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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식(林元植)

예술가명
임원식(林元植)
분야
지휘자
생애
임원식은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 1919년 6월 24일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향교동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음악을 접할 수 있었는데 집안이 넉넉치 못해 교회에 있는 오르간으로 연습을 하곤 했다. 그의 나이 6세가 되던 해 그의 집안이 만주땅에 있는 봉천으로 이사하게 되어, 어린시절을 만주땅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미 10대에 영화관에서 피아노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립의 생활을 했는가 하면, 교회에서는 독특한 주법으로 찬송가를 연주,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1939년 그의 나이 20세 때 하얼빈 제일음악학원을 졸업하였는데, 이 학교는 백인계 러시아인들이 만든 음악학교였다. 여기에서 임원식은 작곡과 이론, 그리고 피아노를 배웠고 만주에서 공부를 끝낸 임원식은 23세가 되던 194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해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한편, 모로이 사부로부터 작곡을 배우게 되었다. 당시 동경에는 김원복, 전봉초, 윤기선 등이 먼저 와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들과 교류하면서 한편으로는 영화음악의 편곡을 맡아 경제적으로도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1944년 강제징용을 피해 다시 하얼빈으로 간 그는 백인계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라디오관현악단에서 편곡 일을 맡는 한편 방송녹음을 위한 지휘도 하였는데, 이때부터 지휘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일본의 패전으로 일본인 상임지휘자가 갑자기 관현악단을 떠나게 되자, 임원식은 그를 대신해 정기연주회의 지휘자로 무대에 서게 되었는데, 이때가 1945년 11월이었다. 1948년 1월에는 한국 최초의 오페라 공연인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의 초연 무대를 지휘, 오페라 운동에도 발벗고 나섰는데 이처럼 초창기 교향악 운동에 중심 역할을 감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후진 양성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1946년 이화여고 교사로 취임했고, 이 때에 맺은 이화와의 인연은 그 후 서울예고의 창설로 이어지면서 우리나라 음악 조기교육을 위한 개척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큰 활동을 하는 가운데서도 보다 깊이 있는 음악공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미군정청에서 미국 유학의 길을 주선해 주어 피아니트스트 윤기선과 함께 1948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이 때 캘리포니아하기음악제에서는 쇤베르크로부터 악곡 분석에 대한 지도를 받았는가 하면, 탱글우드에서는 세계적인 지휘자 쿠제비스키로부터 지휘법을 사사하기도 했다. 1969년 KBS교향악단의 초대 지휘자가 된 후 1980년 사임할 때까지 맡았으며, 사임 후 육순을 넘긴 나이에도 다시 인천시향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여 크게 활약했고, 국내외의 무대를 누볐다. 교육자로서의 임원식은 서울예고 창설의 주역으로 교감과 교장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예술영재교육의 기틀을 마련했고, 서울음대와 이화여대의 교수를 역임, 경희음대의 학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약력
1939년 하얼빈 제일음악학원 졸업 1942년 동경음악학교 입학(피아노 전공) 1944년 하얼빈라디오관현악단(편곡 담당) 1945년 하얼빈교향악단 정기연주회 지휘 1946년 고려교향악단 창설·지휘, 이화여고 취임 1948년 한국최초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초연 지휘 1948년 도미 유학(줄리어드 입학) 1953년 서울예술고등학교(부산) 창립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69년~1980년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역임 1978년 국제청소년음악연맹 세계총회 한국 유치
상훈
방송문화상 5월문예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서독정부 문화훈장
공연
1947년 한국 최초 야외음악회 개최(덕수궁) 1991년~1992년 한국인 최초 러시아 순회, 객원 지휘 1994년 베토벤 교향곡 전곡 지휘 1997년 97 서울국제음악제(KBS교향악단과 서울시향의 합동 연주 지휘) 1998년 한국오페라 50주년 기념축제 <라 트라비아타> 전주곡 지휘
리뷰
(……) 임원식을 우리 ‘음악계의 풍운아’라고 부르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지나온 80여생을 어느 한 순간도 쉼없이 열심히 뛰어 다니면서 음악예술과 관련된 모든 것을 위해 정열을 불태웠다. 여든을 넘기는 나이에도 그는 언제나 젊은 음악가로 우리 앞에 서 있을 뿐 아니라, 광복 후 우리나라 음악계의 초창기로부터 21세기를 향한 시점에 이르기까지 앞서가는 선구자의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임원식은 분명히 ‘끼’있는 음악가이며 끊임없이 솟아나는 음악적 욕구와 예술적 정열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독특한 삶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가 언제나 삶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지휘자로서 우리나라 교향악 운동의 발전을 위한 것이고, 둘째는 음악가를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청소년기에 음악적인 경험 속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조기 영재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투철한 신념이다. 그는 이 두 가지 관심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았고,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위해서는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때로는 주위로부터 불만의 소리를 듣기도 했다. 직선적인 성격에 항상 앞서가는 빠른 두뇌 회전은 자연히 다른 사람들에 대해 못마땅한 생각을 가질 수 있어 그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도 했지만 한 번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거론하는 일 없이 언제나 뒤끝이 깨끗했고, 그래서 몇 번 그를 만나다 보면 감추어져 있는 인간미에 깊은 애정을 갖게 된다. - ‘한국오케스트라사의 산 증인’, 한상우,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 한상우, 지식산업사, 2003
연계정보
-아무도 모르라고-임원식
-KBS교향악단
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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