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문의마을에 가서

작품명
문의마을에 가서
저자
고은(高銀)
구분
1970년대
저자
고은(高銀, 1933~) 본명은 은태(銀泰), 법명은 일초(一超). 1933년 4월 10일 전북 군산 출생. 군산중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아 휴학했다. 1952년 입산하여 효봉선사의 상좌가 된 이래 10여 년 동안 수선(修禪)과 방랑생활을 하다가 1962년 환속했다. 197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장, 민주회복국민회의 중앙위원,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민족예술인총연합회 의장 등을 역임했다. 1958년 시 <폐결핵>이 <현대시>에 추천을 받으며 문단에 등단한 이래 <피안감성>(1960), <신 언어의 마을>(1967)을 위시하여 많은 시집을 발간하였다. 그의 초기 시들은 허무의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생에 대한 절망을 노래하면서 허무의 정서에 젖어 있는 시적 자아의 형상에는 삶에 대한 의지나 집착보다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 심미적 탐닉의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시세계는 1970년대 중반에 발간된 <문의마을에 가서>(1974), <입산>(1977), <새벽길>(1978) 등을 통해서 변모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시적 자아는 자기 혐오나 허무감을 떨쳐버리고 역사와 현실 앞에 자기를 세우기 시작한다. 동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과 민중 중심의 역사관에 바탕을 둔 자기 인식을 통해 시인은 정의롭지 못한 현재에 대한 격렬한 투쟁의지를 노래한다. 대표작인 <화살>에서 잘 나타나듯이 투철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자기희생의 비극성과 전투성이 이 시기 시의 주조를 이룬다. 1980년대를 경험한 후 그의 시세계는 다시 한번 변모한다. 1990년대 이후에도 꾸준하게 시작활동을 하면서 <독도>(1995), <어느 기념비>(1997), <속삭임>(1998), <히말라야>(2000) 등의 시집을 간행하였다. 이 시기에 연작시 <만인보>(1987~1989)와 장시 <백두산>(1991~1994)이 창작되었는데, 이들 작품에서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현실의 다면성을 그려내고자 하는 시도가 두드러진다.
리뷰
1974년 민음사에서 간행된 고은의 다섯 번째 시집 <문의마을에 가서>는 사사적(私事的)인 세계를 주된 모티프로 하고 있는 초기 시들을 얼마간 극복하고 있다는 면에서 주목된다. 초기시에서부터 일관되어 온 허무와의 싸움은 이 시집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초월적인 시선으로 정리되고 있다. <문의마을에 가서>, <삶>, <눈물 한 방울>, <초추(初秋)> 등이 그 예로서, 여기서 고은은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삶>)와 같은 달관의 자세를 보여준다. <문의마을에 가서>는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경험을 시로 옮긴 것으로서, 고요하고 적막한 겨울 마을을 배경으로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순간의 깨달음을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이 초기시와 뚜렷하게 변화된 양상을 보이는 것은 지적인 체험 이외에 공동체와 더불어 있음에 대한 인식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종로>, <용인 절터에 가서>, <침묵에 대하여> 등에서 시인은 막연하나마 자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애정을 확인한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남한에서>, <성묘>, <두만강으로 부치는 편지> 등에서 남북의 분단과 그를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당위성 혹은 의무감은 “북한여인아 내가 콜레라로/ 그대의 살 속에 들어가/ 그대와 함께 죽어서/ 무덤 하나로 우리나라의 흙을 이루리라”(<남한에서>)에서처럼 생경하고 작위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시에서 시인은 ‘~하라’, ‘~구나’ 등의 어미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어투는 시인의 깨달음이 아직은 개인적인 감상이나 다짐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이 의미를 갖는 것은, 자기 이외의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인식을 드러냄으로써 이후에 쓰여질 민중시의 바탕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작가의 말
밤늦게 돌아오는 길에 별들을 본다. 그제서야 별들이 먼저 지상의 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어떤 비관론자와도 무관하다. 이 세상에는 다른 세상을 위한 종말이 있다. 이 세상은 수많은 흥망성쇠의 시간과 장소만이 아니라 마침내 흥망성쇠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다 해서 종말이 언제냐고 섣불리 따지려 들지 말라. 다만 그런 세상에서 엄연히 살아가는 것이 너와 나이다. 나의 문학은 이런 세상의 일부분이다. 왜 문학을 하는가? 왜 시를 쓰는가? 비 온 뒤의 앞산처럼 확실한 이런 질문으로 나는 문학을 하지 않는다. 그저 시인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밀물이었다. 그저 시인이 되었을 뿐이다. 썰물이었다. 시인 노릇 사십오 년이 어느덧 되어 가는 오늘에도 이 노릇에 대한 어떤 가설도 마련되지 않았다. 일의(一義)란 죽어라고 싫다. 굳이 말하자면 불가피성 말고는 내 삶의 궁핍한 역정 가운데서 문학의 이유를 찾아낼 다른 여지가 없는지 모른다. 풍경이 시작되었다. 1940년대 후반 중학생이 된 나는 사 킬로미터 거리의 학교와 집 사이 황톳길을 걸어다녔다. (……) 미술반은 자주 늦게 끝났으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저녁 무렵이기 십상이었다. 