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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PD]<독립운동가, 그들의 발걸음 서울에서 만나다> 두 번째 이야기 '도산 안창호'

제작
송지훈
재생시간
NaN:NaN
등록일
2022-11-23
[대본]
[타이틀]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평생을 몸 바친 도산 안창호 선생.
안창호 선생의 삶이 보여준 정신을 본받아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고자 도산공원이 조성되었고,
공원 내부에 도산 안창호 기념관이 건립 되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 도산공원을 거닐며
자주와 독립을 위하여 그가 바친 위대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한다.
 
독립, 그 이상의 미래를 꿈꾸다 - ‘도산 안창호
 
[본문]
 
1878년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이 태어났다.
그가 열여섯 살 때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당시 평양에서 전투가 벌어져 주민들이 피난하고 가옥들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때 도산은 우리 민족의 불행이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도산은 19세 때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결성하였고,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첫 연설을 함으로써 탁월한 웅변가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도산이 독자적인 사회세력을 결집하여 주도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은
미주의 교민사회에서 공립협회를 만든 다음부터였다.
 
1902년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그곳 동포들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공부를 포기하고 교민지도에 나서게 된다.
그리하여 초창기 미국 교민사회에서 대중적 지도자로서 성장해 공립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공립협회는 2년 미만의 단기간에 600명의 회원을 모으고,
3층 건물을 회관으로 가졌으며, 매월 두 차례 공립신보를 발간해
매우 힘있는 단체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도산이 미국에 있던 5년 동안 국내정세는 날로 위기가 깊어지고 있었다.
도산은 본격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07년 초 귀국 길에 올랐다.
이 때 그의 가슴 속에는 이미 국내에서 전개할 구국운동의 새로운 목표와 방법론, 조직형태가 그려져 있었다.
귀국 즉시 도산은 국내 계몽운동의 핵심인물들을 찾았다.
그는 새로운 구상을 설명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일에 착수하고,
한말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총지휘했던 신민회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도산은 신민회를 중심으로 교육ㆍ언론ㆍ산업 등 여러 부문에 걸쳐 다양한 사업들을 벌이게 하였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할 때까지, 3년간 그가 주도했던 신민회운동은
비록 나라를 지키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일제하의 독립운동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19105월 통합 교민단체로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었다.
이는 해외의 전교민이 도산을 대표자로 하여 하나의 조직 속에 결집한 셈이었다.
국내가 일제의 지배하에 들어간 상황에서 도산은 해외에 사는 교민들이 현실적인 독립 운동의 기반이라고 생각하여 해외 한인의 총단결을 가장 우선적인 과제로 여겼다.
해외 한인의 대동단결이라는 과제를 일단 해결한 도산은 다음 해인 1913년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흥사단은 민족운동의 간부를 양성하려는 목적에서 만든 훈련단체로 미국에 본부를 두었다.
 
1918년 국제 정세 속 독립운동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었다.
이듬해 31운동 소식을 접한 도산은 독립운동에 착수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고,
국민회의 대표 자격으로 중국에 건너갔다.
도산은 국무총리 대리를 겸하면서, 임시정부의 실체를 갖추는 데 전력을 쏟았다.
국민회에서 가져온 자금으로 정부청사를 얻고 각료로 추대된 각지의 인물들을 불러 모았으며 독립신문 발간과 독립운동 방략 작성을 주도했다.
임정을 권위 있는 최고 지도기관으로 만들어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대비하고자
서울의 임시정부와의 통합을 추진하였고, 노력 끝에 결국 통합을 이루어냈다.
이승만 대통령까지 합류함으로써, 임정은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면모를 갖추었지만
임시정부 내 갈등이 심각해졌고, 임정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임정을 사퇴하고 국민대표회 개최를 위해 노력했다.
 
19265월 말 다시 상해로 간 도산은 좌우 합작의 대독립당운동에 앞장섰다.
산발적으로 논의되는 데 그치고 있던 좌우합작문제를 본격적인 실천운동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도산이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도산은 기회가 오고 있다고 판단하여 반일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윤봉길 의거의 여파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오게 되었다.
도산은 4년 반에 걸친 두 차례의 감옥 생활 끝에 얻은 병이 악화되어
1938310일 만 594개월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옥중심문에서 일본 관헌에게 도산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 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독립 운동가이자 겨레의 큰 스승 도산 안창호 선생.
무실역행을 몸소 실천한 그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
그 위대한 정신을 마음속 깊이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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