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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작품명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저자
정진규(鄭鎭圭)
구분
1970년대
저자
정진규(鄭鎭圭, 1939~)1939년 10월 19일 경기도 안성 출생.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나팔서정>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시집 <마른 수수깡의 평화>(1966), <유한의 빗장>(1971),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1977), <비어있음의 충만을 위하여>(1983), <연필로 쓰기>(1984), <뼈에 대하여>(1986),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1990), <몸시>(1994), <알시>(1997) 등을 발간하였다. 한국시인협회상(1980), 월탄문학상(1985), 현대시학작품상(1987) 등을 수상하였다. 그의 초기 시는 화려하고 섬세한 언어적 수사와 자아의식의 심층에 대한 탐닉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같은 시적 추구는 시가 언어에 의해 씌어진다는 인식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그는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시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의 괴리를 경험하면서 심각한 내적 갈등을 겪는다. <시의 애매함에 대하여>나 <시의 정직함에 대하여>와 같은 시론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하지만 시적인 것에 대한 탐닉과 일상적인 삶의 건강성 사이의 평형이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이후, 그의 시는 산문을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개인의식에서 집단의식으로 이행하는 계기를 얻게 된다. 이러한 이행의 견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의 시는 자기확인의 과정을 담게 된다. <연필로 쓰기>에서는 시련을 견디는 연습이야말로 확고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시인이 반드시 치러야 할 통과제의임을 노래하고 있다. 그 통과제의를 지나 <뼈에 대하여>에 이르면 이승의 군더더기살을 버리고 마침내 뼈로만 남아 있으려는 정신적 극기의 자세를 담게 된다. <연필로 쓰기>와 <뼈에 대하여>는 유려한 산문시를 보여주는데, 이 산문의 형식이란 시인의 정신적 각성을 이끌어 가는 계기이며 깨달음의 도도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 삼십대의 나이로 접어든 정진규는 이렇게 하여 칠십 년대를 세상 쪽으로 트인 시의 길찾기로서 맞이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전환에 있어, 전환의 이론적 인식과 시적 실천의 행위는 그에게도 쉽사리 화해를 이루지 못한 듯하다. 그에게 있어 칠십 년대는 방향의 전환을 모색하는 멀고도 어려운 시적 실천의 길을 헤쳐 나가면서 보낸, 끊임없는 고향의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시집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1977)이 바로 칠십 년대의 그러한 고행과정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칠십 년대 중반까지(1972~1977)의 시편들을 담고 있는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는 몇 가지 점에서 이러한 시적 전환을 시도하는 자기시론의 실천의지를 실험하고 있다. 우선 거기에는, 예전에 없던 현실적 삶의 육화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다. 마침내 시의 ‘나’는 사사로운 개인적 내면세계로부터 ‘우리’를 향해 나아가면서 세계에의 관심을 우리네 삶의 역사성으로까지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향후 그의 길찾기에 중요한 형식적 통로로 등장하는 산문시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증대되고 있다. 모두 31편의 작품 가운데 산문시가 12편이나 차지하는, 갑작스러운 산문시의 증대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시성(詩性)에만 매달리려는 초기의 집착과 달리, 시성과 산문성의 조화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다. (……) 그러나 시에 유난히 결벽성을 보이는 그에게 그런 일이 어찌 쉽게 이루어질 수 있으랴. 시의 본질을 견지하려는 ‘시성’과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산문성’의 조화를 위해, 아마도 이 시기 그가 싸우며 안간힘한 시의 길찾기는 어느 때보다 험난하고 처절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생애를 통하여 가장 적은 수의 작품(6년 남짓 동안 30여 편)을 남길 수밖에 없었고, 시 세계 또한 초기의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막상 내면의 의식세계로부터 바깥의 현실세계로 걸어 나오기는 했지만, 나와서 던지는 시선은 여전히 현실적 삶의 세계가 아니라 그러한 사람에서 연유된 자아의 ‘의식’에 머물고 있었다. 그리하여 현실의 무게가 의식의 무게와 갈등을 일으키며 충돌함으로써, 현실의 날카로움과 자아의 개별성이 함께 무디어지는 정신적 격랑과 방황이 주조를 이룬다. 이는 곧 초기의 시세계가 역사나 현실의식과 부딪히면서 종국적으로 이르게 된 정신적 극점으로서, 또한 그러한 모순과 갈등이 그의 절창이라 일컫는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를 낳기도 했다. (……) 처음 시세계의 전환을 모색하던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에서 본격적으로 싹을 틔운 산문시에의 관심은, 깨달음 문제를 시적 실천의 중심과제로 삼기 시작한 <비어 있음의 충만>에 와서 반을 훨씬 웃도는 산문시(47편 가운데 30평)를 남길 만큼 급격히 증대된다. 