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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100] 김정호의 노력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이야기와 그 비화 ---대본---나레이션대동여지도는 조선후기 김정호가 제작하였다. 고지도 중에서 유일하게 풍수사상에 기초를 둔 산줄기 표현방식과 산악투영도법으로 국토 전체를 그린 대동여지도는 한국의 고지도 중에서 가장 문화상징성이 강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인터뷰대동여지도는 조선후기 지도학의 여러 장점들, 성과들을 종합한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우리나라 지도중에서 가장 큰 지도이고요, 축척이 약 1:165,000 정도의 축척을 가진 지도입니다.남북으로는 약 6.6m 동서로 약 4.2m 정도의 크기를 가지는 지도입니다.아주 큰 축척의 지도이기 때문에 내용이 아주 풍부하고 정확하고 자세할 수 있었고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제작 되었다는 점입니다.목판으로 제작한 것은 여러벌을 제작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그리고 그것은 지도의 보급, 대중화, 공유화를 목적으로 했다는 점이 돋보입니다. 나레이션김정호는 조선후기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지도그리기가 취미였는데, 그의 영민함은 마을 사람 모두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는 사람들이 정확한 길을 알지 못해서 사고가 나는 것을 많이 보고 정확한 지도 만들기에 인생을 바칠 것을 결심한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도 그리기에 열중한다. 산과 바다, 겨울과 여름을 가리지 않고 떠난 그의 여정은 엄청난 고난의 길이였다. 굶주림과 병마로 쓰러지기가 부지기수였으며,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그가 백두산을 여 덟 차례나 올랐다는 설도 있을 정도였다. 1861년, 마침내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대동여지도가 완성됐다. 일설에 의하면 대동여지도를 본 대원군이 군가기밀 유출을 우려해 김정호를 옥에 가두었다고하는데 그 후에 그의 업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인터뷰그런데 최근에 많은 연구에 의하면 고산자 김정호 선생은 옥사를 하지도 않았고, 대원군이 옥에 가두지 않았다라는 것이 밝혀졌고요, 그리고 김정호가 딸과 함께 둘이서 굉장히 어렵게 핍박을 받아가면서 만들었다라고 일제강점기(자료)에 나와있었는데 그것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최근에 판명이 되고 있습니다.이게 대동여지도 복제본입니다. 여기 보시면 당저십이년신유 라고해서 철종12년 신유년 1861년에 간행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지도표’라고 하는 대동여지도에서 사용한 범례를 수록해 놓았습니다.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특징중에 하나는 기호를 많이 사용해서 매우 명확하고 지도학적으로 훌륭한 지도를 만들었다는 점에 있습니다.역을 기호로 표시하고 ‘역’이라는 글자는 쓰지 않은거죠. 그래서 ‘양재’라고만 표시를 했습니다. ‘부산진’이라고 한다면 ‘부산’만쓰고 사각형으로 표시를 한거죠. 나레이션김정호는 공적인 도움 없이 개인의 의지와 재능으로 혼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 그가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대동여지도를 만들지 않았다는 설들이 많으나 그 사실 여부를 떠나 뛰어난 제도기술과 과학적 제도방법을 통해 가장 사실적인 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모두 동의할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실측에 의한 현대지도가 나오기 전까지 가장 정밀한 지도였다. 이 훌륭한 문화유산이 나오기까지 한 개인이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는지를 우리는 알아야한다.그의 위대함과 노고를 한번 더 되새겨 보는 일이어야 말로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고 알리는 시작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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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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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소통과 헌신의 지도자, 세종대왕

