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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작품명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저자
황동규(黃東奎)
구분
1970년대
저자
황동규(黃東奎, 1938~) 1938년 4월 9일 서울출생. 서울대 영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58년 <현대문학>에서 시 <시월>, <즐거운 편지> 등으로 추천받아 문단에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1961), <비가>(1965),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악어를 조심하라고?>(1986), <몰운대행>(1991), <미시령 큰바람>(1993), <외계인>(1997), <버클리풍의 사랑노래>(2000) 등이 있으며, <사랑의 뿌리>(1976), <겨울의 노래>(1979), <나의 시의 빛과 그늘>(1994) 등의 산문집이 있다. 1998년 <황동규 시 전집>이 간행되었다. 그의 시세계는 초기 서정시편에서 출발하여 <비가> 연작시를 거치면서 심화되고, 1970년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겨울의 빛>을 거치며 극서정시로 나아가고, 여기서 다시 선시풍의 연작시 <풍장>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초기시 <시월>이나 <즐거운 편지> 등은 그리움과 기다림이 담긴 적막하고 쓸쓸한 내면풍경을 담은 시이면서 시인의 남다른 개성이 엿보이는 시이다. 그는 <비가>를 통해 우울한 내면세계의 묘사에서 현실의 고뇌를 껴안으려는 정열을 드러낸다. 나아가 그는 현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고통스러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시적 주제로 삼는다. <태평가>를 비롯해 <삼남에 내리는 눈>, <열하일기>는 이러한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감정을 통어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반어적 울림으로 드러난 경우이다. 시적 대상에 대한 거리유지는 그가 현실에 함몰되지 않도록 하는 방어기제이자 시적 긴장을 유지시키는 근원적 힘이라고 여겨진다. 일그러졌거나 위악적인 자아의 모습은 사회구조에 대한 시적 거부의 의미를 지니며, 파편화되고 공포에 질린 모습은 부조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시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읽히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시대를 살아가는 아픔이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의 전편을 휘감고 있다면 <겨울의 빛>은 그의 시가 합치되고 또한 분기되는 갈림길이다. 초기 시의 눈과 겨울의 이미지들이 시인 혼자만의 것이었다면 <겨울의 빛>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풍장> 연작시에서는 삶과 죽음을 하나로 감싸안으며 허무주의를 초극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죽음에 대한 반추로써 삶의 무게를 덜고, 나아가 죽음조차 길들이겠다는 의지의 자유분방한 표현이 등장한다. 황동규의 시적 어법은 <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에 이르러 더욱 유연함을 얻는데, 이 시가 드러내는 일상적이고 자유분방한 시적 짜임새는 주체적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담고 있다. 가볍다는 것에서 자유로움을 얻고, 그 자유로움으로써 속박을 벗어나는 시적 깨달음은 초기시의 현실과 자아 사이의 내적 갈등을 담은 비극적 아름다움의 세계를 거쳐 다져진 원숙함이다.
리뷰
이 작품은 1978년에 펴낸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의 표제작이다. 여기에서는 이미 꽉 막힌 정치 체제에서 비롯된 막연한 피해 의식이나 피동적 자학의 몸짓은 찾아보기 어렵고 구체적 삶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이 시집에서 황동규는 감각의 싱싱함을 과시하고 있는 이미지들을 통해 일상적 삶의 구체를 포착해낸다. 굴러가야 할 바퀴처럼 삶의 세계도 당연히 굴러가야 함을 강조하며 시대적 아픔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담고 있다.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황동규의 시는 거듭남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선 시인 스스로가 ‘극서정시’라고 명명한 작품들의 미적 구조에 관련된 문제이지만, 보다 넓은 문맥에서 말한다면 그의 시작 과정 전체가 끊임없는 자기갱신의 도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사물과 세계를 보는 시적 지각을 끊임없이 새롭게 함으로써 재래적인 한국 현대시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시로부터 간단없는 ‘낯설게 하기’를 실천한다. 그의 초기시의 하나인 <조그만 사랑노래>를 읽어보자. ‘사랑노래’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 시는 연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연시는 대개 실연의 상처를 노래하거나 사랑의 대상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한다. 이 시 역시 실연에 관한 시이다. 재래적인 실연의 시들은 임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자의 고독과 상처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았는가가 분명하지 않다. 단지 실연이라는 상황에 두 사람이 모두 연루되어 있음이 암시될 뿐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어제를 동여맨 편지’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편지는 두 사람의 행복했던 어제와 내일을 단절시키는 편지일 것이다. 