혼자 길을 걷는 동안 나는 학교와 집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런 시간으로 너무 일찍부터 낮 동안의 끝인 저녁에 익숙해졌다. 지나는 길의 마을마다 밥 짓는 저녁 냉갈이 저기압의 땅 위에 가득히 깔려 있을 때의 그 형언할 수 없는 경건한 향수는 한 소년에게 감수성의 근원이 되어 주었다. (……) 하루 내내 들에서 일한 다음 해가 진 뒤 연장을 물에 씻어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의 일과에 어느덧 나도 속해 있었다. 저녁은 그렇게 숭고하고 슬펐다. ‘돌아오다’ ‘돌아가다’라는 말이 나에게 달라붙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한자 ‘귀(歸)’자가 어쩌다 친정 나들이하는 여자의 기쁨을 담고 있다면 인간의 본성 안에 그런 귀향의 심상이 바닥져 있는 것 아닌가. 나중에 내가 쓴 시 중에 유난히 저녁이 많이 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시인들에게도 저녁은 하나의 주조(主調)였다. 그런 저녁 무렵 나는 꺼뭇꺼뭇한 어슬녘을 걷고 있었다. 집을 일 킬로미터쯤 남겨 놓은 길 한복판에서 한 물체를 발견했다. 그 우연이야말로 필연이었다. 그 물체는 마치 오랜 발광체처럼 팍 저물어버린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책이었다.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릴 겨를도 없이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새 책이었다. 시집이었다! 한하운(韓何蕓) 시집이었다! 온몸이 전류에 휘감겨졌다. 그 시집 속의 글자 하나하나를 어둠 속에서 뿌리째 뽑아내어 읽어 갔다. 돌부리에 넘어졌다가 일어났다. 아마도 누군가가 사 가지고 가다가 그만 길에 잘못 떨어뜨린 것이리라. 그 시집의 임자를 찾아 나설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시집은 오직 나를 위해서만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시집을 읽고 또 읽었다. 읽으면서 엉엉 울었다. “가도 가도 황톳길···.” 이 구절은 곧장 내 심장 속의 주술이 되어 주었다. 밤새 뜬 눈이었다. 조영암과 최영해라는 사람의 발문도 몇 번이나 읽었다. 먼 동이 텄다. 두 가지를 결심했다. 나도 한하운처럼 문둥병에 걸려야겠다는 것과, 나도 시인이 되어 이 세상의 모든 길을 걸어가며 떨어져 나간 썩은 발가락을 노래하고 이 세상의 길을 노래하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 시 혹은 문학은 반드시 그 시대의 어떤 상흔에서 그 의미를 이끌어낸다. 시인은 그러므로 상처받은 혼신(魂身)이다. 나에게 시는 전쟁 이전의 꿈과 전쟁 이후의 절실성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북위 38도선이 무너졌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6월 27일 학교는 무기휴교 조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걸핏하면 발생하던 단정(斷政) 반대의 좌익 동맹휴학도, 그 뒤를 이은 이승만 지지의 우익 결의대회도 사라져 버린 학교 운동장은 바람이 불면 먼지 구름이 몰려 가거나 하루 내내 뻐꾸기 소리만 쌓여 있었다. 더 이상 나에게는 호젓한 저녁길이 없었다. 여름 삼 개월 동안 내 또래의 인민군 병사와 인민위원회 그리고 민청, 여맹 따위의 붉은 완장에 익숙해졌다. 담배를 배웠다. 엽연초를 잘게 썰어 그것을 종이에 말아 피웠다. 전선은 낙동강 중류까지 남하했고 진주 남강도 떨어져 나갔다. 구월의 인천 상륙과 함께 거듭된 후퇴가 역전되어 압록강 강물을 떠오기까지 했다. 다시 일사후퇴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내 고향은 우익의 좌익 학살, 좌익의 우익 학살, 다시 우익의 좌익 학살의 보복으로 살벌한 죽음의 지역이었다. 한국전쟁 인명 희생자 삼백만 중 일만분의 일을 내 고향이 담당한 것이다. 몸에서 썩은 학살 시체 냄새가 십오 일 이상 없어지지 않은 채 살아남았다. 나는 여름 나무 그늘에서 읽었던 신석정(辛夕汀) 시집 <촛불>을 아주 덮어 버렸다. 시는 그 야만의 계절에 대해서 무능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가 가능한가”라고 외친 아도르노의 말은 한반도에도 적용되고 남았다. 한국시 오십 년대 후반 또는 육십 년대 전반의 모더니즘은 그것이 서구 모더니즘의 뒤늦은 모방이었음을 모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상황을 통한 전통 단절과도 깊이 관련된다. 요컨대 전쟁은 시를 묻어버렸고 역설적으로 다시 시를 불러들였다. 나는 널브러진 시체더미 앞에서 인간의 정체를 다 알아버린 듯한 허무에 사로잡혔으며, 고향을 떠난 뒤 내내 떠돌았던 모든 산야와 도시는 폐허에 다름 아니었다. 내 문학은 그런 폐허를 떠도는 자의 비가(悲歌)이기를 자처했다. 그래서 시의 본적지는 폐허이고 시의 현주소는 폐허의 기억을 가진 미완의 역사현장인 것이다. 세 살 무렵의 아이는 “왜?”로부터 세상을 시작한다. “왜 아빠의 젖은 젖이 안 나와?” “왜 엄마 구두하고 아빠 구두하고 달라?” 이런 의문이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짓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문학에서,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질문은 세 살 무렵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은 문학이 오늘에 있어야 할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힘은 해답에 있지 않고 치열한 질문에 있다. ‘나의 문학은 폐허로부터 시작했다’, 고은,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열화당, 2004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한국대표시인선 50>, 중앙일보사, 1995 <고은: 민족문학에의 길>, 송기한, 건국대학교출판부, 2003 <고은: 한국대표시인 101인선집>, 고은, 문학사상사, 2003 <고은을 찾아서>, 황지우 편, 버팀목, 1995 <고은 문학의 세계>, 신경림, 백낙청 공편, 창작과비평사, 1993 <고은 문학앨범>, 고은, 최원식, 김승희 공저, 웅진출판, 1993
관련멀티미디어(전체5건)
이미지 5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