자막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릉 na : 지난 5월 15일, 세종대왕 탄신 617돌 숭모제전이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릉에서 봉행되었다. 숭모제전은 조선을 탁월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글창제는 물론 국방, 과학, 문화 등 수많은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의 위업과 애민정신을 기리고 추모하는 행사이다. int : 박종국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세종대왕의 교육 정신을 계승하고 이어가고자 하는 취지에서 정부에서는 1982년도에 세종대왕 탄신일을 법정 기념일(스승의날)로 정했습니다. 세종대왕의 정신과 교훈을 이어받아 교육을 시키는 것에는 기본적인 바탕에 그분의 신의와 믿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거짓말 하지 않고 신뢰를 지키면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심정, 즉 마음이 고르면 정치와 행정 모두 조금의 문제 없이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직언도 서슴없이 하셨는데 na : 세종은 결코 ’고분고분한’ 왕이 아니었다.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한 임금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추진력이 강한 군주였다. 목표가 일단 정해지면 끈질기게 구성원들을 설득하고 다독이며, 또 어떤 때는 위협까지 하면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결단을 내리는데 있어 끊임없이 신하들과 의논하고 토론했고, ’소통하지 않는 정치는 이미 정치가 아니다’라고 보았던 세종은 설정된 목표에 왜 도달해야 하는지, 지금 변화하지 않으면 조만간 어떤 파국을 맞게 되는지를, 상세하고 명확하게 일깨워가면서 함께 나아갔다. 이것이 찬란한 조선시대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리더십의 요체였다. int : 박현모 / 여주대학교 교수,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대부분 정치가나 관료들, 또 어떤 기업이나 조직의 장만 해도 내가 잘해서 너희에게 베풀어 줄게 이런 생각을 하지, 더불어서 목표를 정하고 그들의 수준을 끌어올려서 함께 갈려고는 하지 않거든요. 아시다시피 한글창제, 문자란 권력을 백성들에게 준 거잖아요. 그건 굉장한 불편함을 지도자가 감내하는 거거든요. 문자라는 권력을 주고, 또 해시계 물시계와 같은 시간이라는 중요한 정보를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거 거든요. 본인은 왕 스스로 불편할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수준을 확 끌어 올려서 함께 나아가도록 하는, 그런 일종의 모험인데 그 점에서 굉장히 우리가 요즘 배워야 할 요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na :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책을 보며 정사를 돌보기에 힘썼던 세종은 재위 중반부가 되면서 온몸은 망가지고 갖가지 질병으로 힘들어하면서도 그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설득하고 추진하고, 확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말 뿐인 지도자가 아닌 몸으로써 결과로써 백성을 하늘같이 섬기는 정치를 해내었다. int : 박현모 / 여주대학교 교수,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외국인들도 세종에게 굉장히 공감하는 코드들이 있는데, 지도자가 결정할 때 바로 눈앞에 보이는 엘리트들이 아니고, 가장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면서 결정을 내리는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사람이 반응을 보이고 그것이 말로 휴머니즘에 대표적인 사례다. 이것은 단지 한민족의 문제가 아니고, 글로벌하게 다 통하는 리더십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조치를 하고 그걸 제도화해서 경국대전에 반영되도록 한 그런 휴머니즘적인 리더십, 리더십의 지평을 좀 확 넓히면 굉장히 사람들로 하여금 신이 나게 하는 그런 리더십의 사례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na : 취미이자 특기가 공부였고, 의젓하고 조심하며 부지런한 성격의 소유자 세종. 성격이 다정다감해서 부모 형제에게 효제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겸손하면서도 공경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 왕이라고 자신의 지위를 들어가니 않고 겸손으로 백성을 섬겼던 왕 소통과 인내가 부재한 이 시대에 사회 계층의 각각의 지도자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소통과 헌신의 리더십을 일깨워 또 다른 세종시대가 열리길 바래본다. 자막 세종대왕 업적 1397년(태조 6년, 1세) 4월 10일(양력 5월15일)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한양에서 탄생하다. 1408년(태종 8년,12세) 충녕군에 책봉되고 심온의 딸(소헌왕후)과 혼인하다. 1412년(태종12년,16세) 충녕대군에 진봉되다. 1418년(태종18년,22세) 6월 왕세자로 책봉되다. 1418년(태종18년,22세) 8월 10일(양력 9월 18일) 조선 제4대 임금으로 등극하다. 1419년(세종 1년,23세) 이종무가 227척의 병선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하다. 1420년(세종 2년,24세)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키다. 집현전의 기구를 확장하여 궁중에 설치하다. 1421년(세종 3년,25세) 주자소에서 금속활자 「경지자」를 완성하여 인쇄술을 개량하다. 1423년(세종 5년,27세) 금속화폐 「조선통보」를 주조하다. 1424년(세종 6년,28세) 사죄(死罪) 삼복법(三覆法:삼심제)을 정하여 죄인의 억울함을 줄이다. 불교의 종파를 선종, 교종 양종 35사로 통합하다. 악기도감을 설치하고 악기를 제조하다. 1426년(세종 8년,30세) 젊은 학자를 뽑아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하게 하다. 1430년(세종12년,34세) 새로운 세법인 공법(貢法)의 실시 여부를 각도의 수령과 백성들에게 물어 찬반의 숫자를 조사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론조사) 관노비(官奴婢)의 출산휴가에 대한 법을 정하다. 1433년(세종15년,37세) 압록강 이북 여진족을 토벌하고 4군을 설치하여, 국경을 이룩하다. 정초,이천 등의 「혼천의」를 제작하다. 1434년(세종16년,38세) 장영실이 제작한 「자격루」를 보루각에 설치하여 사용하다. 조판 주조의 법을 개량하고, 새 활자 「갑인자」를 만들다. 「앙부일구」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다. 1437년(세종19년,41세) 이천 등이 파저강 야인(여진족)을 정벌하고 6진을 설치하여 국경이 동북으로 두만강에 이르게 하다. 1441년(세종23년,45세) 「측우기」를 제작하고, 「수표」를 세우다. 1443년(세종25년,47세)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언문청을 설치하다. 1445년(세종27년,49세) 화포를 개량하여 화포의 사정거리가 2배 이상 늘어나다. 「용비어천가」,「의방유취」를 편찬하다. 1446년(세종28년,50세) 소헌왕후가 승하하여 영릉(서울 내곡동)에 장사하다. 훈민정음을 반포하다.「훈민정음 해례본」을 완성하다. 1447년(세종29년,51세) 「치화평」, 「취풍형」, 「여민락」등의 악보를 완성하다. 「석보상절」을 간행하고,「월인천강지곡」을 편찬하다. 서울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을 개축하다. 1448년(세종30년,52세) 경복궁 안에 내불당을 건립하다.「동국정운」을 간행하다. 1449년(세종31년,53세) 두만강 유역의 6진을 모두 개척하다. 1450년(세종32년,54세) 2월 17일(양력 4월 8일) 영응대군 집 동쪽별궁에서 승하하시어, 소헌왕후가 안장된 영릉(서울 내곡동) 서실에 합장하다. 1469년(예종 1년) 영릉을 서울 내곡동에서 경기 여주군 능서면 위치에 천장하다. 자막 우리 모두가 소통과 헌신의 리더십을 일깨워 이 시대에 또 다른 세종시대를 열어 나가길 소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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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3

