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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남 (1947.1.20~)

예술가
황규남 (1947.1.20~)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75.10.1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전수 장학생 선정 1980.12.31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이수자 선정 1984.12.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조교 선정 1987.7.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 석전대제 자체공개 시 이수평가 받음 1990.12.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보유자 후보 선정
학력(계보)
1960.4.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입소(6회) 1962.3. 이주환 문하에 가곡 입문 1966.2.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졸업 1991.8.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
생애(약력)
1966.3. 국립국악원 연주원 임용 1967.9. 대만 친선공연 참가 1967.11. 문교부 전국중고등음악실기 교사 자격고시 합격 1973.5.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연주자 1974.6. 국립국악원 연주원 1975.~1979. 미국, 일본, 유럽 공연 1976.6. 미국 순회공연 참가 1977. 홍콩공연 참가 1984.12. KBS 국악대상 가악본상 수상 1984.~1986. 전남대학교, 경북대학교 강사 1986. 국립국악원 연주단 부악장 1986.12. 대통령 표창장 수여 1989. 일본순회공연 참가 1991. 중앙대학교 강사 1991. 미국 공연 참가 1999.1. 국립국악원 정악단 악장 2003.7.~현재 국립국악원 정악연주단 예술감독, 추계예술대, 용인대, 단국대 강사
리뷰
가사(歌詞) 전수조교 황규남 선비정신의 멋 꿋꿋이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예능보유자 이양교(63)씨의 수제자이며 전수조교인 황규남씨는 우리 전통 성악 부문 중 정악(正樂)으로 치는 가곡 가사 시조를 두루 꿰고 있는 오늘의 전통 성악인이다. 국립국악원 정악 연주단 25년 단원으로 그의 재주 중에 피리를 더 많이 쓰고 있지만 정악 성악 부문 중에 폭넓고 가치가 많은 가사에 남다른 재능과 열정이 있고 책임을 느낀다. 우리의 전통 성악은 정악·속악 쪽에 다양한 줄기와 맥이 있다. 판소리나 무가(巫歌) 각 지역의 민요 등은 속악·속가로 분류할 수 있고 가곡·시조·가사는 정악·정가로 분류한다. “가사(歌詞)는 가곡의 사설보다는 좀 긴 노랫말로 돼 있고 가곡이나 시조가 어떤 고정된 율조곡에 어떤 사설이든지 얹어 부르는 것과는 달리 그 가사에 맞는 다른 곡조를 노래마다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죠” 뿐만 아니라 목구성이나 쓰임새가 다르다. ‘시조는 무겁고 한가하게 멋지고 구성지게 불러대는 것’이고 ‘가곡은 목구성이 쭉쭉 뻗는 맛의 장쾌함’이 특징이다. 가사는 정악 쪽에 있으면서도 정악의 목구성 중에서는 가장 폭이 넓다. 노래에 따라서는 민요나 잡가 쪽의 목구성까지도 쓴다. 그래서 그는 가사를 ‘작은 목구성이 요구되는, 배우고 부르기 힘든 것’으로 친다. <상사별곡>, <백구가>, <황계가>, <춘면극>, <죽지사>, <양양가>, <처사가>, <수양신가>, <길군악>, <권주가>, <어부사>, <맥화가> 등 12곡이 전한다. “과거에는 물론 지금도 가곡·시조에 비해 전수인구도 적고 공연에 대한 관객반응도 이해가 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배우고 지켜오는 가사에 대한 열정이나 그가 깨닫는 뜻은 줄어들지 않는다. ‘이조선비의 정신과 멋이 담겨있는 우리 소리’이고 ‘정통성악의 큰 맥으로 우리가 지켜야 하고 전승 발전시켜야 할 항목’이라는 신념이다. 그는 1947년 1월 20일 서울 태생이다. 그의 아버님은 그가 4살 때 돌아가셨고 홀로 되신 어머님이 그와 그의 형 정남(50)씨를 어렵게 키우셨다. 그들 형제는 모두 국악을 전공했다. “집안 살림이 어려운데 당시 국악원 국악사양성소는 전액 장학생이어서 형이 먼저 들어갔고 나는 형이 권해서 들어가게 됐다.” 그의 형은 국악사양성소(現 국악고교) 3기생이고 그는 7기생이다. 거기서 그는 1962년부터 하기윤 선생에게 배운 선암 이주환 선생에게 가곡을 필두해서 가사·시조를 배우기 시작했고 김태섭 선생에게 피리를 배웠다. 인간문화재로 이양교씨의 정식제자가 된 것은 문화재로 지정(1975)되는 때 부터였다. “우리 형제의 국악공부는 내림도 아니고 어려운 집안 형편에서 발단된 것이지만 공부하면서 재능을 발견하고 인정도 받았다”는 설명이다. 그의 형 정남씨는 피리·가곡·작곡으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브라질에 이민 가 있다. 형은 국악의 길을 중도에 포기했지만 그는 국악원 연주원 자리를 지키며 가사의 맥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가사의 길고 어려운 사설을 듣고 졸음이 오는 관객이 없어질 때까지 그는 노력하며 기다린다. <일간스포츠>, 구히서, 1990년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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