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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개요
가사가 정확하게 언제 발생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악장가사>에 전하는 <어부가(漁父歌)>가 12가사의 <어부사>와 같은 곡으로 추측되며, 그 <어부사>가 음악적인 면에서는 가사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고금가곡>에 <죽지사>·<춘면곡>·<양양가>·<어부사>의 사설이 전하고, <청구영언>에는 <백구사>·<황계사>·<춘면곡>·<길군악>·<상사곡>·<권주가>·<양양가>·<처사가>·<매화가> 9곡이,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에는 <백구사>·<춘면곡>·<상사별곡>·<처사가>·<매화가> 5곡, 그리고 <가곡원류>에는 <어부가>의 사설이 전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현행 12가사의 유래는 18세기 초기무렵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추측된다.가사의 곡조를 담은 옛날 거문고 악보인 <삼죽금보(三竹琴譜)>에 <상사별곡>·<춘면곡>·<길군악>·<매화곡>·<황계곡>·<권주가> 6곡이 전한다. 19세기 전반 무렵에 연주되었던 가사는 가곡처럼 거문고반주에 의해서 연주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장구반주만이 따르는 현행 가사의 연주형태가 거문고반주를 지녔던 본래의 연주형태를 잃고 근래에 변천되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현행 12가사의 전통은 가곡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에서 비로소 아악생(雅樂生)들에게 전승되었다. 당시 가사선생으로 하규일(河圭一)과 임기준(林基俊) 두 사람이 초빙되었다. 하규일은 1926년부터 아악생들에게 12가사 중 <백구사>·<황계사>·<죽지사>·<춘면곡>·<어부사>·<길군악>·<상사별곡>·<권주가> 등 8곡을 전수하였고, 임기준은 1939년부터 나머지 <수양산가>·<양양가>·<처사가>·<매화타령> 등 4곡을 전수하였다.
내용
가사는 우리나라 전통 성악곡의 한 갈래로, 사설은 가곡이나 시조에 비하여 매우 길어서, 그 음악적 구조도 가곡이나 시조보다 확대된 형식을 보여준다. 노래의 양식이 가곡만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시조나 가곡과 함께 정가(正歌)의 하나로 취급되고 있다. 사설의 길이가 대체로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가곡이나 시조에서와 같이 하나의 고정된 가락에 다른 사설을 얹어서 노래를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사설에 따라서 가락이 조금씩 다르며, 조바꿈이나 반복이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점이 가곡이나 시조와는 다르다.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곡은 <춘면곡(春眠曲)>·<백구사(白鷗詞)>·<황계사(黃鷄詞)>·<죽지사(竹枝詞)>·<양양가(襄陽歌)>·<어부사(漁父詞)>·<길군악>·<상사별곡(相思別曲)>·<권주가(勸酒歌)>·<수양산가(首陽山歌)>·<처사가(處士歌)>·<매화타령(梅花打令)> 등의 12곡으로 흔히 12가사로 알려져 있다. 현행 12가사에 사용되는 장단은 6박자를 한 주기로 하는 장단과 5박자를 한 주기로 하는 장단 등 두 가지이다. 6박자 장단에 속하는 가사는 <백구사>·<황계사>·<죽지사>·<어부사>·<길군악>·<수양산가>·<매화타령>·<춘면곡> 등 8곡이며, <상사별곡>·<처사가>·<양양가> 등 3곡은 5박자 장단에 속하는 가사이다. 오직 <권주가> 한 만은 일정한 장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불규칙적인 자유스런 장단의 반주로 불려진다. 가곡은 반드시 관현악반주에 의하여 연주되나 가사는 반주가 없어도 무방하며, 시조와 같이 장구장단에 의하여 혼자 부르는 것이 원칙이다. 반주를 할 경우에는 피리나 대금 등 단잽이에 장구를 곁들여도 좋고, 좀 더 범위를 넓혀 피리·대금·해금·장구로 편성하기도 한다. 