[한국문화100] 전통잠수문화 상징, 해녀

해녀는 몸에 아무런 장치 없이 맨몸으로 잠수해서 전복ㆍ소라ㆍ미역ㆍ우뭇가사리 등 해산물을 직업적으로 채취하는 여자를 말한다. 해녀의 본고장인 제주에서는 이들을 ‘잠녀(潛女)’ 혹은 ‘잠수(潛嫂)’라 부르는데, 이들 잠녀는 전통적 잠수문화의 상징이자 제주여인의 강인한 삶과 독특한 문화를 상징하는 결정체이다나레이션-----------------------------------------------------------------------------------------------평화로운 잔잔한 물결과, 때로는 거센 파도가 치는 낭만의 바다, 이 곳은 그녀들의 삶과 직결된 곳이다.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 때에는 제주바다에서 물질하는 해녀들을 볼 수 있다. 기계장치 없이, 맨 몸과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의한 호흡 조절로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성을 해녀라 부른다. 인터뷰해녀의 유래?(해녀의 시초의 역사적 자료는 없지만) 추정해본다면 제주도의 토질이 척박하고 땅에서보다는 바다에서 생산되는 것 들이 많기 때문에 (물질이 시작되었고) 옛 당시에는 남녀가 모두 바닷물에 들어가(해산물을)채취하는 일을 했지만, 남성들도 있었지만 남성들은 조선시대에 규모가 줄어들며 여성들이 그 빈틈을 채우며 지금까지도 여성들이 물질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해녀들은 수중장비 없이 물옷을 입고 물질준비를 한다.물안경, 태왁망사리, 빗창 등 물질도구를 챙기면 모든 준비는 끝이 난다. 특별한 재능과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다, 생계를 지키다보니 해녀가 돼 있었다고 한다.빈손으로 물속에 들어가 망사리 가득 해삼물을 따왔고 어머니들은 그것으로 자식들을 키웠다. 인터뷰고천혜자/ 제주도 해녀누구한테 배우긴~, 스스로 하다 보니 배워진 거지~다른 사람들 하는 거 보고 나도 하게 됐지, 장광자/제주도 해녀나는 건넛마을 바다에 있는 해녀인데, 우리 할머니도 어머니도 해녀였고,우리는 학교 갈 생각은 안 하고 어머니 따라가 놀다 보면 배우게 됐고,어머니 따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해녀가 됐지 예전에는 관광손님도 없다 보니깐, 바다 물건을 잡아서 팔대도 없었던 거 같아. 그래서 바다 해초 따서 밭에 거름을 주고, 돈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미역, 우리가 어른이 돼서 보니깐 우리 어머니들이 미역을 팔아서 자식들 시집도 보내고 우리 어머님들이 이렇게 우리를 키워주셨지~ 나레이션옛 부터 지금까지 바다는 늘 아낌없이 내어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또한 해녀들에게 불턱은 돌담의 바람을 막고 불을 지펴 추위를 녹여주는 사랑방 역할을 한다 자막불턱해녀들이 바닷가 양지뜸에서 불을 쬐는곳수련,교육, 위계질서 등 해녀 공동체의 상징 인터뷰이승훈/ 제주해녀박물관 관장과거에 해녀 분들이 바닷가에서 물질을 하면 체온이 낮아지면 체온을 올리기 위해서 불을 피워놓고 몸을 녹이는 장소인데요, 그 장소에서 여러 해녀들이 몸을 녹이고 어린 해녀에게는 해양의 지식을 가르치고 경력이 많은 해녀 분에게는 노하우를 배우며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는 민주적으로 결정을 해서 모든 마을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나레이션 물속에 들어가면 해녀들은 아픈 몸도, 나이도 잊는다고 한다또한 해녀들은 채취기간과 금채기간 등을 규약으로 정해놓고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자생적인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해녀들은 바다밭을 단순 채취의 대상이 아닌 끈임없이 가꾸며 자연과의 공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터뷰 장광자/제주도 해녀그렇게 힘든 점은 없는데 소라를 채취하던가, 그러면 수심 깊은데 가면 전복도 따고 소라도 잡고 오다 저 쪽에 있는(소라를) 보고는 아까워서 그것까지 가지고 오려면 숨이 깔딱 넘어갈 때가 있지, 그 (숨비)소리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고, 자연으로 쉬익~소리가 나와. 호이~ 허이~ 숨 돌아오는 숨비소리지! 또 물건 많이 잡는 날이면 그날 기분도 좋고 피로도 풀리고, 못 잡은 날은 힘도 많이 들고 죽을 거 같고 (그래) 이들 해녀는 전통적 잠수문화의 상징이자 여인의 강인한 삶과 독특한 문화를 상징하는 결정체이다. 바다 속 깊은 곳에는 그녀들의 신비한 삶이 담겨있다. 진취성과 더불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공동체 문화. 바다의 어멍, 해녀는 우리 소중한 문화유산이다------------------------------------BGM - 해녀, 이름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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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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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드넓은 영토를 개척한 광개토대왕

한민족의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확장 시켰던 광개토대왕에 대해 알아본다. ------------------------------------------------------------------------------------------- Na 이곳은 충북 충주에 위치한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전시관에는 고구려가 만주부터 남한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던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바로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구려 비석, 충주 고구려비이다. int 박경애 / 충주 문화관광 해설사 한반도의 유일한 (고구려) 석비라는 사실 만으로도 굉장히 큰 역사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비 비문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서 그때 당시에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넘어서 이곳 충주지역까지 진출했었던 확실한 증거자료입니다. Na 한민족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고구려의 장수왕 시대의 기록이 남아 있는 충주 고구려비, Na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까지 그 기초를 닦아 놓은 왕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장수왕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이다. Na 어느 나라나 어느 민족이나 자랑할 만한 왕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여러 가지 업적 가운데 나라를 키우고 영토를 확장하는 왕만큼 존경받는 왕이 없을 것이다. Na 그래서인지, 광개토대왕을 가리키는 완전한 이름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인데, 이 이름은 땅을 넓게 차지하고 나라를 잘 다스린 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int 고운기 /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는 주로 중국 쪽 나라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광개토대왕비에는 그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와의 관계 그리고 또 바다 건너 일본과의 관계 이런 것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보면은 광개토대왕은 북쪽으로는 중국에 여러 나라들과 활발한 외교전을 벌였는가 하면 또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면서 남진정책의 시발점도 바로 광개토대왕 때 부터 이루어졌고, 광개토대왕은 동서남북을 통틀어서 고구려의 영토를 최대한 확장시켜 나갔던 그런 왕이었고, 이런 기록들이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집니다. Na 중국 지린 성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경기도 구리시에서는 후손들에게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과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고자 실제 크기의 광개토대왕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그 비문의 내용을 일부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Na ‘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Na 왕위에 올라 20여년의 기간 동안 나라를 부국하게 만들기 위해 쉴 틈없이 달렸던 광개토대왕은 39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게 된다. int 고운기 /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고구려의) 국경이 확대가 되고, 또 그 확대된 국경 속에서 나라가 온전히 이어나갈 수 있게끔 그 틀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 언제 드러나냐면 그의 아들인 장수왕 때 드러나요. 장수왕은 왕위에 무려 70년을 넘게 있었어요. 그리고 이름도 장수왕이에요. 장수왕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고구려가 있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정말로 잘 물려받았던 것이 뭐냐면, 이렇게 큰 나라를 지키고 유지해 나가는 데에는 전쟁만 가지고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무력에 의한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서 70년을 고구려를 끌고 갔거든요. 그것이야말로 사실 우리가 고구려의 역사 속에서 특히 5세기에 광개토대왕에게 배워야 하는 가장 훌륭한 역사적 교훈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죠. Na 우리민족을 일컫는 말 중에 배달의 민족이라는 말이 있다. 배달의 뜻은 고구려의 기상과 뜻을 널리 펼쳤던 우리 민족을 높게 나타내는 말이다. 단순히 군사력으로 영토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가와 백성을 아우르는 통솔력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확장시켰던 광개토대왕, 그는 서양의 정복 왕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비견되는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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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0

