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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무

작품명
농무
저자
신경림(申庚林)
구분
1970년대
저자
신경림(申庚林, 1936~) 1936년 4월 6일 충북 충주 출생.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1955년 <문학예술>에 <갈대>, <묘비>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이후 계속 침묵하다 1965년에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첫 시집 <농무>를 간행했고, 평론집 <한국 현대시의 이해> 등을 간행했다. 1974년 시집 <농무>로 만해문학상을 수상했고,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 1990년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농무>(1973), <새재>(1979), <달넘세>(1(85), <민요기행 1>(1985), <남한강>(1987), <가난한 사랑노래>(1988), <민요기행 2>(1989), <길>(1990), <갈대>(1996),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등이 있고, 평론집에 <한국 현대시의 이해>(1981),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3), <우리 시의 이해>(1986) 등이 있다. 신경림의 등단 작품인 <갈대>, <묘비> 등은 대상을 농민으로 한정하지 않고 인간 삶의 보편적인 쓸쓸함과 고적함을 주된 분위기로 하고 있다. 첫 시집인 <농무> 이후 신경림의 시는 농민의 삶의 현장을 그린 시로 일관되어 있지만, 등단초기의 서정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의 시는 농민의 고달픔을 다루면서도 항상 따뜻하고 잔잔한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감동을 준다. 그의 시는 여타의 노동시에 비해 강력한 울분이나 격렬한 항의, 개혁의 의지 등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이러한 특징은 신경림 시의 장점이자 한계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중간층의 독자를 확보하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하다. <새재> 이후에 쓰여진 <민요기행>, <남한강>, <길> 등의 시집은 우리 것에 대한 시인의 애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우리 민요와 지리 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 특히 장시집인 <남한강>은 농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 시도로서, 서사적인 스케일을 보여주는 방대한 작품이다.
리뷰
1973년 발간된 신경림의 첫 시집 <농무(農舞)>의 표제작. 이 시집으로 신경림은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시집에는 서정성과 농민의 삶에 대한 애착, 형식의 완결성 등 신경림의 특징이 모두 나타나 있다. 여기에 실린 40편은 모두가 농촌의 현실을 그린 것으로, 농민의 삶을 지배하는 뿌리깊은 아픔과 애환들을 담고 있다. 시인은 고집스럽게 농촌의 현실만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이는 민중의 뿌리가 흙에 있으며 농민이야말로 역사를 끌어가는 주인이라는 시인의 믿음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경림의 시에는 농민의 애환이 있고, 이를 추스리면서 살아가는 따뜻한 인정이 있다. 농민의 가난한 삶을 그래도 지탱하게 하는 것은 이웃들끼리의 정겨움과 공통된 서러움 때문이다. 이들 농민이 무조건 생활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갈 길>, <전야>, <그> 등의 시에서는 이들 민중들이 행동을 약속하는 결의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시집은 민중의 결의나 개혁 의지를 보여주기보다는 농촌의 삶의 현장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또, 대부분의 시들이 쉽고, 산문으로 읽혀도 될 만큼 자연스러운 리듬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이 시집의 특징이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농무>의 공간은 운동장과 소주집과 장거리와 쇠전, 도수장이다. 그러니까 이런 공간을 차례로 거쳐가는 농민들을 이 시는 아름답고도 슬프게 조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아름답고도 슬픈 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산문적 언어로 옮길 수 있다. 보름달이 뜬 어느 날 밤에 일단의 농민들은 학교 운동장에 임시로 설치한 무대에서 농악무를 선보인다. 이 농무가 끝난 뒤 이들은 공연 뒤의 피로와 허탈을 달래려고 소주집으로 몰려가 술을 마신다. 이때 이들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말을 토로한다. 그것의 핵심은 농촌에서 농사지으며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이런 말만 늘어놓을 수는 없어서 이들은 소주집을 나와 장거리로 나선다. 그러나 그 장터에서 이들을 반기는 것은 ‘악을 쓰는’, ‘조무래기들’과 ‘킬킬대는’, ‘처녀애들’뿐이다. 물론 그 조무래기들과 처녀애들의 형태에서 우리는 농민에 대한 조롱을 조금은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선가, 일군의 농민들 가운데 어떤 녀석은 홍명희의 <임꺽정>에 나오는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어떤 녀석은 그 소설의 등장인물인 서림이처럼 해해댄다. 그러고는 마침내 이들은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를 지어 무엇하느냐는 생각을 한다. 이 생각에 분노와 좌절이 담겨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지만 이런 생각은 급기야 그들의 발을 쇠전과 도수장으로 안내한다. 이곳에서 그들은 심기일전하여 다시 농무를 춘다. 그러자 이들은 그동안 잘 나지 않던 신명이 점점 나는 걸 비로소 체득한다. 이처럼 이 시는 농사라는 길고도 고된 노동을 마치고도 그 즐거움과 보람을 만끽하지 못하고 원통함과 분노와 좌절 속에 사는 우리 농민의 열악한 현실을 선연히 드러낸다. 이런 현실의 근원은 다 알다시피 근대화-산업화의 거센 물결이다. 이 물결로 농촌이 급속도로 분해되고 농민의 농촌 이탈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농무>는 바로 그런 물결로 가난과 절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농민과 소외된 농촌을 상기시키는 뛰어난 작품이다. ‘민요가락에 띄운 소외된 삶의 비애’, 김태현, <한국대표시인선 50>, 중앙일보사, 1995 신경림 씨의 시집 <농무> 초판이 나온 것은 1973년 초였다. 월간문학사 간행의 3백부 자비 출판이었다. (……) 이렇게 해서 태어난 <농무>가 그 뒤 20년 이상 한국 시의 한 흐름을 주도하며 독자들과 후배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리라고는 시인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 김수영이나 신동엽과 같은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60년대까지의 한국시를 지배한 것은 현실에서 벗어나 언어를 번롱(飜弄)하는 모더니즘의 그릇된 작품이었다. 다수 대중이 몸담고 살아가는 현실로부터 떠난 시는 당연히 그 현실의 주인인 대중들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고, 시와 현실, 시와 대중 사이의 괴리는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시집 <농무>의 새로움을 내용에 있어서 60년대 농촌의 곤핍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점. 그리고 형식에 있어서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어휘와 문장을 동원했다는 점으로 크게 구별된다. <한겨레신문>, 1996.8.9
