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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중심지면서 옛 모습을 간직한 한옥들이 많아 데이트코스로 유명한 서촌, 가끔 가는 곳이지만 유명 맛집들이 즐비한 곳만 즐기는 것이 아닌 일제에 억압받던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서촌에서 과거여행을 하고자 한다.
---------------- 대본 -----------------------------------------------------
경복궁 옆 서쪽 마을이란 의미로 불리게 된 서촌, 인왕산 경관을 이루고 있는 한옥마을을 비롯하여 옛것의 멋이 있는 동네이자 요즘 데이트 코스로 많이 오는 핫플레이스이다.
서촌의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때 왕족들이 삶을 꾸려나갔고 사대부들의 터전이었다.
조선말에는 중인들도 들어와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면서 계층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동네였다.
그러나 20세기 초 매국노들이 이곳에 들어와 살게 되는데...
나라가 망하니 서촌은 역적들의 땅으로 커져갔고 아직도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중 서촌 일대에 가장 큰 부를 축적했었던 친일파의 동네 옥인동으로 여행을 하려고 한다.
서촌 옥인동에는 이완용 보다 더 악랄하여 일완용이라고 불리는 매국노 윤덕영이 빠질 수 없다.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인 윤택영의 형으로, 조카가 황태자비가 되면서 힘을 입어 여러 차례 벼슬을 하고 친일하는데 앞장섰다.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순종이 한일 합방조약에 날인을 강요받는 순간, 보다 못한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치마 속에 감췄는데 감히 황비의 치마에 손을 못 대던 신하들 사이에서 윤덕영이 뛰쳐나와 옥새를 빼앗아서 이완용에게 넘겼다.
나라를 팔아넘긴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귀족 작위와 은사금을 받게 되고 그 돈으로 옥인동 절반 이상의 땅을 매입하여 자신만의 왕국을 만든다. 당시 약 19,000평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그곳에 자신의 호를 붙여 만든 벽수산장이라는 별장을 짓게 된다.
800평 규모의 프랑스 건축 모형으로 당시 조선에서 개인 건물 중 가장 큰 건물이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인왕산 중턱에 생뚱맞은 유럽풍 저택이 들어서 있고 주변은 모두 초가집으로 되어 있는 언벨런스한 모습을 보인다.
왕이 사는 경복궁을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집을 짓는 것은 조선의 건축 이념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고 지나다니는 백성들은 조선의 아방궁이라고 불렸다. 여러 부정적인 시선 때문에 마음 편할 리 없는 윤덕영 자신은 이곳에서 살지 못하고 뒤에 있는 한옥 저택에서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벽수산장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출입구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 기둥과 돌은 100년가량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악덕한 마음으로 집을 지어서 그런지 벽수산장의 운명은 꼬이기만 했다.
1940년에 윤덕영이 죽고 양자가 상속받았지만 미쓰이광산주식회사에 이 집을 팔아넘긴다.
해방 후 적산가옥으로 분류되다 6.25 때 잠깐 북한의 정부청사로 쓰이고 그 후 언커크의 청사로 쓰이게 된다. 1966년 언커크 화재로 건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게 되고 몇 년 후 도로정비 사업이 시작되면서 건물은 완전히 철거된다.
화재 후 벽수산장의 돌이 마구 흩어졌는지 옥인동 일대를 돌아다니면 각 집마다 벽수산장에 쓰였던 돌들이 주춧돌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근방에 윤덕영이 첩에게 지어준 대지 160평의 넓은 한옥이 있다.
앞 계단 통로만 보아도 벽수산장에 쓰였던 것과 비슷한 고급 진 돌들로 장식되어 있다.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지금은 무척 노쇠해있지만 평범하지 않은 처마 구조와 고급 소재인 유리창을 쓴 것을 보면 그 당시 호화로운 한옥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이 집을 남산한옥마을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취소되었고 지금 그곳에는 이집 그대로 본떠서 지은 집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 양옥집은 윤덕영이 딸의 결혼을 기념해 지어준 집으로 뒷마당에는 벽수산장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높은 벽들로 막아져있어 알 수 없지만 주변 전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6.25 전쟁 후 폐허가 되는 집을 동양화의 대가 박노수 화백이 1973년에 구입해서 살게 된다. 2011년에 자신의 작품들과 함께 이 집을 종로구에 기증하였고 지금은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촌은 조선말 문화예술인들의 동네로 알려져 있고 곳곳에 그들의 집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만 그 문인들 사이에서도 언급하지 않은 변절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역사란 자랑스러운 것뿐만 아니라 치욕적인 사건들도 가치가 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 계기가 되기에 감추는 것이 아닌
많이 알려져야 하고 몰랐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그냥 지나쳤던 동네가 새로운 여행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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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옆 서쪽 마을이란 의미로 불리게 된 서촌, 인왕산 경관을 이루고 있는 한옥마을을 비롯하여 옛것의 멋이 있는 동네이자 요즘 데이트 코스로 많이 오는 핫플레이스이다.
