐놓은 그런 작품입니다.그래서 초기의 작품에는 현세에 살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는 데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고구려인들이 그 당시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사진 찍듯이 그대로 옮겨 놓아서우리가 그 시대로 여행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되기도 합니다.그래서 기본적으로 고분벽화라고 하는 것이 내세관의 표현이다.죽은 뒤 세계관에 대해 소망과 꿈을 담은 표현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내레이션 국내외의 역사가, 문화예술 전문가들에게 역사적 상상력,문화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현재 백이십여개의 벽화가 발견되어당시 고구려 사람들의 생기를 전해주고 있다.한국 문화의 원형을 담은 고구려 고분벽화,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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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한반도의 중심 산줄기, 백두대간

NA : 이곳은 강원도 태백시 철암역, 나는 이번학기 백두대간에 관해 레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백두대간을 알아보러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 백두대간은 어떤 것일까? 막연하게 다가오는 궁금증을 안고 백두대간의 협곡을 지나는 V-train을 따라 아름다운 우리강산을 감상했다. ? (자막) 백두대간 협곡열차(V-train) 강원 태백 철암역 ↔ 경북 봉화 분천역 구간을 운행하는 KORAIL 관광 열차. ? (자막) 백두대간 협곡열차(V-train) 좁은 협곡 사이 절벽과 바위산이 보이는 창밖의 풍경을 자연 그대로 오감으로 느끼며, 힐링으로 이어지는게 특징. ? NA : 도시를 떠나 좁디좁은 산골짜기 협곡을 달리는 기차 속에서 백두대간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속에 벅차오르는 감정이 느껴졌다. 한반도를 이루는 뼈대! 백두대간은 무엇인지 이번 여행을 통해 알아보려 한다. ? 먼저 찾아간 곳은 국민들이 백두대간에 대해 올바로 알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이다. ? int 유경희 숲해설가 / 조령산자연휴양림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자연적 상징으로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인식 체계로 여겨졌고, 한반도의 모든 물줄기를 잉태한 생명력이 시작되고 이어지는 중심지입니다. ?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1개의 정간, 13개의 정맥 10개의 강이 있습니다. 백두대간을 경계로 하여 동쪽은 영동지방, 서쪽은 영서지방, 지방마다 독특한 언어와 음식, 주거환경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 NA : 생태교육장을 둘러보며 백두대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 (자막) 백두대간 생태교육장 우리나라 중심 산줄기인 백두대간의 역사, 문화, 생태 정보를 다양한 전시 체험매체로 구성하여 보전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 ? NA : 백두대간은 언제부터 이 땅을 이해하는 지리인식체계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성호사설 등을 통해 길게는 천여 년, 짧게는 수백 년간 백두대간으로 불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우리 선조들은 산맥을 표기할 때 땅 위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과 강을 그려 산에서 산으로만 이어지도록 하였고, 실제 지형과 일치하는 지리학적으로 자연스러운 선을 표현했다. ? 반면, 일제의 침략을 받은 일제 강점기 때는 땅속의 지질 구조를 기준으로 산맥을 표기했고, 그리하여 산맥은 강에 의해 여러 차례 끊기고 실제 지형에 일치하지 않는, 인위적인 선으로 표현되었다. ? 현재까지 우리들에게 백두대간을 태백산맥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현실의 안타깝게 느껴졌다. ? 현재 백두대간은 어떻게 보전되고 있는지 이를 위해 힘쓰고 있는 보전회를 찾아갔다. ? int 김경한 사무국장 / 백두대간보전회 (백두대간 보전회는)크게 5가지 활동을 하고 있는데, 야생동물 보호활동, 생태 숲 조성운동, 백두대간 생태 체험 학습, 산불 조심 홍보 활동, 백두대간 산림 정화운동, 5가지를 우선 크게 볼 수 있어요. 백두대간을 말하면, 즐길 수도 있어야 하고, 보전도 해야 하고, 양면성이 있어요. 건설 쪽 활용방안 말고, 국민들이 정서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끔 등산도 하고, 체험도 하고, 산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방안을 찾아서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 NA : 보전회 에서는 백두대간의 보전을 위해 국가 그 이상의 활동을 하고 계셨다. 과거 나라를 구하기 위해 활동했던 독립 운동가들만이 애국자가 아니라 보전회 회원들에게도 한반도의 산줄기를 지키고픈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20년이상 해발 1,000m의 산을 꾸준히 올랐다는 보전회 사무국장님께 백두대간은 어떤 의미로 다가 오는지 여쭤봤다. ? int 김경한 사무국장 / 백두대간보전회 처음 제가 백두대간 보전회에 들어왔을 때 저는 사실 백두대간에 대해 아는 게 없었어요. (보전회에) 들어와서 백두대간에 대해 뭘까 고민을 하고 찾아보고 하다 보니까 저 역시도 백두대간 하면 지금도 울컥하는 마음이 있어요.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가 있는데, 백두대간 하면 저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먹는 물의 근원이 백두대간에서 떨어져서 각 강으로 지리로 다 흘러가거든요. 물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물이 없으면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물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백두대간 하면 물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 NA : 나는 백두대간을 몸소 느끼기 위해 산을 걷기로 했다. 산줄기를 경계로 고개를 넘어가며, 동쪽 서쪽 마을 사람들이 서로 왕래하고, 지역과 문화가 구분되어 교류를 이룬 백두대간! 세계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강을 통해 발전 했듯 우리의 문화는 이 백두대간을 따라 발전해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자막) 백두대간(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한반도의 가장 크고 긴 산줄기 백두대간은 1의 대간과 1개의 정간 및 13개 정맥 체계로 되어 있다. ? NA : 산 정상에 올라 백두대간을 바라보니 처음 기차를 타며 느꼈던 마음 속 벅차오름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 (자막) 함백산(咸白山) 함백산은 강원도 태백시와 정선군 고한읍의 경계에 있는 해발 1,572,9m의 산으로 우리나라에서 6번째 높은 백두대간의 고봉 가운데 하나. ? NA : 한반도 중심산줄기 백두대간 우리민족에게 백두대간은 문화의 울타리였음을 느꼈다.