반주하는 방법은 노래를 따라가는 ‘수성(隨聲)가락’이기 때문에, 반주하는 사람이 가사가락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가사반주에 익숙한 악사가 적다는 것은 반주자가 가사를 부를 줄 모르고 노래의 뒤를 따라가는 안이한 태도를 갖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가사의 가락은 가곡이나 시조와는 다른 여러 가지 음악적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창법은 속청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러한 창법은 여창가곡이나 경제의 시조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둘째, 전성법(轉聲法)·퇴성법(退聲法)·요성법(搖聲法)을 곡에 따라서 적절히 사용한다. 요성법에 있어서 <백구사>·<황계사>·<죽지사>·<권주가>·<춘면곡>·<길군악>·<상사별곡>·<처사가>·<양양가>·<매화타령>은 아악과 전라도 민요에서 보이는 요성법을 주로 쓰고 있다. <어부사>와 <수양산가>는 진폭이 넓은 서도소리식의 요성법을 쓰고 있으며, <권주가>와 <춘면곡>도 때로는 서도소리에 가까운 요성법을 쓰고 있다. 전성법에 있어서 <백구사>·<죽지사>·<어부사>·<상사별곡>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수양산가>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황계사>·<춘면곡>·<처사가>·<양양가>는 4도 상행할 때 사용하고, <매화타령>은 4도 상행할 때 가끔 사용한다. <권주가>는 장2도 상행할 때 사용하고, <길군악>은 같은 음이 중복될 때 사이음을 전성한다. 퇴성법에 있어서 <백구사>·<황계사>·<어부사>는 아악의 계면조나 시조에서 보이는 퇴성법을 사용한다. <죽지사>의 퇴성법은 가곡 우조의 퇴성법과 같고, <춘면곡>·<길군악>·<상사별곡>·<권주가>·<처사가>·<양양가>·<매화타령>은 장2도 혹은 단3도 하행할 때 퇴성법을 사용한다. 셋째, 종지법에 있어서 <백구사>·<황계사>·<상사별곡>은 시조의 종지법과 같이 하행4도의 종지를 한다. <처사가>와 <양양가>는 4도 하행 혹은 4도 상행종지를 한다. <춘면곡>·<어부사>·<권주가>·<매화타령>·<수양산가>는 4도 상행종지를 하나, <수양산가>는 5도 상행종지를 할 경우도 있다. <길군악>은 순차적 하행종지를 하고, <죽지사>는 잡가의 종지법과 비슷하다. 넷째, <죽지사>와 <길군악>에서 의미없는 말로 구성된 입타령이 쓰이는데, 이것은 시조나 가곡에서는 없는 가사만이 갖는 특징이다. 다섯째, 조성은 분명하지 않으나, 계면조와 같은 느낌을 주는 곡은 <백구사>·<어부사>·<상사별곡>이며, <죽지사>나 <길군악>의 조성은 가곡의 우조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평조의 특징을 내포하는 곡들은 <춘면곡>·<권주가>·<수양산가>·<처사가>·<양양가>·<매화타령> 등 6곡이다. 여섯째, 현행 12가사 가운데 <매화타령>과 <수양산가>·<양양가>·<처사가>의 가락은 하류층에서 많이 불린 잡가창법의 영향을 받은 곡이다.
처사가
처사가는 총 59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벼슬을 단념하고 한갓 처사로서 자연에 묻혀 사는 은둔생활의 정서를 표현한 작품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연상하게 할 만큼 그 시풍이 매우 자연 관조적이며 탈속적 향취가 그윽하다. 8장으로 되어 있고, 5박 한 장단의 구성은 1장 7장단, 2장 11장단, 3장~8장 12장단으로 되어 있다. <양양가>와 거의 같은 곡으로 1절은 같으며, 2절은 12장단으로 되어 있는 <양양가>의 세 번째 장단의 가락을 생략시켜 11장단을 만들었다. 3절은 여덟 번째 장단의 가락을 첨가시켜 12장단으로 확대하였고, 나머지는 <양양가>의 3절과 같다. 4절과 5절은 여덟 번째 장단의 가락이 서로 다를 뿐 나머지 11장단은 <양양가>와 같다. 6절은 세 번째 장단부터 아홉 번째 장단까지 7장단의 가락이 <양양가>와 다르고 앞 첫 번째 장단과 뒤 4장단의 가락이 같다. 7절은 아홉 번째와 열 번째의 두 장단의 가락이 <양양가>와 서로 다를 뿐 앞 8장단과 뒤 2장단은 같다. 8절은 처음 8장단이 다르고 뒤 4장단은 같다. 황종·태주·중려·임종·무역의 평조적 5음음계이며, 4도가 가락의 주축을 이루고 종지는 하행 4도 형태이다. 노래의 음역은 배임종-청무역이지만 대개 청중려를 최고음으로 하여 가락이 진행된다. 선율선은 1절만이 중간음역에서 평탄히 흐르다가 각 절 처음에는 높은 음역에서 그리고 종지를 향해 서서히 하강한다. 선율의 장식이 비교적 심하지 않고 요성이 부드러워 유장한 느낌을 준다. <청구영언>·<정선조선가곡>·<교주가곡집>·<남훈태평가>에 실려 전한다.