[한국문화100]마을 신앙의 중심 서낭당

민중의 염원과 기원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마을 신앙의 중심 서낭당의가치를 재조명한다. 제목 : 마을 신앙의 중심 서낭당 내레이션 성황은 서낭당에 모신 신을 뜻하는 것으로 성황당과 서낭당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지금은 산업화와 도시화로 많이 사라졌지만 마을 어귀나 산허리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돌무더기, 오래된 나무, 작은 당집 그리고 나무와 당집이 같이 있는 형태 등으로 서낭당은 존재했다. 서낭당에는 오방색을 뜻하는 오색띠가 매어져 있거나 금줄이 쳐져 있는데 이러한 것은 복을 부르고 사악함을 쫓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서낭당을 개인적 혹은 마을공동체 신앙의 수호신 삼아 섬겼다. 인터뷰 김창호 /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서낭당이 지금은 많이 없어졌습니다. 남아있는 서낭당들도 무형문화재라는 입장에서 보존되고 있는 차원인데요. 사실, 서낭당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마을 공동체의 표상과도 같은 것입니다. 서낭제를 통해서 마을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도 하고 그 안에서 다음세대에 대한 마을의 전통을 교육하는 것도 일어납니다. 굉장히 순기능적인 여러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마을이 옛날 같지 않고 아파트와 같은 분할된 가구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공간으로 변해서 옛날에 한마을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가 되었던 모습은 찾기가 힘든데,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것이라는 입장 이외에도 한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뜻을 모을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서낭당을 통해서 주어졌던 것인데요. 그런 부분들이 오늘날에도 꼭 필요하고 없어졌기 때문에 아쉬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막 성황당 1937년 발표된 정비석의 단편소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토속신앙과 인간의 삶을 신선하고 조화롭게 묘사 내레이션 우리의 문학과 노래에는 서낭당이 자주 언급되었다. 그만큼 우리 민중들과 가까웠던 것이 서낭당이다. 정비석의 소설 성황당은 후미진 평안도 산골에서 숯을 구워먹고 사는 순이 부부와 그녀를 노리는 사내들의 이야기를 원초적이고 관능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특히, 성황당과 순이의 관계를 통해 토속신앙과 인간의 삶을 신선하고 조화롭게 묘사했다. 자막 깊은 산중에서 숯을 구워 생계를 꾸려가는 현보의 아내 순이는 모든 일을 성황님의 은덕으로 여기며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현보를 도와 숯가마에 불을 때던 순이가 더위를 참지 못하여 옷을 벗고 개울에서 목을 할 때, 예전부터 순이를 노리고 있던 산림간수 긴상이 그녀의 옷을 감추고 협박을 한다. 순이는 이에 단호히 대항하고 앙심을 품은 긴상은 순이의 남편 현보를 산림법 위반으로 고발하여 감옥에 가둔다. 이때, 순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칠성이 찾아와 긴상과 칠성은 순이를 사이에 두고 격투를 벌인다. 며칠 뒤, 다시 칠성이 나타나 순이에게 현보가 3년은 감옥에서 지내야 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같이 도망칠 것을 종용한다. 그가 가져온 분홍 항라적삼과 수박색 목메린스 치마에 마음이 끌린 순이는 칠성을 따라나선다. 그러나 30리쯤 갔을 때 산을 떠나 살아야 한다는 사실과 현보에 대한 그리움, 무엇보다도 성황님의 벌에 대한 무서움 때문에 순이는 칠성에게서 도망쳐 집으로 돌아온다. 순이가 “성황님 ! 성황님 !” 을 외며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방안에서는 “에헴” 하는 현보의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밤 따라 접동새와 부엉새 소리는 순이의 가슴을 파고드는 듯이 정다운 것이었다. 자막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마을 내레이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민속적 전통과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에서는 두 가지 형태의 서낭당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하회마을 가장중앙에는 삼신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가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하회마을이 조성될 때 심은 것으로 여겨지는 나무의 수령은 6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신목을 서낭당 삼아 정월대보름에는 제를 올리며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과 공동의 소망을 빌기도 한다. 인터뷰 손주호 / 대구광역시 지금 만나고 있는 연인과 안 싸울 수는 없겠지만, 싸우더라도 서로 잘 잡으면서 이 운명 끝까지 꼭 가져가고 싶습니다. 김명숙 / 서울특별시 저를 비롯해서 제 가족과 친지, 주위의 분들, 다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김문배 / 서울특별시 곧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가 무사히 잘 태어나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그것을 빌러 왔습니다. 내레이션 특히, 삼신당은 자식을 귀하게 여겨 후손이 잉태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잘 들어주어 마을 전체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하회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앞산의 중턱에는 또 다른 서낭당인 중당이 조성되어 있다. 서낭당과 같은 마을제당은 주민들의 종교심성을 공유할 수 있는 신성한 영역이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마을의 신을 중당에 모셔와 제사 지내고 서로의 안녕을 기원한다. 해설사 인터뷰 박순화 / 안동문화관광해설사 중당은 국신당을 모셨어요. 국신당은(공민왕의 모신 것으로) 공민왕이 안동으로 70여일을 몽진을 오셨어요.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그래서 안동에는 공민왕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조성되었지 않나 싶습니다. 풍산류씨들이 하회마을에서 많은 인재가 특히, 영의정 서애 유성룡 대감 같은 명재상이 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자막 국신당은 신격화된 고려의 공민왕을 의미하며 특히 안동지역에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신앙되고 있다. 자막 강원도 강릉시 내레이션 강원 강릉시에서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강릉단오제 기간 동안 대관령산신을 모셔와 서낭제를 지낸다. 자막 학산서낭당 강릉단오제의 주신 대관령국사성황 범일국사가 태어난 학산의 서낭당으로 매년 음력 4월15일 머물러 굿과 제례를 올린다. 내레이션 강릉고을을 지켜주는 대관령 산신께 제사하고 험준한 대관령 산길의 안전을 기원하며 풍작과 풍어 집안의 태평 등을 기원한다. 제를 시작으로 진행되는 강릉단오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축제로 신과 인간이 자연스럽게 만나 하나가 되는 만남의 공간이다. 서낭당에서 마을의 수호신을 섬기는 것은 단순히 기원의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식, 심적인 유대, 연대감을 강화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민중이 가깝게 여기는 마을제당이자 개인제당이었던 서낭당.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야할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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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생명의 흙, 황토

