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문화포털

화면크기
100%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처용가(處容歌)

작품소개
<처용가>는 <삼국유사> 권2 처용랑 망해사조에 수록되어 있는 8구체 향가이다. 용의 아들인 처용이 헌강왕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 왕의 정치를 보좌하던 중 헌강왕 5년(879)에 역신(疫神)이 자신의 아내를 범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역신을 물리치며 불렀다는 배경설화와 함께 전해지는 노래이다. 역신을 물리친 이야기에서 <처용가>에 제의(祭儀)적인 성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
처용(處容) 배경설화에 따르면 용의 아들로 헌강왕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 왕의 정치를 보좌하였다고 되어 있다. 연구자에 따라 이슬람 상인이나 지방 호족, 화랑 또는 무당으로 보기도 한다.
양주동 해독
서울 밝은 달에 밤 늦게 노니다가 들어서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이요 본디는 내 것이다마는 앗은 것을 어찌할꼬
김완진 해독
東京 밝은 달에 담들이 노니다가 들어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러라 둘은 내해였고 둘은 누구핸고 본디 내해다마는 빼앗은 것을 어찌하리오 (참고) <고가연구>, 양주동, 일조각, 1980 <향가해독법연구>, 김완진, 서울대출판부, 1980
배경설화
제49대 헌강대왕 때에 서울에서 바다까지 집들이 즐비하고 담장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다. 길가에는 노랫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비바람이 사계절 동안 조화롭게 불었다. 이때 대왕이 개운포-학성의 서남쪽에 있으며 지금의 울주-로 순유(巡遊)를 나갔다. 왕이 장차 어가(御駕)를 돌려 돌아가는 길에 바닷가에서 낮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껴 어둡고 가려져서 길을 잃었다. 괴이하게 여겨 좌우에 물으니 일관이 아뢰어 말하기를 “이는 동해룡의 변신입니다. 마땅히 승사를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용을 위하여 일을 일으켜 근처에 절을 창건하라고 조서를 내렸다. 시행령이 떨어지자 구름이 열리고 안개가 흩어졌다. 이로 인하여 개운포라고 이름하였다. 동해룡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어가 앞에 모습을 나타내고는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그 중 한 아들이 어가를 따라 서울로 들어가 왕이 정사를 돌보는 것을 보좌하였다. 이름은 처용이었으며, 왕이 미녀로 처를 삼아 그 뜻을 붙잡아두고자 하여 급간 벼슬까지 하사하였다. 그 처가 심히 아름다워 역신이 그녀를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이르러 몰래 더불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들어와 침대에 두 명이 있는 것을 보고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노래는 ‘서울 밝은 달에, 밤 늦게 노니다가, 들어서야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이요, 본디는 내 것이다마는, 앗은 것을 어찌할꼬’ 그때 신이 형상을 드러내며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말하였다. “내가 아름다운 공의 처를 지금 범하였으나 공이 노함을 나타내지 않으니 그 아름다움에 감동하였습니다. 맹세컨대, 지금 이후로 공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보면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로 인하여 나라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얼굴을 붙여 벽사진경(僻邪進慶: 사악함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이함)으로 삼았다. 앞서 왕이 돌아갈 때 점을 쳐 영취산 동쪽 기슭 좋은 땅에 절을 두어 망해사 또는 신방사라 이름하였으니 곧 용을 위하여 둔 것이다. 또 포석정에 갔는데 남산신이 왕 앞에 나타났으나, 좌우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왕만 홀로 그를 보았다. 사람이 있어 왕의 앞에 춤을 추며 나타나니 왕이 스스로 춤을 추어 그의 형상을 보였다. 신의 이름을 혹은 상심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로 지금 나라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말하기를 어무상심, 혹은 어무산신 혹은 기신출무라고 한다. 그 모습을 본떠 공인에게 새기게 하여 뒷사람들에게 보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상심이라고 하고 혹은 상염무라고도 한다. 이는 곧 그 형상을 칭한 것이다. 또 왕이 금강령에 행차할 때 북악의 신이 춤을 추니 옥도명이라 이름하고, 또 동례전의 잔치에 지신이 춤을 추니 지백급간이라 이름하였다. 어법집에 이르기를 그때의 산신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하며 ‘지리다도파도파’라 한 것은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알고서 많이 도망을 갔다는 것과 도읍이 장차 깨질 것을 말함이다. 곧 지신, 산신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서 춤을 추어 경고하고자 한 것인데, 나라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운 일이 나타났다고 말하며 탐락함이 이처럼 심하니 그리하여 나라가 마침내 망한 것이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처용랑(處容郞) 망해사(望海寺)
해설
<처용가>는 일찍부터 국문학계의 관심을 끌어왔던 만큼 많은 연구결과와 다양한 관점에서의 해석이 시도되어 왔다. 먼저 처용과 <처용가>를 민속학적 관점에서는 처용을 무(巫)로, <처용가>를 제의(祭儀)에 사용되는 노래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처용이 노래와 춤으로써 역신(疫神: 돌림병)을 물리쳤다는 점이 역병이 돌았을 때 보여주는 무당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점과 처용의 얼굴을 그려 벽사진경(辟邪進慶)으로 삼았다는 점을 그 근거로 하고 있다. 처용을 실제의 역사적인 인물로 보는 관점이 있다. 고려의 기인(其人)제도와 같이 처용이 신라시대 지방 호족의 자제로 중앙정부에 머무르면서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견해와 문에 붙여놓았던 처용의 형상이 이슬람인과 같이 보인다는 점에 착안하여 신라시대에 울산만을 통해 들어온 이슬람 상인 중의 한 명이 바로 처용의 정체라고 추정하는 견해가 여기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 처용이 용의 아들 중 한 명이었다는 문면을 받아들여 처용의 정체가 불교적 호국호법의 용이라는 견해가 있으며, <삼국유사>를 살펴볼 때 랑(郞)이라는 수식어가 화랑에게만 붙여졌다는 점을 들어 처용랑 망해사 조의 처용 역시 그 정체가 화랑일 수밖에 없다는 견해도 있다. 이와 같이 처용의 정체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여 그 실제 모습을 단정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향가 <처용가>가 고려시대의 속요 <처용가>를 거쳐 조선시대에까지 비슷한 형태를 간직한 채 전해져 내려온 점을 통해 당대 사람들이 <처용가>에 주술(呪術)적인 힘이 있음을 믿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연계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
관련멀티미디어(전체0건)
이미지 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