수양산가
12가사 중 <백구사>·<죽지사> 등이 정격으로 불리는 데 반해, 이 노래는 <처사가> 등과 더불어 변격으로 불리며 잡가와 구별이 뚜렷하지 않다. 문학상으로도 4음 4보격 무한 연속체라는 가사 장르 특유의 율격을 상당히 벗어나고 있으며, 특히 노래의 중간에 “네로이네로 노네니나 네루이루하고 나루이루하고 네로나 이루 나로로 이루하고 네루네니 나네니나 노네니나 네루이루하고 나루이루하고 네로나 이루 나로로 이루하고 네루네니 나네니나 노네니나노 노너니나”라는 여음이 삽입되어 있어 이것을 경계로 전·후련의 분절형식을 보이므로 잡가 장르에 귀속시키거나 또는 조선 후기에 변모된 평민가사로 다루기도 한다. 작품 전체가 단 하나의 문장으로 구조화 되어 있어, 호흡을 길게 엮어가는 변격형 가사의 특이성을 보여주고, 묘사보다는 서술이 중심이 되어 있다. 작품 내용은 달구경하면서 술과 안주를 벗하며 자연을 즐기려 했더니 바람이 불고 눈비가 오려고 하여 달구경을 즐길 수 없는 심회를 읊고, 아울러 항우와 양귀비의 슬픈 고사를 떠올리며 비감에 젖다가 “오늘같이 좋고 좋은 날 만나 아니 놀고 무엇 일하자느냐”라고 역설적으로 풍류를 노래하였다. 가사는 모두 4마루로 되어 있는데, 첫째 마루의 가사는 수양산에 얽힌 백이·숙제의 고사로 시작하고 있다. 둘째 마루는 첫째마루보다 짧고, 수양산과는 전혀 다른 간단한 풍광을 서술하였고, 셋째 마루는 긴 입타령이다. 마지막 넷째 마루가 가장 긴 가사로 되었는데 중국의 고사를 읊으면서 인생은 허무하니 마음껏 놀아보자는 내용으로 끝맺고 있다. 이러한 가사 4마루는 6절의 음악으로 만들어졌는데, 셋째 마루 외에는 모두 두 절씩으로 나누어 가락을 붙였다. 6박을 한 장단으로 한 절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절 4장단, 2절 6장단, 3절 7장단, 4절 7장단, 5절 8장단, 6절 6장단인데, 1절부터 3절까지의 끝 두 장단의 5절 가락은 같으며 마지막 6절의 장단은 4박으로 축소되었다. 황종·태주·중려·임종·무역의 평조적 5음음계로 되어 있고, 노래의 음역은 탁임종-청중려이다. 가락은 4도가 주축이 되고 비약진행을 하며 굴곡이 심하고 잡가의 창법으로 쓰고 있다. 6절의 가락이 모두 달라서 변화가 많으나 1절·2절·3절과 끝절인 6절의 종지를 이루는 장단의 가락만 같을 뿐이다. 종지의 가락이 다른 4절과 5절은 상행4도 종지가 분명하나, 곡의 끝종지를 이루는 것은 상행4도 사이에 장식 선율을 삽입하여 순차적으로 하행시킴으로써 종지감을 감소시키고 있다. 비약진행의 가락을 잡가의 창법과 함께 부르므로 웅혼하고 남성적인 멋이 깃들어서 가객들에게 널리 불리고 있다. <수양산가>는 <정선조선가곡>·<교주가곡집>에 수록되어 있다.
권주가
구가(舊歌)와 현행가(現行歌)의 두 가지가 전하는데, 구가와 현행가는 사설만 다르고 선율의 차이는 없다. 현재 구가는 거의 부르지 않고, 보통 <권주가>라 함은 현행가를 가리키며 사설의 내용이 다르기는 하나 그 일부는 서로 넘나들며 의미 또한 비슷하다. 다른 가사 음악들은 일정한 장구 장단을 가지고 있는데 비하여 <권주가>는 장구 장단이 없는 불규칙한 박자로 불리는 무정형의 자유스러운 곡이며 전부 10절이다. 1절부터 4절까지와 5절부터 10절까지는 각각 같은 선율의 반복이다. 그러나 5절 이하는 대개 부르지 않고 1절에서 4절까지만 부른다. 음악적인 특징은 다른 가사음악과 마찬가지로 창법에서 가성을 많이 쓰며, 아악과 민속악에서 쓰는 요성법과 서도소리에 가까운 요성법을 쓴다. 퇴성법은 가곡 우조에서의 예와 같고, 4도 하행종지를 하며 조성은 평조의 특징을 보이는 황종·태주·중려·임종·남려의 5음음계로서 매우 느린 속도로 가창된다. 다른 가사 음악과 마찬가지로 대금을 비롯한 몇 개의 악기가 수성가락으로 반주를 한다. 연주시간은 10절까지는 28분 정도, 4절까지는 11분 정도 걸린다. <청구영언>에 사설이 전하며, <삼죽금보>에 정간보로 된 거문고 육보가 전하나 현행가와의 관계는 아직 규명이 안되고 있다.