황토는 한국인의 정서적 감흥에 가장 잘 부합되는 색깔과 느낌이다. 가치를 알아보고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황토 대본) 나레이션 중국 최고의 지리서 산해경, 세계기록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 최고의 의학전서 동의보감. 황토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문화와 역사에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황토는 구들방, 초가집 등 주거문화를 시작으로 조상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재산이었다. 또한 예로부터 살아있는 생명체라 하여 많은 약성을 가져 무병장수의 흙으로도 불려 왔다. 인터뷰 노희명/서울대학교 응용생물학부 교수 황토란? 황토는 말 그대로 누런 흙을 뜻합니다. 영어로 보면 loess로 독일어 어언을 갖고 있는데, 나일강 유역에서 처음으로 발견 됐음에 이러한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나레이션 생명의 흙 황토, 황토는 학술적으로 바람에 의하여 운반되는 쌓인 황색의 광물질을 의미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암석이 풍화되는 과정에 생긴 토양’을 총칭하여 황토라 한다. 황토는 단순한 흙이라는 범주를 뛰어 넘어 주거와 식생활뿐 아니라 다양한 생활 제품으로 이용되고 있다. 전라북도 고창, 황토로 유명한 이곳은 지하 6미터 아래에 있는 입자가 작고 색이 짙은 황토를 채굴 하는 곳이다. 고창황토를 연구하시는 박영택 선생님께 우리 고유의 황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인터뷰 박영택 /황토 명인 황토분말이나 건축자재를 만드는 황토의 채취장입니다. 산의 1미터정도 깎고 그 밑의 황토를 채취를 해서 황토를 가공해 황토제품을 제작합니다. 황토는 예로부터 조상들에게 꼭 필요한 삶의 일부였지만 현재는 황토를 일상생활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충남 /계족산 하지만 이곳 계족산에서는 현대인들이 황토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다. 도심 속에 위치한 황톳길을 맨발로 걸으며 황토를 느끼고 상쾌한 기운도 얻어 갈 수 있는 곳이다. 최희주/ 신세대유치원 교사 저희 유치원의 슬로건이 자연생태 활동위주입니다. 자연 생태 활동 위주로 교육을 하다 보니 자연 황토가 건강에 도움이 많이 되고, 황토의 촉감놀이도 느낄 수 있으며 시멘트에서 사는 아이들보다는 자연에 어울러져 사는 아이들이 좋을 꺼 같아 오게 됐습니다. 흙과 우리 민족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흙을 어머니라고 부를 만큼 다양한 흙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황토의 유용성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우리 전통 흙 문화로 지키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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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대한민국의 영토 독도

