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문화포털

화면크기
100%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 문화지식 > 전통문양 용도별문양
경복궁 교태전 창살(60883) 크게보기 경복궁 교태전 창살(60883) 크게보기
경복궁 교태전 창살(60883)
문양설명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워졌다. 북으로 북악산에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수도 한양의 중심이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 4년(1867)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시설, 왕족들의 생활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이 위치하고 있다. 1895년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지어 경복궁은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광화문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등이 원래 모습을 되찾고 있다. 교태전(交泰殿)은 경복궁에 있는 왕비의 침전으로 정면 9칸, 측면 4칸으로 중앙 3칸이 대청이고 좌우 2칸씩은 온돌방이며 그 외 공간은 툇마루, 누, 방 등으로 이루어졌다. 교태전은 1394년에 경복궁의 역사와 더불어 창건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되었고 명종 10년(1555)에 다시 지었으나 이것 역시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교태전은 1917년에 불타 없어진 창덕궁 대조전을 짓는다는 구실 아래, 1920년 일본인들에 의해 헐려 대조전의 부재로 사용되었다. 이후 1996년 강녕전과 함께 복원되었다.
경복궁 교태전의 누마루로 향하는 문의 창살로 연덩굴을 더하여 장식하였다. 두 개의 덩굴은 뻗어 올라가는 모습이며 창살의 끝부분에서 교차하여 꽃과 같은 모습을 이루고 있다.
공공누리 제 1유형 마크 - 출처 표시

한국문화정보원이 창작한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예) 본 저작물은 "문화포털" 에서 서비스 되는 전통문양을 활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