상사별곡
조선 후기에 애창되었던 작자·연대 미상의 가사이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12가사 중의 한 곡으로, 총 196구이다. 18세기의 <만언사>(萬言詞)와 19세기의 <한양가>(漢陽歌)에 이 작품의 제목이 인용되어 있어, 18세기에는 가창으로 존재했으며, 19세기에도 대표적인 잡가로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청구영언>·<가곡원류>·<남훈태평가>·<정선조선가곡>·<교주가곡집> 등의 가집과 <증보신구잡가>를 비롯한 각종 잡가집, 그리고 소설 <부용의 상사곡> 등에 전한다. 각 이본들 사이에는 표현 상에 다소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크게 다른 점은 없다. 그 중 <남훈태평가>에 전하는 이본을 보면, 4음보 1구로 계산하여 전체 49구이며, 율격은 4음 4보격 무제한 연속체로서 가사의 율격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가끔 음보의 추가와 결손 현상을 상당히 보여 가창가사의 특징을 나타낸다. 내용은 인간의 이별만사 중에 독숙공방(獨宿空房)이 더욱 섧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기다리는 마음과 상사하는 마음을 여러 각도로 묘사한 다음, 한번 죽어가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옛 정이 있거든 다시 보게 태어나길 기원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남녀 사이의 순수한 연정을 주제로 한 이러한 상사류의 가사 가운데 전형성을 보이는 작품으로 이 작품의 문학사적 위치를 설정할 수 있다. 또한 이들 상사류의 가사는 조선 전기의 사대부 가사 가운데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라 할 수 있는 <사미인곡(思美人曲)> 계열의 가사를 계승한 것이지만, 후자에 있어서 남녀간의 연정은 신하(여성화자)가 임금(임)을 흠모하는 충정의 우의라는 점에서 주자주의(朱子主義)라는 이념의 고리에 속박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상사류는 그러한 이념적 질곡에서 벗어나 남녀간의 순수한 연정을 무한정 표출한다는 점에 그 특성이 있다. 상사별곡의 음악적 형식은 각 절의 길이가 서로 다른 11개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절은 반복되는 종지형에 의하여 구분되며 맨 마지막 절의 종지형은 다르다. 한편, 김기수·이양교 등이 펴낸 가사보에서는 제4절인 ‘자나 깨나-’부터 ‘-귀에 쟁쟁’까지의 내용을 ‘가삼이 답답’에서 나누어 전체를 12절로 표시하고 있다. 장단은 5박, 구성음은 황(黃)·태(太)·중(仲)·임(林)·남(南), 음의 장식기법은 계면조적이다. 또한, 창법은 가성을 많이 쓰며 음을 요성할 때에는 궁중음악계통의 특징과 민속음악적인 특징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전성기법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아 경과적인 장식음으로 처리되고 있으며, 퇴성은 임종과 중려로 하행진행할 때 태주에서 황종으로 하행진행할 때와 거의 규칙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길군악
길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으로 <노요곡>이라고도 한다. 모두 1절로 되어 있고, 1절의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오날도 하 심심하니 길군악이나 하여를 보자. 어 없다 이년아 말 들어를 봐라.” 도드리 장단과 비슷한 6박이 한 장단을 이룬다. 유절형식의 곡이나 1절과 2절의 선율이 같고, 3·4·5절의 선율이 같다. 2절의 노랫말은 “노나느니나루…”의 의미가 없는 입타령이고, 3절 이하는 매번 1절 노랫말 끝부분을 반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선율의 길이도 1절과 2절에 비하여 훨씬 길다. 평조와 계면조에 쓰이는 요성법·전성법·퇴성법 등을 사용하여 선법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가성법의 창법을 많이 사용하며 민요의 기분을 풍기는 곡이다. 현행의 곡은 하규일이 전창한 곡이며, 노랫말은 <청구영언>·<해동가요>에 전하고, 악보는 <삼죽금보>에 <행로곡>이라는 이름으로 거문고보가 전한다.