한국문화100 독도편 대본 내레이션한반도 동쪽의 작은 섬. 천연기념물 336호. 바다를 거치는 새들의 안식처.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여 다양한 어종이 모여드는 황금어장. 천연가스층이 발견된 해저자원의 보물창고. 신라시대 사람 이사부부터 조선의 안용복 그리고 1950년 해방 이후 독도의용수비대원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곳.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저는 대한민국의 영토 독도입니다. 평화로운 섬인 저 독도는 아픈 과거로 지금까지 상처 받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의 첫 희생물이었습니다. 제국주의 야욕에 불타던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1905년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기 위해 독도를 주인 없는 섬이라며 불법 편입합니다. 그런데 저 독도가 과연 일본의 주장대로 주인 없는 섬이었을까요? 1145년에 발간된 삼국사기를 포함하여 한국의 수많은 옛 문헌과 지도들은 독도를 오랜 옛날부터 한국의 영토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1454년 제작된 세종실록지리지는 울릉도와 독도의 위치를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1900년 대한제국은 칙명 제 41호로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다시 한 번 명확히 합니다. 일본의 기록은 어떨까요? 일본은 1905년 이전에는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수많은 일본 문헌은 독도가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17세기 말 일본은 공식문서를 통해 독도가 공식영토가 아니라고 스스로 인정합니다. 1877년 일본정부 최고 행정기관인 태정관은 일본 전역의 지적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정밀한 조사 끝에 독도가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110년간 숨겨져 있다가 1987년에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 태정관 문서는 독도가 일본영토가 아님을 일본정부가 공식 확인한 명백한 증거입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카이로, 포츠담 선언 등 전후 처리 과정에서 패전국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모든 지역으로부터 쫓겨납니다. 저 독도도 한국의 품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1946년 연합국 최고사령관 각서 677호는 독도를 분명한 한국의 행정관할 구역으로 선포합니다. 인터뷰성일종 / (사)독도사랑운동본부 부총재분명히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일본과 우리가 이러한 가치의 문제 때문에 많이 싸우게 될 겁니다. (독도가 일본의 것이라고)잘못 교육받은 일본의 메인스트림(주류사회)과 우리의 젊은이들이 대응을 하게 될 텐데요. 그에 대한 일환으로 순수한 국민운동으로, 막연히 독도는 정부가 지켜줄 것이라고 지금도 국민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서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전체가 소중한 영토에 대한 교육을 통해서 일본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민부 / 한국교원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독도는 우리의 땅임에 틀림이 없고 또한 국제법적으로도 현재 우리가 이 땅을 소유하고 있고 방공식별구역이라든지 항공식별구역 등등 국제조약을 통한 국제 협약에서도 현재 이 부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이 문제는 얼마든지 우리가 논쟁을 해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만 일본은 자기들이 시네마현에 편입을 했다고 하는 1905년 사실 하나만 가지고 줄기차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독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 국력을 튼튼히 해서 조금도 허술한 면이 없도록 독도를 잘 지킬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레이션저 독도는 대한민국 주권회복에 상징입니다. 저를 둘러싼 일본의 역사왜곡문제는 건전한 한일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치명적인 현안입니다. 동반자적 관계로 미래를 열기 위해 일본의 끊임없는 도발적 행동으로부터 평화의 섬, 저 독도를 기억하고 지켜주세요. 저는 영원히 한반도의 동쪽 끝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로 자랑스럽게 서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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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한반도의 평양은 역사상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역사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평양이 가지는 의미와 배경 주요 사건들에 대해 알아본다. ----------------------------------------------------------------------------------------------- 평양편 여러분, 안녕하세요!한국문화100 평양편 소개를 맡은 역사 교사 문인식입니다. 반갑습니다.여러분들은 평양이라고 하면 주로 뭐가 떠오르시나요?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아마 이런 북한의 정치인들이 떠오를 겁니다.이들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우리는 평양에 대해 자세히 모르고 있는데요.사실 대한민국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는인구 천만의 도시 서울도 아니고, 백제의 도시 공주도 아니고,천년 고도의 도시 경주도 아닌, 바로 평양입니다.이 평양에 대해서 자세하게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느끼시기에 평양이란 말이 어렵게 느껴지실 수 있겠지만,우리 고유어인 '부루나'라는 말을 한자로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부루'라는 말은 평평하다는 뜻이고요, '나'라는 말은 땅이라는 뜻이에요.합쳐서 말하면 평평한 땅이라는 거죠.여러분들이 실제로 평양에 가보면, 산도 없이 드넓은 평야가 있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그렇게 넓은 평야는 남한에서는 '호남평야' 밖에 비견될 곳이 없어요.이렇게 넓은 땅에 대동강이 흐르고 있습니다.대동강이 흐르기 때문에 땅은 한결 더 비옥해지고 사람들이 살기 좋아지는 것이죠.저 먼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이곳에서(평양에서) 사람들은 살았답니다.유명한 구석기 유적인 평남상원검은모루동굴이 바로 평양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이 유적에서는 신기하게도 물소, 원숭이와 같은 뼈들이 나오는데요.이 당시에 한반도가 훨씬 더 따뜻했음을 보여주는 유적 유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제 시대가 흘러 최초의 문명 최초의 우리나라 국가가 탄생하게 되죠.바로 어디입니까, 여러분 단군할아버지 아시죠?그렇습니다. 고조선입니다. 고조선의 수도 또한 평양이었습니다.이 고조선의 수도를 왕검성이라고 하는데요.왕검성의 위치가 만주라고 하기도 하고, 그리고 평양에 있기도 하고,이동했다고 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학설이 존재합니다.근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단군 조선 이후에 위만 조선일 때수도 왕검성은 확실히 평양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고조선은 이 왕검성, 평양을 거점으로 해서 중국의 한과남쪽의 진과의 중계 무역을 통해 이득을 얻기도 했죠.그러나 중국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한무제의 침략에 의해결국 고조선은 왕검성이 함락하게 되면서 멸망하게 됩니다. 시대가 흘러 삼국시대에 가보겠습니다.북쪽에 고구려, 남쪽에 백제, 신라가 있는 삼국시대 평양은 누구 땅이었을까요?그렇습니다. 드넓은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가 평양의 주인이었죠.원래 고구려의 수도는 압록강이 흐르는 국내성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맞물리게 되면서고구려는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게 되죠.본격적으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겠다는 겁니다.고구려는 평양을 수도로 했을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는데요.북으로는 부여와 숙신을 정복하고,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찍어 눌러 충주까지 밀어내는 등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게 바로 평양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전성기를 부가하던 고구려, 하지만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그 당대에 최고의 외교가였던 신라의 김춘추가 배를 타고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게 되죠.그래서 당 태종을 만나 담판을 짓습니다.신라와 당이 손잡은 거죠. 이렇게 결성된 나당 연합군은 660년 의자왕이 이끌던 백제를 멸망시키고,668년 평양성으로 다가오게 됩니다.결국 나당연합군과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분열로 인해서 고구려는 멸망하게 됩니다.이렇게 잠시 잊혔던 도시 평양은 고려 때 다시금 주목받습니다.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죠.고구려가 이룩했던 그 넓은 땅을 회복하고 싶었던 고려는 북진정책을 추진하게 되고,북진정책의 거점으로서 평양을 선택하게 됩니다.실제로 고려의 많은 왕들은 개경이 아니라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싶어 했어요.그리고 진취적인 기상을 가졌던 묘청은 수도를 아예 서경으로 옮기자는 운동을 벌였습니다.이게 정말 유명한 서경천도운동인데요.나중에 일제강점기 때에 민족사학자였던 신채호는 서경천도운동을 가지고 이렇게 표현했습니다.한민족의 역사상 일천 년대에 제일 가는 대사건이다.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수도가 평양으로 옮겨지고 더욱더 진취적으로 나아갔다면우리 천년의 역사가 바뀌지 않았겠나 하는 그런 아쉬움에서 이런 말을 했던 게 아닌가 싶네요.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조선이 건국되고 200년이 흐른 뒤1592년 4월 14일 부산 앞바다에 웬 배들이 가득 메워서 부산으로 건너옵니다.그렇습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죠. 약 15만이 넘는 일본군은 약 20일 만에 한성을 함락시킵니다.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서 평양까지 차지하게 되죠.이렇게 빼앗긴 평양은 1593년 1월에 명나라가 참전해서 조명 연합군에 의해 탈환되게 됩니다.북쪽에 만주를 통일했던 여진족의 후손 후금은 또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통해평양을 침입하게 되는데 이때에도 평양은 전쟁터가 됩니다.제가 이렇게만 말하면 마치 무슨 평양이 전쟁터인 거처럼그렇게 생각하지겠지만 꼭 그렇지마는 않습니다.평양은 원래부터 비옥한 땅이 있었고, 그리고 중국의 사절단이 오가는 중요한 길목이었어요.그래서 풍족하고 문화적으로도 발전되었으며 없는 게 없는 아주 발달된 도시였습니다.그래서 조선시대 관리들이 가고 싶은 곳 3개를 꼽으라고 하면그중에 한 곳에 평양이 꼭 뽑혔다고 하네요. 여러분들은 우리나라가 최강 대국 미국과 전쟁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조선 때 미국과 전쟁을 치렀던 때가 있습니다. 바로 신미양요인데요.이 신미양요의 발단이 되는 사건이 바로 평양에서 발생했습니다.역사 공부 조금 하신 분들은 알 텐데요.바로 제너럴 셔먼 호 사건입니다.대동강 물을 거슬러 상선, 미국의 제너럴 셔먼 호가 쭉쭉 쭉 올라갔습니다.드디어 평양까지 갔죠. 평양까지 간 제너럴 셔먼 호 무엇을 요구했을까요?통상, 거래, 사고팔기 이런 걸 원했어요.그런데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는 그런 게 불가능했어요. 왜 그랬을까요?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지배자가 누구였냐면, 쇄국정책의 아이콘 바로 흥선대원군이었어요.당연히 거래 같은 게 될 리가 없었죠. 그래서 여기서 갈등이 빚어지는데요.이 갈등 속에서 제너럴 셔먼 호의 공격에 의해 평양 백성들이 죽게 되면서뿔난 관군들이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우게 되고그리고 잡힌 선원들을 성난 군중들이 막 몽둥이로 때려죽이면서 여기서 사건이 터집니다.나중에 미국은 이것을 빌미로 쳐들어오게 되는데요.이것이 바로 강화도를 배경으로 벌어진 신미양요에요. 1910년 일제에 의해서 조선은 합방되게 됩니다. 강제적으로 합방되고 말았죠.일제강점기에 물산장려운동이라는 독립운동의 종류 중에 하나가 바로 평양에서 펼쳐지게 됩니다.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맞서서 우리 것으로 만 살자, 내 살림 내 것으로 라는 구호를 앞세워 가지고국산품 애용, 근검절약 등을 통해 우리의 토종기업 등을 육성시키고자 하는 물산장려운동이평양에 살고 있던 조만식에 의해 진행되게 됩니다.이러한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기는 평양에서도 이렇게 있었네요. 8월 15일 우리 민족이 그렇게 염원하던 광복을 맞이하게 됐습니다.하지만 기쁨도 잠시 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발생하게 됩니다.그래서 평양은 우리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가깝지만 먼 곳이 되었죠.언젠가 우리 발로 가서 우리 눈으로 평양을 직접 보는 그날이 오기를 기원하면서평양에 대한 소개를 여기서 마치겠습니다.이상 역사교사 문인식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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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9

