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상문화포털의 크리에이터 문화PD의 영상을 소개합니다
"구로공단 역사이야기"
지금은 디지털단지로 변했지만 과거 대한민국 제1 수출단지 였던 구로공단의 역사 여행을 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의 어려웠던 시절 경제성장의 배경에는 수출산업의 역할이 컸지만 그 이유는 공단 노동자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나이에 공단에 취직해 저렴한 인건비, 열악한 공장환경 속 장시간 노동했던 그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감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대본 ----------
#인트로
안녕하세요. 구로공단에서 여공으로 일했던 경숙입니다. 지금 타임머신을 타고 2020년 구로공단으로 왔는데요 제가 일했던 곳이자 제가 거주지였던 가리봉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아 여기는 구로디지털단지 역인데요 과거에는‘구로공단’역 이었구요 2000년도에 여기가 디지털단지로 변화하면서 역 이름도 개명된 것입니다.
#본문 및 자막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걸어오면 바로 한국산업단지공단이 있어요. 여기에 보면 기념동상이 있는데요 당시 구로공단의 노동자를 상징하는 수출의 여인상입니다. 손에는 횃불과 실타래를 손에 들고 있는데 원본은 아니고 다시 복원된 것입니다.
지금은 구로디지털단지에는 유리벽으로 된 건물들이 엄청나게 많지만 예전에는 모두 2~3층 높이의 공장들이었어요. 제1수출단지인 만큼 대규모로 형성된 단지였는데요 주변에 가리봉전자, 싸니전자, 동남전자주식회사 등 대한민국의 유명 전자회사들은 밀집했었다고 보면 돼요. 저는 싸니전자에서 라디오 앰프를 만드는 여공으로 일했었는데요 그때 당시 월급이 만원대였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제가 사는 집도 변변치 못한 곳에서 살았는데요. 그러면 저희 집이 있는 가리봉으로 건너가보겠습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 제가 어렸을 때는 공장에서 카페인 보충할 수 있는 아메리카노가 없었어요. 그래서 타이밍이라는 각성제 먹으면서 일했거든요. 근데 각성제를 너무 많이 먹고 일해서 한 번은 커피가 세 시간째 멈추지 않았어요. 그만큼 우리가...
여기가 제가 살던 가리봉동이에요. 지금 아직 여기에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소리를 조그마하게 말할게요. 이렇게 보시면 구로디지털단지는 변했지만 그에 비해 가리봉은 변한 게 딱히 없어요. 겉으로 보기엔 단독주택이 엄청나게 많지만 사실은 1~2평수의 각 방들이 30~40개씩 있습니다. 이방을 쪽방이자 가리봉 벌집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가리봉에는 아직도 벌집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어요. 제가 살 때 벌집 월세가 당시 2만 원이었어요. 제 월급보다 많아서 당시 1~2평방을 4명에서 나눠썼던 기억이 나네요. 서로 교대 근무하면서 쭈그리고 잤었는데요. 공단이 디지털단지가 되면서 여공들은 떠났지만 아직도 벌집이 존재하는 이유는 코리안드림을 안고 온 중국동포들이 살고 계신답니다. 그러면 핫플레이스였던 가리봉시장으로 안내할게요.
가리봉시장이야 말로 당시 벌집에 살던 구로공단 근로자들이 매일 들렸던 곳이라 할 수 있는데요. 방안에는 냉장고 같은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매일 저녁을 소량으로 사가서 가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중국 식당과 식자재를 팔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지만 과거에는 과일과 채소 등을 파는 평범한 시장이었어요. 오래된 시장 속으로 한번 들어 가볼게요.
여기는 수출의 다리인데요. 가산디지털단지의 3공단과 마리오사거리 2공단을 연결해 주는 긴 다리입니다. 여기가 바로 대한민국의 수출산업을 이끌었던 수많은 수출상품들이 왔다 갔다 했던 자리고 저하고 수많은 근로자분들이 출퇴근 하는 다리였습니다. 다리가 얼마나 긴지 올라가 보도록 할게요.
#엔딩
저랑 같이 구로공단을 둘러봤는데 다들 어떠셨나요?