어부사
윤선도의 <어부사>를 얹어 부르는 노래로 전체 8절로 되어 있다. 구성음은 황종·태주·중려·임종·무역의 6음으로 되어 있다. 6박을 한 장단으로 하고 있으며 각 절의 장단수는 1절 16장단, 2절 17장단, 3절 17장단, 4절 17장단, 5절 16장단, 6절 17장단, 7절 16장단, 8절 17장단이다. 각 절의 가락형태를 살펴보면, 1절·3절·5절·7절의 홀수절이 같으며 2절·4절·6절·8절의 짝수절이 같은 가락이다. 그러나 홀수와 짝수절도 서로 같은 가락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배 띄어라.’ 부분은 같은 가락의 반복, ‘지국총’ 부분은 변형의 현태로 진행되는 것으로 볼 때, 1절과 2절은 첫 두 장단과 세 장단의 가락만 각각 다를 뿐 다음 14장단은 모두 같다. <어부사>는 가사의 구절과 음악의 구절이 맞아떨어지고 “지국총 지국총”, “배 띄어라 배 띄어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등의 어구를 같은 가락의 반복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가장 규격화된 형식적인 노래이다. 선율은 임종음을 중려음으로 흘러내리는 진행이 많아서 계면조적인 특성이 드러나며, 노래의 음역은 황종-청임종까지이나 가락이 대체로 청태주까지만 올라가 안정되고 유연한 느낌을 준다. 4도진행을 주축으로 하고, 중간음을 많이 떨며, 하행4도 종지로 짧게 끝난다.
양양가
조선시대 전문적인 소리패에 의하여 불려진 12가사의 하나이다. 작자·연대는 미상으로, 이백의 한시에 토만 달아 음조에 맞추어 가사로 개작한 작품이다. 양양은 중국 후베이성 한수 연안에 있는 지명인데, 이백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명승·고적에 대하여 정감을 표출한 것이 한시로 된 원사(原詞)이다. 대부분의 12가사가 4분의 6박자의 도드리 장단으로 가창되는 데 비하여, 이 작품은 <처사가>와 함께 4분의 5박자로 노래부른다. 민속악조가 섞여 있는 까닭에 12가사 중 격조가 낮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문학적으로 볼 때 한시에 토만 단 형태라 하여 가사로 다루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엄연히 가창가사의 하나이므로 가사 장르에 귀속하여 다루어야 할 것이다. <양양가>는 한자로 된 시를 가락에 얹은 것이나 한시의 구절대로 악절을 나누지 않았다. 황종·태주·중려·임종·무역의 5음으로 구성되어 있고, 음역은 탁임종·청무역으로 두 옥타브보다 조금 더 넓다. 5박이 한 장단이 되는데 장단 수는 다음과 같다. 1장 7장단, 2장 12장단, 3장 11장단, 4-10장단 각각 12장단, 1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의 가락들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즉, 2장은 청태주·청황종으로, 3장은 무역·청황종으로, 4장은 청임종·청태주로 이어지는 첫 장단의 가락으로 인하여 다음의 세 장단까지 각각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그 다음 장단부터는 모든 장의 가락이 같다. 즉, 2-10장까지 모두 세 장단만이 세 유형의 하나로 되었고, 그 다음부터는 모든 절의 가락이 같다는 뜻이 된다. 그 결과 3·5·6장이 같고, 4·7·8·9·10장이 같다. 가락은 장식음이 많기는 하지만, 진행이 부드럽고 세청을 비교적 쓰지 않아 꿋꿋하게 들린다. 종지는 1장이 상행 4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하행4도이다.
죽지사
건곤가(乾坤歌)라고도 한다. 중국에도 악부의 이름으로 <죽지사>가 있었는데, 그와 비슷한 가사로 향토의 경치·인정·풍속 등을 읊은 작품이다. <어부사>·<황계사>·<행군악> 등과 같이 분연체이며 후렴이 각 장마다 붙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황종·태주·중려·임종·남려의 우조적 5음음계이다. 6박을 한 장단으로 하며, 각 절의 장단 수는 각각 16장단인데, 이 중에서 원곡이 6장단이고 후렴이 10장단이다. 후렴의 가락은 4절 모두 같고 원곡도 같다. 따라서, 1절의 가락이 절의 바뀜에 따라 반복되므로 <죽지사>는 유절가곡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노래의 음역은 배임종-청임종까지 두 옥타브로서 주로 중음역을 많이 쓴다. 노래 가운데 배임종음은 4도 진행을 하게 되는데, 이때 배임종음을 굵게 떨고 나머지 음들은 정악과 같이 부드럽게 요성한다. 또, 남려에서 임종, 중려에서 태주로 하행할 때 퇴성을 쓴다. 원곡은 하행 4도, 후렴은 반대로 상행 4도 종지로서 짧게 끝맺는다. 가락을 이루는 주요 음정은 없으나 장식선율 외에 3도와 4도가 주축을 이루고 비교적 긴 리듬이 많으므로 시원하고 산뜻한 멋을 풍겨준다.