제작
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3

[한국문화100]가정교육의 지혜를 배워보자, 한석봉과 어머니

가정교육의 지혜를 알아볼 수 있는 한석봉과 어머니 이야기를 들어보자.---대본---나레이션가정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한석봉과 어머니의 일화를 통해 참 된 교육의 가치를 발견해보는 건 어떨까요?떡 장사를 하며 아들 뒷바라지를 하던 한석봉의 어머니는 글 공부를 위해 아들을 전라남도 영암의 중림정사로 떠나보냅니다.어머니는 10년 동안 학업에만 매진하라며 보고 싶어도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를 하는데요, 한석봉은 어머니의 큰 가르침을 받아 굳은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서죠.3년이 지나고 어머니가 그리웠던 한석봉은 한밤에 집으로 돌아옵니다.한석봉은 반가운 마음에 어머니께 달려 들어가지만 어머니는 갑자기 찾아온 아들의 모습에 많이 놀랍니다. 어머니는 집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물었고 한석봉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글 솜씨를 자만하며 글방을 나와도 된다고 어머니께 말합니다.그의 말에 어머니는 참 된 가르침을 주기 위해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됩니다.불을 끈 상태로 한석봉은 종이에 글을 쓰고, 어머니는 내일 장에 내다 팔 떡을 썰어내자는 것이었습니다.불을 끈 상태에서 누가 더 예쁘게 쓰고, 써느냐에 대한 대결이었던 것이죠.어머니는 한석봉이 이기면 공부를 그만하고 지금 집으로 돌아와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석봉이 진다면 지금 바로 다시 공부를 위해 죽림정사로 떠나야 된다고도 하셨죠.칠흑같이 깜깜한 방안에서 어머니는 떡을 썰고 한석봉은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한참 후 어머니가 다시 불을 켰습니다.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어머니가 썬 떡은 하나같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반면 한석봉이 쓴 글씨는 삐뚤빼뚤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습니다.어머니는 한석봉의 글씨를 보고 다시 돌아가라고 냉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그 후 한석봉은 어머니의 뜻을 헤아리고 더욱 공부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합니다.결국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킨 한석봉은 훗날 서도의 명인이자 한문의 본고장인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명필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자막도산서원 전교당석봉 한호 (1543~1605)나레이션조선의 명필가인 한석봉의 서체는 당시 많은 이들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퇴계선생이 세운 도산서원 전교당의 현판 역시 한석봉의 작품이지요.우리가 주로 한석봉이라고 알고 있는 그의 정식 이름은 ‘한호’입니다.‘석봉’은 그의 호입니다.추사 김정희 선생과 쌍벽을 이룬 그의 서예실력은 조선중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는데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국의 주요 문화재들에서 그의 글씨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한석봉의)글씨는 중국의 왕희지체(중국 최고의 서예가인 왕희지의 글씨체)를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에 왕희지체의 서법을 계속 학습하고 이 것을 자기화 시켜서 조선시대의 많은 서예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한석봉의 글씨체는)방정하고 단정한 서체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나레이션가정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한석봉과 어머니의 일화를 통해 참 된 교육의 가치를 발견해보는 건 어떨까요??

제작
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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