그럼 저는 30년 전에 제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안녕~
지금은 디지털단지로 변했지만 과거 대한민국 제1 수출단지 였던 구로공단의 역사 여행을 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의 어려웠던 시절 경제성장의 배경에는 수출산업의 역할이 컸지만 그 이유는 공단 노동자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나이에 공단에 취직해 저렴한 인건비, 열악한 공장환경 속 장시간 노동했던 그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감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대본 ----------
#인트로
안녕하세요. 구로공단에서 여공으로 일했던 경숙입니다. 지금 타임머신을 타고 2020년 구로공단으로 왔는데요 제가 일했던 곳이자 제가 거주지였던 가리봉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아 여기는 구로디지털단지 역인데요 과거에는‘구로공단’역 이었구요 2000년도에 여기가 디지털단지로 변화하면서 역 이름도 개명된 것입니다.
#본문 및 자막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걸어오면 바로 한국산업단지공단이 있어요. 여기에 보면 기념동상이 있는데요 당시 구로공단의 노동자를 상징하는 수출의 여인상입니다. 손에는 횃불과 실타래를 손에 들고 있는데 원본은 아니고 다시 복원된 것입니다.
지금은 구로디지털단지에는 유리벽으로 된 건물들이 엄청나게 많지만 예전에는 모두 2~3층 높이의 공장들이었어요. 제1수출단지인 만큼 대규모로 형성된 단지였는데요 주변에 가리봉전자, 싸니전자, 동남전자주식회사 등 대한민국의 유명 전자회사들은 밀집했었다고 보면 돼요. 저는 싸니전자에서 라디오 앰프를 만드는 여공으로 일했었는데요 그때 당시 월급이 만원대였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제가 사는 집도 변변치 못한 곳에서 살았는데요. 그러면 저희 집이 있는 가리봉으로 건너가보겠습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 제가 어렸을 때는 공장에서 카페인 보충할 수 있는 아메리카노가 없었어요. 그래서 타이밍이라는 각성제 먹으면서 일했거든요. 근데 각성제를 너무 많이 먹고 일해서 한 번은 커피가 세 시간째 멈추지 않았어요. 그만큼 우리가...
여기가 제가 살던 가리봉동이에요. 지금 아직 여기에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소리를 조그마하게 말할게요. 이렇게 보시면 구로디지털단지는 변했지만 그에 비해 가리봉은 변한 게 딱히 없어요. 겉으로 보기엔 단독주택이 엄청나게 많지만 사실은 1~2평수의 각 방들이 30~40개씩 있습니다. 이방을 쪽방이자 가리봉 벌집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가리봉에는 아직도 벌집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어요. 제가 살 때 벌집 월세가 당시 2만 원이었어요. 제 월급보다 많아서 당시 1~2평방을 4명에서 나눠썼던 기억이 나네요. 서로 교대 근무하면서 쭈그리고 잤었는데요. 공단이 디지털단지가 되면서 여공들은 떠났지만 아직도 벌집이 존재하는 이유는 코리안드림을 안고 온 중국동포들이 살고 계신답니다. 그러면 핫플레이스였던 가리봉시장으로 안내할게요.
가리봉시장이야 말로 당시 벌집에 살던 구로공단 근로자들이 매일 들렸던 곳이라 할 수 있는데요. 방안에는 냉장고 같은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매일 저녁을 소량으로 사가서 가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중국 식당과 식자재를 팔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지만 과거에는 과일과 채소 등을 파는 평범한 시장이었어요. 오래된 시장 속으로 한번 들어 가볼게요.
여기는 수출의 다리인데요. 가산디지털단지의 3공단과 마리오사거리 2공단을 연결해 주는 긴 다리입니다. 여기가 바로 대한민국의 수출산업을 이끌었던 수많은 수출상품들이 왔다 갔다 했던 자리고 저하고 수많은 근로자분들이 출퇴근 하는 다리였습니다. 다리가 얼마나 긴지 올라가 보도록 할게요.
#엔딩
저랑 같이 구로공단을 둘러봤는데 다들 어떠셨나요?
그럼 저는 30년 전에 제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