그리하여 깨달음의 세계가 구체적인 골격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연필로 쓰기>와 <뼈에 대하여>에 이르면, 마침내 모든 작품을 산문시로만 쓰는 완전한 산문시에의 경도 현상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진규의 시에 있어 산문시는 깨달음의 선문(禪門)으로 들어서는 중심통로인 동시에, 깨달음을 엮어나가는 구체적 형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런 연유 때문에 그의 시에서 산문시 문제는 더욱 각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운율론적 관점에서 보면 정진규의 산문시는 특이한 위치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산문시는 행 구분을 하지 않으므로, 겉으로 보기에 전형적인 산문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리듬에 대한 배려가 주도면밀하므로, 산문체가 조성해낼 수 없는 유려한 리듬이 전체에 걸쳐 도도히 흐르고 있다. 그 도도함의 표면은 어느 하나로 묶어 말할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리듬이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그 심층에는 이들 다양한 리듬을 통어하면서 통일성을 부여해주는 일정한 율격장치를 흔히 숨기고 있다. 더욱이 율문체의 전형적인 문체적 특징으로 지적되는 반복과 병행법이 어휘와 통사의 차원 어디를 가리지 않고 빈번히 사용되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그의 산문시는 자유시가 조성해내는 율문체 리듬보다 오히려 더 유려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엄밀한 뜻에서 그의 산문시는 산문체라기보다 차라리 율문의 산문화라 할 만큼 율문적이고 시적인 것이다. (……) ‘깨달음의 공안(公案)을 지나고 있는 시의 길 30년’, 성기옥, <말씀의 춤을 위하여>, 미래사, 1991여기 정리된 시고(詩稿)는 <마른 수수깡의 평화>(1966)와 <유한의 빗장>(1971) 두 시집 이후의 것들이다. 시론 <시의 애매함에 대하여>(1969)와 그 속편인 <시의 정직함에 대하여>(1969)에서 보인 바와 같은 고뇌와 갈등의 내 시정신(詩精神)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소산들이다. 그 고뇌와 갈등은 다름아닌 시의 본질을 견지하려는 나의 투쟁이며, 혼탁의 역사적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나의 양심과의 만남이다. 이 두 개의 만남은 상반의 만남이다. 시성(詩性)과 산문성(散文性)의 만남이다. 때문에 나는 순간순간 경직된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본질만을 고집하는 경직성과 역사적 양심의 쪽에만 휘불리는 경직성, 그것은 어느 것도 성취해 낼 수 없는 실로 악성(惡性)의 방황이었다. 선택이 필요하다고 강요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지만, 이제 그 방황이 서서히 끝나가는 내 의식의 한 분수령에 내가 섰음을 예감한다. 무엇이 이 상반(相反)의 거리를 좁히었는가. 그 답은 내 작품에서 찾을 수 있을 따름이다. 의미 있는 어떠한 말로도 그것은 완벽한 정의를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시간, 왜인지 불가(佛家)의 저 <불립문자(不立文字)>란 말과 <불이문자(不離文字)>란 두 개의 말이 동시적으로 매우 훌륭하게 긍정되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회 있을 때 그를 내 시정신에 결부시킬 수 있는 산문적 개진에 충실코자 한다. 한 편의 충실한 시론(詩論)을 초할 수 있을 것이다. (……) 시집 세 권. 이것이 지금까지의 나의 전 재산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들판의 비인 집의 뜨락에 가득히 내리는 빗줄기, 그 엄청난 빗줄기들을 노박이로 맞고 있는 작은 나무 의자 하나 같기만 한 허전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몹시 부족하다. 그저 끝없는 정진이 있을 따름이다. (……) ‘후기’, 정진규,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역시 제 시의 정신이랄까 사유체계는 ‘시간 속의 우리 존재와 영원 속의 우리 존재’에 대한 추구와 자각이었겠지요. 그 기틀에서 만난 자연과 사물, 인간의 문제들을 시로 구체화했다고 생각됩니다. 이 기회에 내 시의 산문 형태에 대해서도 몇 마디 밝히고자 합니다. 제 경우 형식은 정신을 지배하고 정신은 언제나 형식을 지배하니까요. 1977년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로부터라고 할 수 있는 제 시의 산문양식은 단순한 방법적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혹은 필연적인 하나의 발생이었습니다. 내 삶의 체험과 인식의 변화가 동시적으로 자연스럽게 분만한 하나의 출생이었습니다. <몸詩>의 출생 직전 그 태동과도 맞물려 있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의식에서 집단의식으로의 이행과 그 두 개의 항이 하나로 만나는 총체의식이 곧 그 무렵의 내 정신이었고 그 회통의식이 곧 <몸시>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이에 걸맞는 형태로서 산문 양식이 나타난 것이지요. 행갈이 시로서는 만날 수 없는 그러한 양식이 지니는 새로운 리듬이 거기 있었습니다. 자아는 세계를 조명하고 세계는 자아를 조명하는 ‘드나듦’, 그것의 교류가 빚어내는 두께와 깊이, 그리고 무게를 지닌 흐름은 행갈이의 리듬이 아니었습니다. 산문 양식이 생체로서의 운동성을 싱싱하게 감지해 내었으며 훨씬 자유로웠습니다. 의미의 흐름, 이미지의 흐름을 그렇게 행갈이보다 자유롭게 호흡율로 구체화할 수 있었습니다. ‘인습적인 음율을 버리고 새로운 음악적 문장을 만들 것’ 이 명제는 시작 초기부터의 나의 꿈이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산문시를 조심스러워하던 김춘수 시인이 ‘외부 정경 묘사가 어느 사이 교묘하게 내면의 존재론적 어둠을 건드린다’고 그 인식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안과 밖이 하나로 만나는 혈관이 거기 흐르는 <몸시>에 대한 긍정론이었습니다. 거기 어리는 큰 나무 그늘 같은 이른바 음예(陰翳)의 실체를 읽어내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나의 산문 양식은 내 시정신과의 형태적 필연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 ‘정진규 시인과의 대담’, 정효구, <정진규의 시와 시론 연구>, 푸른사상, 2005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정진규의 시와 시론 연구>, 정효구, 푸른사상사, 2005 <한국현대대표시선 2>, 민영 외 편, 창작과비평사, 1992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정진규, 교학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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