그 어제의 사라짐과 함께, 길과 길 아닌 것, 그러니까 어제의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어제의 사라짐은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있다’는 이미지와 연관된다. 돌이 어린 날의 어떤 절실한 추억과 관련된다면, 그것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있는’ 상태는 그 추억이 더 이상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얼굴일 수 없다는 것이다. ‘깨어진 금’은 바로 이러한 깨어진 추억의 자리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이 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미지는 ‘성긴 눈’이다. 황동규의 시에서 눈은 차가움의 성격보다는 따뜻함과 정화의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성긴 눈은 그러한 따뜻한 눈에 대한 결핍으로서의 눈이다. 그 결핍의 눈은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며 떨고 한없이 떠다니는’데, 바로 그것이야말로 이 시에서의 사랑의 운명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에서의 사랑의 주체와 대상은 모두 ‘성긴 눈’의 운명을 함께 살 수밖에 없다. 시의 구조 내에서의 존재전환의 경험이 드러나는 시를 그는 ‘극서정시’라고 부르는데 <오미자술>은 이것의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다. <오미자술>은 오미자술을 담근 경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경험이란 아주 일상적인 것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상표들은 시언어로서는 매우 낯선 것들이지만, 경험의 구체성을 환기시키는 데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이때 구체성이란 산문적인 구체성이 아니라 시적인 의미작용 안에서의 구체성이다. 이 시의 오미자술이 익는 과정에서는 두 가지 존재의 전환이 경험된다. 우선 하나는 오미자술의 익음이다. 술은 물과 불이 결합된 존재로서 파괴와 생성의 양면성을 가지며, 발효의 과정이란 존재의 성숙의 한 상징일 수 있다. 오미자술이 익는 과정은 설악산 오미자와 막소주가 상호침투하여 상호변화를 이루는 과정이다. 그것은 소주의 분자구조가 바뀌는 사물의 질적 변화이다. 이러한 사물의 질적 변화는 시적 자아의 내적 변화의 한 계기가 된다. ‘나’ 역시 술 분자처럼 ‘부서지기로 마음먹게’ 되고, ‘욕을 해야 할 친구’에게 전화 걸기 전에 ‘환해진다’. 시적 자아의 내면이 환해지는 경험이란 결국 오미자술이 익는 과정과 겹쳐진다. 이러한 내적 변화란 소주의 상표이름을 나타내는 것처럼 매우 사소한 것이지만, 그 사소함을 사랑하고 그 사소함에서 시적 진실을 읽어내는 것이 시인이다. 그 사소한 마음의 변화는 존재의 전환이라는 계기를 담고 있다. (……) 황동규 시인의 <풍장> 연작은 죽음에 관한 시이면서 동시에 삶의 황홀에 관한 시이다. 죽음이 없다면 삶의 황홀에 대한 감각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는 죽음을 사고하지 않을 수 없다. 위의 시 역시 죽음에 관련된 시이다. 하루살이는 가장 짧은 삶을 사는 생명이기 때문에, 죽음을 마주한 삶, 혹은 죽음을 품은 삶이라는 존재의 운명을 첨예하게 보여줄 수 있다. 하루살이들은 하루의 삶만을 누리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 그들에게 잠이란 죽음의 동의어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시에서 하루살이의 죽음을 보지 않고, 그것들의 잠을 본다. 이때 그것들의 잠이란 단지 소멸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한 접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의 2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하루살이의 잠이란 곧 시적 자아의 잠이다. 그 잠은 유년의 절실한 추억을 빨아들이는 ‘수면’과도 같은 영원의 잠이다. 수면의 이미지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그 잠에는 한 생애 전체가 비추어진다. 이때 시적 자아는 생명의 정지로서의 죽음의 굴레를 벗고 순간으로부터 영원을 사는 존재 전환의 계기를 얻게 된다. ‘끊임없이 ‘낯설게 하기’와 존재의 거듭남’, 이광호, <한국대표시인선 50>, 중앙일보사, 1995
작가의 말
이 시집을 뚫고 흐르는 모티프가 있다면 정열과 부끄러움일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부끄러움에서 나는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했고 정열에서 살아 가는 일의 살 만함을 깨닫곤 했다. 제3부는 삼인시집 <평균율 2> 직후의 작품으로 그 중 몇 편은 시선집 <삼남에 내리는 눈>에 수록되어 있다. 제1부는 그 이후의 작품들이고 그 속에서 <사랑의 뿌리>를 중심으로 6개월간의 작품을 따로 모아 제2부로 묶었다. 부끄러움과 정열이 더 큰 곳에서 확산되기를 빌 뿐이다. ‘자서’, 황동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문학과지성사, 1978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한국대표시인선 50>, 중앙일보사, 1995 <움직이는 부재>,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2001 <시어의 풍경>, 김명인, 고려대학교출판부, 2000 <황동규 시전집 1>, 황동규, 문학과지성사, 1998 <황동규 깊이 읽기>, 하응백 편저, 문학과지성사, 1998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근대성과 일상성>, 조영복, 다운샘,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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