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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만난 마음이 몽심재에 함께 담기었네

문화포털 기자단 2016-10-06
꿈속에서 만난 마음이 몽심재에 함께 담기었네


명문가란 어떤 기준을 두고 이르는 말일까요? 사회지도층의 가옥과 가문의 이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도덕적 의무’를 스스로 잘 행한 가문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남원에 명문가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전통가옥 몽심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소개합니다. 


공민왕 2년에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두 선생과 더불어 삼로(三老 세분의 어른)라 일컬었던 두문동 72현(고려말 충신들이 이성계 왕조를 피해 두문동에 은거하다 끝내 불길 속에 모두 타죽었고, 여기서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생겨남)의 영수(領首) 송암 박문수. 그의 손자 박자량이 정치권력에 환멸을 느껴 부임 3일 만에 관직을 버리고 외가에 와서 도의(道義)를 강론하고, 후학 양성에 힘쓰면서 남원에 뿌리를 내립니다. 몽심재는 박문수의 14세손 연당 박동식의 고택입니다.


隔洞柳眠元亮夢 격동유면원량몽...마을과 떨어져 서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을 꿈꾸며 잠자고 있고, 

登山薇吐伯夷心 등산미토백이심....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 숙제 마음을 토하고 있다. -박문수


고려 마지막 충신으로써의 대의명분과 지조를 지키려 가시밭길을 택했던 선비의 단호한 각오. 이 뜻을 기리고자 두 문장 끝의 몽(夢)과 심(心)자를 따서 ‘몽심재’라는 당호를 붙였습니다.


사랑채의 현판 ⓒ 문화포털기자단 임숙자

사랑채의 현판 ⓒ 문화포털기자단 임숙자 


백두대간이 내려오다가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등 이름난 고을 500리길을 둘레하고 있는 환지리산 문화권을 형성하는 문화 실크로드. 지리산의 길을 따라서 영·호남 간 물적·인적 교류는 물론 유·불·선에 정통한 기인, 달사들이 오가면서 수많은 신화와 전설과 사연을 남겼을 그 실크로드의 한 축인 전라도 남원에 죽산박씨의 고택인 몽심재가 있었으니, 타인에 대한 적선과 세상사 정보를 주고받는 접빈객(接賓客)의 재미를 어림해 봅니다. 


당시 영남 선비들이 한양 갈 때 험한 추풍령보다는 평탄하고 인심후한 남원을 돌아 상경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자연히 몽심재는 과거 보러가는 선비들의 중간 거처였고, 주인의 아낌없는 후한 대접에 선비들은 일부러 수지면 호음실까지 내려가 몽심재에 머물렀으니 자연 과객들의 단골 사랑채가 되었던 것입니다. 명문가의 사랑채는 인품과 지성을 갖춘 식자층들이 집주인과 더불어 문사철을 토론하고, 바깥세상 소식을 주고받으며, 기인, 달사들과의 인맥을 형성하는 접빈객의 정보문화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몽심재는 조선후기의 가옥으로 좁고 경사진 지형을 잘 활용한 호남지역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으로 ㄷ자형안채(6칸), 오방채(3칸), 사랑채(9칸), 마판채(3칸), 문간채(5칸)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몇 안 되는 양택 명당에 독특한 설계가 건축학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 입구에 하마석이 있고, 하인들의 숙소와 창고로 사용되던 문간체 우측 끝에는 연못이 바라보이는 누마루 요요정이 있습니다. 식객들 뒷바라지로 고생하는 하인들을 위한 전용 휴식 공간으로 쓰였다는 요요정은 주인의 인본주의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많은 학자들은 전국 어느 고택에서도 볼 수 없는 하인들을 배려한 흔적에 감탄합니다. 


동학란과 6.25 동란 때 지주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했으나, 평소 아랫사람을 아껴 후하게 배분하고, 재물보다는 사람을 귀히 여겼던 주인의 성품을 아는 소작인들이 앞장서 지켜주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배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수백 년간 유지해온 명문가의 조건 첫 번째 덕목임을 보여줍니다.


(왼쪽시계방향으로) 문간채와 요요정과 연못 ⓒ 문화포털기자단 임숙자

(왼쪽시계방향으로) 문간채와 요요정과 연못 ⓒ 문화포털기자단 임숙자


요요정에서 내려다보면 입구 좌측에 연못 천운담(天雲潭)이 있습니다.

‘연당’이 매월 초하루 연꽃을 벗 삼아 선비들과 강론을 벌이며 바라보았을 4각형의 연못 안에는 4개의 바위가 앉아 있습니다. 못의 물에 비치는 영상은 하늘(우주)이요(天), 이 하늘(우주)을 물에 다잡아 가둔 곳이 4각 연못이며(地), 이를 즐기고 활용할 사람의(人) 인생좌표가 되어줄 디딤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4각의 못에 비치는 하늘(우주)의 영상을 품고, 써도 써도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재물을 채워 이를 디딤돌 삼아 주변에 널리 베풀어 쓰고자 했을 집 주인의 심정과 물을 건너듯 인생살이를 조심히 딛고 건너라는 교훈도 헤아려 봅니다. 


눈여겨 볼 것 중 하나는 사랑채 앞마당에 놓인 호석입니다. 건물은 보통 안채를 중심으로 혈 자리에 놓는데, 몽심재의 본 건물은 안채가 아닌 사랑채인 것입니다. ‘손님을 우선적으로 접대한다’는 적선지가(積先之家)의 뜻을 안채보다 규모면에서도 훨씬 크고 당당한 사랑채를 통해 봅니다.