서촌의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때 왕족들이 삶을 꾸려나갔고 사대부들의 터전이었다.
조선말에는 중인들도 들어와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면서 계층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동네였다.
그러나 20세기 초 매국노들이 이곳에 들어와 살게 되는데...
나라가 망하니 서촌은 역적들의 땅으로 커져갔고 아직도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중 서촌 일대에 가장 큰 부를 축적했었던 친일파의 동네 옥인동으로 여행을 하려고 한다.
서촌 옥인동에는 이완용 보다 더 악랄하여 일완용이라고 불리는 매국노 윤덕영이 빠질 수 없다. 순정효황후의 아버지인 윤택영의 형으로, 조카가 황태자비가 되면서 힘을 입어 여러 차례 벼슬을 하고 친일하는데 앞장섰다.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순종이 한일 합방조약에 날인을 강요받는 순간, 보다 못한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치마 속에 감췄는데 감히 황비의 치마에 손을 못 대던 신하들 사이에서 윤덕영이 뛰쳐나와 옥새를 빼앗아서 이완용에게 넘겼다.
나라를 팔아넘긴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귀족 작위와 은사금을 받게 되고 그 돈으로 옥인동 절반 이상의 땅을 매입하여 자신만의 왕국을 만든다. 당시 약 19,000평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그곳에 자신의 호를 붙여 만든 벽수산장이라는 별장을 짓게 된다.
800평 규모의 프랑스 건축 모형으로 당시 조선에서 개인 건물 중 가장 큰 건물이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인왕산 중턱에 생뚱맞은 유럽풍 저택이 들어서 있고 주변은 모두 초가집으로 되어 있는 언벨런스한 모습을 보인다.
왕이 사는 경복궁을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집을 짓는 것은 조선의 건축 이념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고 지나다니는 백성들은 조선의 아방궁이라고 불렸다. 여러 부정적인 시선 때문에 마음 편할 리 없는 윤덕영 자신은 이곳에서 살지 못하고 뒤에 있는 한옥 저택에서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벽수산장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출입구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 기둥과 돌은 100년가량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악덕한 마음으로 집을 지어서 그런지 벽수산장의 운명은 꼬이기만 했다.
1940년에 윤덕영이 죽고 양자가 상속받았지만 미쓰이광산주식회사에 이 집을 팔아넘긴다.
해방 후 적산가옥으로 분류되다 6.25 때 잠깐 북한의 정부청사로 쓰이고 그 후 언커크의 청사로 쓰이게 된다. 1966년 언커크 화재로 건물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게 되고 몇 년 후 도로정비 사업이 시작되면서 건물은 완전히 철거된다.
화재 후 벽수산장의 돌이 마구 흩어졌는지 옥인동 일대를 돌아다니면 각 집마다 벽수산장에 쓰였던 돌들이 주춧돌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근방에 윤덕영이 첩에게 지어준 대지 160평의 넓은 한옥이 있다.
앞 계단 통로만 보아도 벽수산장에 쓰였던 것과 비슷한 고급 진 돌들로 장식되어 있다.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지금은 무척 노쇠해있지만 평범하지 않은 처마 구조와 고급 소재인 유리창을 쓴 것을 보면 그 당시 호화로운 한옥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이 집을 남산한옥마을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상태가 좋지 않아 취소되었고 지금 그곳에는 이집 그대로 본떠서 지은 집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 양옥집은 윤덕영이 딸의 결혼을 기념해 지어준 집으로 뒷마당에는 벽수산장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높은 벽들로 막아져있어 알 수 없지만 주변 전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6.25 전쟁 후 폐허가 되는 집을 동양화의 대가 박노수 화백이 1973년에 구입해서 살게 된다. 2011년에 자신의 작품들과 함께 이 집을 종로구에 기증하였고 지금은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촌은 조선말 문화예술인들의 동네로 알려져 있고 곳곳에 그들의 집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만 그 문인들 사이에서도 언급하지 않은 변절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역사란 자랑스러운 것뿐만 아니라 치욕적인 사건들도 가치가 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 계기가 되기에 감추는 것이 아닌
많이 알려져야 하고 몰랐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그냥 지나쳤던 동네가 새로운 여행지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