[한국문화100]농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다, 풍물 굿

농악이라 불리는 풍물 굿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대본---내레이션이때 농사꾼들의 능률을 올려주기 위해서 한데 모여 흥을 돋우는 의식을 벌였는데 이를 풍물 굿 이라고 한다.주로 농사를 할 때 행해져 농악으로도 알려져 있는 풍물 굿은 농경사회를 이뤄온 우리 선조들의 생활상을 알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농촌문화다.풍물 굿이 주로 타악기를 이용한 흥겨운 리듬의 굿판을 벌이는 게 기본 형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때때로 춤과 노래등의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재미를 더해주곤 한다.뿐만 아니라 서로 음식도 나누어 먹고 대화도 하는 등 다목적 기능의 종합예능 형태를 띠는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버라이어티 행사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풍물 굿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한민족이 한반도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했을 때부터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공동노동을 하면서 노동의 애환을 달래주는 음악과 춤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한다.그러나 풍물 굿은 두레라는 강력한 조직에 힘입어 상당히 체계적으로 발달하였다. 인터뷰풍물 굿이란 농악이라고도 하는데요, 소위 풍물 꾕과리, 징, 장구, 북, 소고 등의 타악기들을 동원을 하고 여기에 음악적인 요소, 무용적인 요소, 연극적인 요소 등이 종합적으로 결합되어져 만들어지는 우리나라의 전통 공연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풍물 굿은 이른바 집단적인 신명이라고 하는 (한국인들이 신난다고 하는 것) 것을 가장 깊고 포괄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그런 역동성을 가지고 있는 공연 예술이라는 점에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겠습니다.내레이션풍물 굿의 형태와 특징은 지역마다 각기 다른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참가 한 팀들을 통해 풍물 굿을 만나보자.자막이서들소리보존회 (경상북도)경북 청도군 이서면에서 전승되는 농업노동 풍물굿으로 주민들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내레이션우리선조들의 마을 공동 문화상을 알아 볼 수 있는 대표 전통 문화, 풍물 굿. 농경문화가 없어지면서 자연스레 풍물 굿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전통문화를 지키는 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한 이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는 계속되리라 믿는다.앞으로도 풍물 굿은 한국 최고의 농민예술로 우리들에게 많은 울림을 줄 것이다. 시대는 변했지만 한민족의 한과 정서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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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3

[한국문화100] 한민족의 성산, 백두산

우리나라 최고 높은 산, 정상에 위치한 천지는 한민족의 성지이다.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한 한민족의 발상지인 백두산에 대해 알아보자. 백두산나레이션 높이 약 2,750m 총 면적 8천평방 킬로미터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백두산이다. 백색의 부석이 얹혀 있는 모습이 마치 흰머리와 같다 하여 백두산이라 부른다. 이민부/한국교원대 지리학과 교수Q. 백두산이란?백두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2744m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북아시아 대륙에서도 가장 높은 산지이고 특이하게도 화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깨끗하게 잘 만들어진 층층이 쌓인 성층화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화산채의 크기가 용암이 흘러내린 면적까지 하면 2만2천평 정도에 달하며 한반도의 10분의 1에 이르는 거대한 화산재입니다. 자막백두산 봄백두산의 봄은 6월 즈음에 돼서야 찾아온다. 장대한 백두 폭포로부터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해발 2000미터, 백두산의 고산화원에 냉랭한 찬바람을 이겨내고 백두산의 영기를 받은 꽃들이 피어오른다. 자막백두산 여름백두산의 연평균 기온은 영하7.3도고 최저 기온은 영하44도에 달한다. 7월 중 잠시나마 짧은 여름이 찾아온다. 수면 10미터 깊이 있는 돌이 마치 잡힐 듯 천지의 물은 맑다. 자막백두산 가을한반도에서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9월 초, 백두산에는 일찌감치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 가을이 시작되는 것이다. 곱게 물든 가을풍경은 백두산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이점수/ 사진작가Q. 백두산 등산 당시 모습?처음 백두산을 올랐을 때 웅장함과 장엄함의 기상적인 백두산의 느낌은 숨이 멈출 정도로 감개무량했습니다. 그리고 또 (백두산의 매력으로는) 가을에 백두산을 촬영 하다보면 온도가 내려가고 날씨가 추워지면 눈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10월이나 9월 하순에 백두산 등반 시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막백두산 겨울눈으로 뒤덮인 백두산의 설경이 장관인 이때. 바로 백두산의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계곡 위로 두껍게 쌓인 눈은 이듬해 7월까지도 녹지 않는다. 하지만 한겨울에도 50도가 높은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는 백두산 온천의 신기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백두산은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한민족의 발상지였으며,숭배되어 왔던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수난을 같이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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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0