작가의 말
(……) 내가 문학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동기는 사실 단순합니다. 그동안 나와 함께 책을 읽던 선배가 진보당 사건으로 잡혀들어갔어요. 죽산 조봉암 선생은1950년대에 우리나라 최초로 남북통일은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분입니다. (……) 참 합리적인 소린데 그런 소리를 했다고 해서 이 사람을 잡아다 죽였습니다. 이승만 정권 말기 때 일인데, 그 사건에 선배가 끌려들어갔어요. 나는 겁이 많은데다 당장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골로 도망을 갔지요. 시골로 도망갔다고 못 잡으러 올 리는 없지만, 일단 시골로 가면 마음은 편하지 않습니까? 박혀 살다 보니까 점점 문학에 대한 정열도 식고, 문학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회의도 생겼습니다. 나는 시골에서 여러 가지 고생도 해봤습니다. 광산에서 일도 해보고 노동판에도 가보고 농사도 지어보고 장사도 하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 보니 ‘과연 문학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따위의 갖가지 회의가 일었습니다. ‘일단 문학을 관둬버리자. 무얼 할 것인가는 다음에 생각하고 일단 관둬버리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의 십 년을 시골에 박혀서 살았습니다. 내가 그때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는, 지금도 그것만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개인이라는 게 중요하지요. 결국 마지막 책임은 자기가 지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남과 함께 살지 않는 삶이라는 건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지요. 정리하면 이렇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람은 남과 더불어 혼자 산다. 남과 더불어 살지만 결국 혼자 책임지니까 혼자산다. 말이 이상하겠지만 이 더불어 혼자 산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때 내가 막연하게 생각한 것은 앞으로 시를 쓸 기회가 다시 온다면 나는 이제 나 혼자만 사는 것, 나 혼자만의 생각, 혼자만의 뜻, 이런 것에만 매달리지 말고 더불어 사는 정서, 더불어 사는 어떤 아름다움, 더불어 사는 의미들을 시로써 표현해야 되겠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건 아니고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술을 좋아해서 주막에 들르면 일단 술 먼저 먹는 걸 생애 제일의 뜻으로 삼고 있을 때여서 잔뜩 취해서 잤습니다. 눈이 며칠 동안 퍼부어 길을 다닐 수가 없을 전도가 되어, 한 주막에서 사흘 동안 매일 술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 그 집주인이라는 사람은 남로당이라 총 맞아 죽었고, 여자가 혼자 술집을 하는데 농담을 잘하고 걸쭉한 소리를 잘했습니다. 매일같이 동무해서 술 먹고 그랬는데,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보니 눈이 다 그쳤어요. 울타리가 없는 시골 뒷간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하늘에 주먹만한 별들이 가득 달려 있어요. 한참 밑에는 공사장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공사장에서 불빛이 비쳐요. 마음이 얼마나 슬픈지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필기도구를 안 가지고 다녔으니까 일단 속으로 시를 썼지요. 그것을 나중에 조금 정리해서 발표한 게 <눈길>이라는 시입니다. 말하자면 시를 쓰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십 년 동안에 쓴 시가 그거하고 <그날>이라는 시입니다. <그날>은 조봉암 선생이 사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절망적인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집 <농무> 속의 작품들은 거의 서울에서 썼지만 머릿속에는 메모가 되어 있었던 셈입니다. 메모가 되어 있던 것을 서울에 와서 옮겨놨을 뿐이지요. <농무>를 두고서 어떤 이들은 농민의 저항 의식 등을 쓴 거라고만 생각합니다만, 나는 그런 게 아니고 농촌에 살면서 농민들이 갖는 어떤 농촌적인 정서, 개인적인 문제만이 아닌 더불어 사는 삶, 남과 함께 하는 삶……. 이런 것들을 시로써 한번 표현해보고자 했던 거지요. 내가 첫 번째로 얘기한 것은 시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하는 대화라는 겁니다. 따라서 명확하고 힘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삶이라는 건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니까 더불어 사는 삶, 이것이 내게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는 애기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삶이라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요. 결국 책임은 자기한테 있는 거니까. 혼자 생각하는 만큼 혼자 책임지는 것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겠지만, 나 혼자의 생각만 시로 다 표현한다면 시가 너무 왜소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그때 했던 것 같습니다. 또 앞으로 내가 시를 쓸 기회가 생긴다면 더불어 사는 삶 쪽에 역점을 두는 시를 쓰겠다고 하는 생각도 그때 했던 것 같습니다. (……) ‘생명력 있는 시를 쓰려면’, 신경림, <나의 문학 이야기>, 문학동네, 2001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한국대표시인선 50>, 중앙일보사, 1995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 공광규, 푸른사상사, 2005 <신경림>, 신경림, 돌베개, 2004 <신경림 시전집>, 신경림, 창비, 2004 <우리시대의 시인 신경림을 찾아서>, 신경림 외, 웅진닷컴, 2002 <가짜의 진실, 그 환상: 세기말 문학의 창>, 김주연, 문학과지성사, 1998 <신경림 문학의 세계>, 구중서, 백낙청, 염무웅 공편, 창작과비평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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