사랑채 전경 ⓒ 문화포털기자단 임숙자

사랑채 전경 ⓒ 문화포털기자단 임숙자


조선궁궐보다 개인 사랑채 계단이 더 높을 수 없어 대부분 2계단인데, 6계단을 가진 몽심재. 지형의 경사도와 풍수를 고려해 부득이 사랑채를 높게 잡았거나, 안채가 사랑채를 굽어 내려다보는 형상을 피하기 위한 이유쯤으로 헤아려봅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바깥출입이 제한되었던 안채 여인들의 숙소가 감히 사랑채보다 높을 수 없으며, 한 편 연약한 여인네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랑채를 높게 지어 대문 밖에서 보면 안채가 안보이도록 숨긴 속 깊은 사연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랑채는 앞과 뒤로 문과 마루가 설치되어 뒷마당인 안채 마당으로 통하는 ‘5칸 접집’인데 매우 개방적이며 손님을 배려한 형태입니다. 


왼쪽부터) 안채 전경 및 처마 사진 ⓒ 문화포털기자단 임숙자

(왼쪽부터) 안채 전경 및 처마 사진 ⓒ 문화포털기자단 임숙자 



이어 여성들의 전용 공간인 ‘ㄷ자’ 형태의 안채가 전개됩니다. 서쪽 부엌 지붕과 마루를 넓게 달아내어 서쪽 지붕의 길이가 더 길게 뻗어 있습니다. 많은 손님들을 치르느라 하녀들이 여름 뙤약볕 아래서 음식을 장만하며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마루를 확장하고 지붕을 달아 시원하고 넓은 마루에서 편안하게 음식을 장만할 수 있도록 배려한 주인의 특별한 철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락방과 루 전경 ⓒ 문화포털기자단 임숙자

다락방과 루 전경 ⓒ 문화포털기자단 임숙자


이어 다른 고택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건물 형태로 외부가 앞으로 툭 튀어나온 다락방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으로 치면 다용도실과 발코니 같은 용도로 쓸 수 있는 실용적 구조입니다. 다락을 통해 밖을 조망하거나 아이들의 놀이 장소로 활용하고, 때로는 계절 따라 과일이나 채전의 잎들을 널어 말리는 등, 공간 하나라도 허송함이 없도록 활용했던 안주인의 알뜰한 살림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고건축 연구학자들도 조선의 건축물 가운데 뛰어남을 인정하는 건물형태입니다.


대청 마루방 ⓒ 황성자

대청 마루방 ⓒ 황성자


여름에도 음식을 저장할 수 있는 안채의 마루 저장고와,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랑채의 대청 마루방은 뒤편의 산에서 불어오는 냉기와 마당의 달구어진 열기가 서로 만나 대류현상을 일으키는 과학적 현상을 적용한 듯하여 합천 해인사의 장경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1대 주인인 ‘연당’은 궁중에서 증통훈대부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과 후손 19명이 급제하여 대대로 관직에 올랐으니 남원의 4대 양택지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듯합니다. 


주인이 죽자 생전에 신세를 진 영호남의 과객들이 여러 곳에 유혜비를 세워 그의 덕망을 기렸다하니 그만한 재력이었기에 가능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있는 집이라고 다 그러하지는 않지요. 후손 박 비랑은 1923년 사재를 털어 몽심재의 안산 청룡자락 뒤편에 수지 초등학교 (당시 수지보통학교)를 건립하였고, 이어 수지 중학교를 건립하여 국가에 헌납하였습니다. 몽심재 6대주 박정식대에 이르러 가문은 원불교에 귀의하고, 8대주 박인기대에 이르러 1984년 1월 국가 중요민속유형문화재 149호로 지정되어 원불교 교무님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몽심재는 충절과, 좌우상하 널리 교류 소통하는 열린 마음, 물질보다는 사람을 보는 이웃사랑, 아래 사람에게 차별 없이 덕을 베풀고, 남녀 차별 없이 후진 교육에 힘써 인재들을 배출한 명문가로써 오랜 명성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코스모스 ⓒ 김태윤

코스모스 ⓒ 김태윤


따스한 햇살과 코스모스가 손짓하는 어느 가을 날 사랑스런 아이의 손을 잡고 몽심재를 찾아보면 어떨까요? 고요히 세월을 지키는 고택과 마주하여 옛 주인의 철학과, 당시의 문화와 생활들을 추측해보며 인생에 큰 울림으로 남을 정신 하나 배워간다면, 두고두고 새록새록 삶의 지침이 되어주지 않을지요? 몽심재를 물러나며 함께 길동무가 되어준 ‘아버지의 꽃지게’의 황성자 작가님의 후기와 함께 긴 글을 마무리 합니다.


<심술궂은 태양은 마루 끝에 열기를 던져놓고, 산 그림자 벗 삼아 유희중이다. 요요정에 앉아 다시 바라보는 몽심재는 단순히 아름답다는 습관적인 표현을 물리고 싶다. 집을 지은이의 마음과 마주하며 그 안에 깃든 속 깊은 배려를 눈치 챈다면 한층 더 고색창연함에 빠져들 것이다. 계획도 없이 바람이 불러 달려간 길, 비워진 여행자의 마음에 수채화 한 폭 들어와 앉았다. 초록빛 여름에 형형색색 물이 드는 어느 가을날, 그리움이 마음에 치달으면 꿈결처럼 몽실몽실한 길을 따라 난 이곳으로 다시 달려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