[한국문화100]마을 공동의 문화공간 정자나무

[한국문화100]마을 공동의 문화공간 정자나무 예로부터 마을의 휴식과 신앙 또는 회합이 이루어졌던 정자나무의 가치를 재조명해본다. 정자나무편 대본 내레이션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의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정작, 사람들은 서로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혹시,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고 계신가요?혹시, 마을주민들과 서로 인사하며 지내시나요?혹시, 마을주민들과 모여서 어울린 적이 있으신가요? 사람은 넘쳐나도 삭막하기만한 현대의 도시. 서로가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만한 공간과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이기는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마을사람들이 정을 나누던 공간이 있었습니다. 마을 초입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모여 마을 일을 의논하거나 쉬기도 했던 오래된 고목. 우리 조상들은 편안한 그늘을 제공해주던 큰 나무를 정자나무라 부르며 사랑방처럼 함께 머물렀습니다. 정자나무는 한결같은 포근함으로 어른들에게는 휴식을 아이들에게는 놀이공간을 제공하였습니다. 정자나무의 넉넉한 규모와 수령처럼 정자나무와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인터뷰김판조그전에는 집이 초가삼간이잖아요. 늘어진 초가집인데 더워서 못살아. 그러니까 점심을 먹으면 다 나온거예요. 다 나와서 오후 세시정도 되어 조금 서늘해지면 그때 일터로 나갔는데 꽉차버려요, 여기가. 이렇게 올라가서 저렇게 늘어진 가지에다가 훈주(줄타기)도 타고 여기 나뭇가지에다가 그네도 매어놓고 그네도 타고 그랬어요. 어르신들이 나뭇가지 찢어진다고 못하게 했지. 내레이션현대의 도시들이 들어나고 사람들이 각자 바빠지면서 정자나무는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습니다. 하지만 다시금, 늘 정이 넘쳤던 정자나무의 모습을 기억하고 따뜻하며 푸근했던 그 순기능을 살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름지기재단과 서울디자인재단이 공동으로 기획하는 마을정자나무프로젝트입니다. 자막마을정자나무 가꾸기 프로젝트, 아름지기재단, 서울디자인재단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350세 느티나무 인터뷰장영석 / 아름지기재단 사무국장그동안 먹고 사는 문제, 급속히 산업화되고 경제적인 부분들을 쫓다가 결국은 다시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고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를 전통에서 힌트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자나무만 하더라도 그냥 단순히 오래된 나무일뿐이지만 사람들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그 아래 같이 모여서 사람 살만한 동네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되거든요. 요즘 만들어지는 그 어떤 최신식의 건물이나 현대적인 공간보다도 사람들에게 더 큰 위안을 줄 수 있는 곳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정자나무 하나하나를 고쳐가는 것이 단지 자연보호 운동이 아니고 더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김순희이런 공간이 생기니까 동네도 아름답고 공기도 좋은데 환경이 깨끗해지니까 살기 좋고 보기 좋지요. 박지훈주변에 자주 왔는데요. 정비된 후에 풍경도 더 괜찮아 진 것 같고 포근한 기분이 들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내레이션정자나무는 단순히 마을의 큰 나무가 아니라 사람, 자연, 문화가 어우러지던 마을의 상징적인 소통 공간이었습니다. 사람사이의 단절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 정자나무가 가지는 정의 가치는 우리가 다시 연결되어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인터뷰방영자안락하고 시원하고 굉장히 정서적으로 좋네요. 이혜숙(혼잡한)도심 속에 있는 느낌이 안 들고 편안하고 어느 시골에 와있는 그런 느낌이 드네요. 내레이션마을 공동의 문화 공간 정자나무,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야할 우리의 문화입니다. ?

제작
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0

[한국문화100] 그리운 그 곳, 금강산

금강산은 우리강산 중 가장 빼어나고 수려한 상징물이다. 특히 남북화해 및 교류의 물꼬를 튼 상징이기도 하다. 동해에 임박한 태백산맥 북부의 아름다운 명승지, 금강산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민족의식의 샘터 금강산에 대하여 알아보자. 금강산 대본 자막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 - 송나라 시인 소동파 천길 흰 비단을 드리웠는가 만섬 진주알을 홑뿌렸는가신라 문인 최치원 금강산 관광 당시 인터뷰 김두진/관광객 금강산을 왔다 가는데감개가 무량합니다. 정선영/관광객 (금강산 방문에) 오늘 너무너무 기쁩니다. 자유롭게 만나고 서로 오며 가며 불편 없이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자막 산 전체가 수정으로 만들어진 듯 빛나는 보석 그 자체이다. 그리운 그 곳, 금강산 금강산의 동서 너비는 약 40KM, 남북길이는 약 60KM, 그 면적은 약 530㎢ 8개 연못, 선녀들이 찾았다던 전설이 내려오는 이곳은 아름다운 은빛 줄기를 가진 상팔담이다. 금강산관광 당시 인터뷰 김영덕/서양화가 대단합니다. 금강산 이쪽이 원래 물 맑고. 공기 맑고 단풍이 물들었는데, 완전히 순수한 붉은 색입니다. 붉은색으로 가기 전, 노란색, 주황색 (단풍의 경치가) 대단합니다. 자막 금강산에 담긴 수천가지의 색들이 어우러져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금강산의 가을은 기암절벽과 단풍이 어우러져 한곡의 멋진 풍악을 울린다 하여 풍악산이라 불려 운다 자막 세존봉에서 본 장전항 내금강에서 외금강 해금강으로 이어지는 금강산의 웅대한 면모. 이정수/사진작가 금강산을 보지 않고는 천하의 절경를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금강산을 조명할 때 가장 감사하다고 할까,자연이 주는 보배라고 느껴질 때 또 현재도 금강산은 훼손이 안됐다는 것을 보면.. 가장 큰 매력으로 뽑을 수 있습니다. 자막 봄에는 금강, 여름에는 봉래, 가을엔 풍악, 겨울엔 개골산 여러 이름을 갖은 금강산의 천 가지의 얼굴, 만 가지의 표정을 다시 볼 수 있도록 바라봅니다

제작
문화포털
등록일
201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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