황계사
모두 8마루로 되어 있으며 1·3·5·7마루와 2·4·6·8마루는 같은 선율의 반복이며 1·2마루, 3·4마루, 5·6마루, 7·8마루로 각각 쌍을 이룬다. 노래할 때 속소리를 많이 사용하며 요성법은 아악과 남도민요의 요성법을 섞어 사용한다. 퇴성법은 평조에서 보이는 황종에서 남려로, 중려에서 태주로 퇴성하는 현상이 많이 보인다. 전성은 4도 상행할 때 가볍게 한다. 조는 뚜렷하게 구별할 수 없고 평조와 계면조가 섞여 있는 모습이며, 종지법은 시조와 같이 4도 하행 종지한다. 반주는 다른 가사곡들과 마찬가지로 없어도 무방하나 피리·대금·장구 등으로 편성된 수성가락으로 연주하며 이때 해금을 곁들이기도 한다. 장단은 4분의 6이다. 하규일에 의하여 전창되어 현재에 이르며 <삼죽금보>에 거문고보로 전한다. 사설은 임과 이별한 뒤의 허전한 마음을 그린 내용이다.
백구사
모두 79구이며, <백구가>라고도 한다. 벼슬에서 쫓겨난 처사가 대자연 속을 거닐면서 아름다운 봄날의 경치를 완상하는 내용이다. <청구영언>과 <가곡원류>에 실려 전하며, <남훈태평가>에도 비슷한 내용의 가사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임금에게 버림받은 작자가 백구가 나는 시골로 내려와 백구에게 놀라지 말라고 안심시키고, 함께 좋은 곳에 놀러 가자고 권유하는 대목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안개 자욱한 푸른 시내에 붉게 꽃피고 버드나무 파랗게 잎날 때, 깊은 골짜기 여러 봉우리에서 쏟아지는 폭포를 보고, 이곳이 바로 별천지라고 하였으며, 다음에 높은 봉우리 삐죽 솟은 시냇가에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그 곁에 푸른 대나무와 소나무 우거진 경치를 묘사하였다. 그리고는 명사십리 모랫길에 흐드러지게 핀 해당화가 모진 광풍에 뚝뚝 떨어져 나부끼는 한 폭 그림 같은 정경을 그리며, 상춘의 즐거움과 대자연 속에서 물외의 한적을 즐기는 자신의 흥겹고 경쾌한 심정을 노래하였다. 그러나 광풍을 견디지 못하고 뚝뚝 떨어진 해당화로 자신의 처지를 암유하는 등 즉경의 묘사 속에 암시적으로 서정을 이입하여 형상화하였다. 장단은 도드리이고, 모두 8절로 된 유절형식의 곡이다. 그러나 각 절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유절형식과 통절형식의 중간이라 하겠다. 1·2, 3·4, 5·6, 7·8절이 각각 짝을 이루고 있다. 음계는 계면조에 속하고, 종지는 시조와 같이 4도 하행으로 매번 이루어진다. 발성법은 가성을 많이 쓰는 여창시조에 가깝다. 전성은 중심음에서 4도 혹은 5도 상행할 때 중심음에서 나오고, 퇴성은 중심음의 5도 위 음에서 2도 하행할 때 많이 쓰는 아악의 계면조곡과 시조에서의 기법을 많이 쓰고 있다. 하규일에 의하여 전창된 곡으로, 가사 중 가장 정대하고 군자다운 선비풍의 곡이다.
춘면곡
조선시대의 가사 중 우수한 작품의 하나이다. 임을 여의고 괴로워하는 사나이가 기생집에 들러 춘흥에 탐닉함으로써 모든 괴로움을 잊어버리려는 심리를 표현한 작품으로, 육감적이고 퇴폐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모두 7마루이다. 노래할 때 속소리를 많이 사용하며, 요성법은 중심음에서 4도 위의 음을 떨어주는 서도소리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퇴성법은 태주에서 황종으로 하행할 때와 무역에서 임종으로 하행할 때 태주와 무역을 퇴성하는 예가 많이 보이며, 전성법은 시조·가곡과 같다. 조는 계면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루마다 음악이 끝날 때는 4도 위로 상행하여 사라지는 듯 가볍게 종지한다. 노래의 반주는 없어도 무방하나 반주를 사용할 때는 노래부르는 대로 슬며시 따라 하는 수성가락으로 피리·대금·장구 등으로 편성하며 해금을 곁들이기도 한다. 장단은 4분의 6이며, 하규일에 의하여 전창되어 오늘에 이른다. <청구영언>·<협률대성> 등에 사설이 전하며, <삼죽금보>에 거문고보로, <일사금보>에 양금보로 전한다. 사설내용은 따뜻한 봄날에 한 바람둥이와 아리따운 아가씨와의 상사지념을 그린 것이다.
매화타령
작자·연대는 미상이며 <매화가>라고도 한다. <청구영언>과 <남훈태평가> 등에 실려 전한다. 서두를 보면, “매화야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온다. 춘설이 하 분분하니, 필지 말지도 하다마는, 북경사신역관들아 오색당사를 붙임을 하세. 그물 맺세, 그그그물 맺세, 오색당사로 그그그물 맺세. 그물 치세, 그그물 치세, 부벽루 하에 그물 치세, 그그물 치세…”로 시작하여 매화꽃에 얹어 봄날의 사랑을 갈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물을 맺고 푸는 것으로 남녀간의 사랑이 맺고 풀리는 이치를 흥겨운 노랫가락에 얹어 불렀다. 음악적 배려에 의한 자구의 반복이 두드러지며, 사랑의 대상으로 북경에 사신갔다 오는 역관의 지위가 상승되어 가던 당시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반영하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 노래가 언제부터 12가사의 수구로 불리었는지의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대개 조선조 후기로 추측하고 있다. 장단은 4분의 6박자이고 리듬은 경쾌하다. 6박자의 8마디가 한 연을 이루며 모두 13연(마루)으로 분장되는데, 1연의 첫째·둘째 마디만 다를 뿐 2연 이하 10연까지는 2연의 반복이다. 또 11·12연은 같은 부분이고 맨끝 13연은 앞 두 부분의 음악적 특징이 함께 나타나고 있는 종결적 부분이다. 음계도 앞 10연까지는 고선·임종·남려·청황종·청태주 등이 중심을 이루며 중간 임종을 강하게 요성하고 있으며, 11연과 12연은 고선·남려·청황종·청태주·청고선이 중심음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 가운데서 청황종을 격하게 요성하고 있는 것이 앞부분과 다르고 마지막 13연은 두 가지 요소를 다 쓰고 있다. <매화가>는 음역도 좁은 편이고, 특히 상행종지형과 음계의 중간소리를 요성하는 점에서 서도소리와 비슷한 점이 많다. <청구영언>의 <매화타령>은 4단으로 되어 있고 <남훈태평가>와 1916년 2월에 현공렴이 지은 <신찬고금잡가>에는 ‘물아래’의 한 단이 더하여 5단으로 되어 있으며, 현행 <매화가>는 <남훈태평가>와 <신찬고금잡가>의 것과 같다.
전승자 정보
가사는 조선 후기에 가객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불려졌다. 가객이란 우리 나라 전통 가악 중 가곡·가사·시조를 잘 부르는 사람, 또는 그 노래들을 부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일컫는다. 조선 영조 무렵을 분수령으로 하여 전대의 작가들은 대개 한시문의 작자라 할 수 있는 데 비하여, 이후부터는 우리의 시가를 짓는 이가 대부분 직접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창곡가였다. 김수장·김천택·박효관·안민영 등이 가객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이들은 주로 가곡에 능했다. 현행 12가사의 전통은 이들 이후에 등장한 하규일과 임기준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한다. 1926년 이후 당시 이왕직아악부에서 하규일과 임기준을 초빙하여 가곡·가사·시조를 교수한 뒤로 이병성·이주환 등 선가자를 배출하여 가객의 맥이 이었다.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고, 예능보유자는 이양교(李良敎)와 정경태이다.하규일은 근세가곡의 거장으로 작은아버지 중곤에게 가곡을 배운 다음, 중곤의 스승인 최수보에게 사사하여 대성하였다. 그는 1911년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상다동(上茶洞) 여악분교실장(女樂分敎室長)을 겸하였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12년에는 대정권번(大正券番)을 창립하고, 1924년에는 조선권번을 창립하였다. 1926~37년 이왕직아악부 촉탁으로 취임하면서 가곡·가사·시조를 전수하였다. 1928년 빅터레코드회사에서 가곡을 취입하였고, 1931년 가곡집 <가인필휴>를 펴냈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가사 중 <백구사>, <황계사>, <죽지사>, <춘면곡>, <어부사>, <길군악>, <상사별곡>, <권주가> 등 8곡이 그의 전창으로 남아 있다.임기준 역시 하규일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가사와 시조의 명창이다. 1939년 6월부터 9월까지 이왕직아악부 임시촉탁으로 부임하여 이름난 가인 하규일이 부르지 않던 12가사 중 <수양산가>, <처사가>, <양양가>, <매화타령>의 네 곡과 사설지름시조, 수잡가 등 30여 곡을 전수하였다. 현재 전창되고 있는 네 곡의 가사와 사설지름시조의 대부분은 임기준의 전창에 속하고, 장사훈에 의하여 1939년에 채보된 악보가 전하고 있다.하규일과 임기준 이후 가사의 명맥을 유지시킨 사람은 이주환이다. 이주환은 1931년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를 졸업하고 이왕직아악수·아악수장·아악사를 지냈고, 광복 후 구왕궁아악부 아악사장을 지냈다. 1951년 국립국악원 개원과 더불어 초대원장에 임명되었으며,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장을 겸임하였다. 예술원회원·서울대학교음악대학강사·한국국악학회 이사·가곡보존회 회장·한국정악원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영제·함화진·최순영 문하에서 아악을 배웠으며, 원래 전공은 피리였으나 특히 하규일에게 가곡·가사·시조를 배워 일가를 이루어 정부로부터 가곡·가사의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목은 타고나지 못하였으나 피나는 수련과 정진으로 대성한 가인이었다.1975년 7월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기능보유자로 지정받은 석암 정경태는 전라북도 부안군 주산면 사산리에서 1916년 2월 7일 3백석의 지주 정종운의 3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사랑채에 독서당을 차려놓고 일가와 행세하는 집 아이들 교육에 힘쓰시던 아버지는 주산에 보통학교가 생기자 곧 신학문쪽으로 공부를 돌리게 하였지만 사랑방에 출입하는 문장가와 풍류객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예술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7세에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8세에 주산 보통학교에 입학, 9세에 나이봉 훈장에게 서예와 한문을, 12∼14세에 유학자 정도경으로부터 시문을 사사받고 사서삼경을 수학하였다.그때 이미 정경태는 한시 250수와 50여 편의 작문을 지어 지니고 있었다. 며칠이면 다 외어버릴 책을 수개월 동안 하는 학교 공부에 회의를 느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다시 본격적인 서당공부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15살이 되자 한 10리쯤 떨어진 이웃 마을인 돌무산의 진씨 집에 장가들어 재행(再行)을 가서 시회에 나가 장원을 하자 10살 위의 동서 김한술이 문장에는 졌지만 시조는 내가 잘할걸 하며 하객들 앞에서 부른 그 한 가락 시조창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형용할 수 없는 소리에 감동되어 신방에서까지 외어 읊었다 한다.열 살 위의 동서 김한술씨는 시조창과 인연을 맺게 한 첫 번째 스승이다. 신혼 초부터 시조에 재미를 부친 정경태는 레코드판을 닥치는 대로 모아 따라 부르고 시조하는 선생이 어디에 왔다는 소식을 듣기가 바쁘게 찾아가 뵙고 며칠이라도 가르침을 받거나 아예 집으로 모셔다 융숭한 대접을 베풀며 가르침을 청했다. 한번 마음먹으면 끝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그 길로 한마을의 오성현으로부터 시조를 배우기 시작하고 고흥의 김춘경을 모셔다 더 배웠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도삼·오윤명으로부터는 상사별곡·처사가 등의 가사와 가곡을 배우고 하규일의 8가사와 가곡 남녀창 음반을 구입하여 혼자서 익혔다. 18세 되던 해에는 장성 백양사에서 지방의 명가 임재희로부터 가사를 사사하고, 2년 후에는 정읍에 살던 대금의 명인 죽민 전계문으로부터 가곡 여창을 사사하여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그리고 23세 되던 39년에는 방송을 듣고 서울로 올라와 마침내 당대의 선가 두봉 이병성을 찾아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때 정경태는 두봉으로부터 너무 진도가 빠르다는 질책을 받을 정도로 두봉의 예능을 빠르게 전수받았다. 곧 시와 율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그는 박헌봉과 어울렸고, 시조3장을 방송하기도 하였다. 두봉선생에게 12가사와 가곡을 모두 익히고 부안으로 내려와 있었는데 2년 후에 그 시골로 내려 와 72일 동안을 유하시면서 가사와 가곡을 다시 배워주고 그 후 3년 동안을 더욱 정진하였다. 또한 정경태는 어린시절부터 서화를 익힌데다 의재(毅齋) 허백련과 이당 김은호로부터 필법과 사군자를 배워 이 방면에도 출중한 솜씨를 가졌으며 장기와 바둑에도 뛰어나며 술서를 탐독, 음양학에도 재주를 보여 가는 곳마다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한편 가사·가곡·시조 등 모든 정가에 일가를 이룬 정경태는 1944년부터는 배우는 단계에서 가르치는 단계로 넘어와 있었다. 이때 송창섭, 김소란, 박향란, 김옥희에게는 가곡 여창을, 유종구, 고민순에게는 남창을 전수시켰다. 이리향제 줄풍류의 예능보유자 강낙승도 이 무렵부터 그에게 12가사와 가곡남창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해방 이듬해에는 그 동안 꾸준히 채보해 온 가락을 정리하여 <조선창악보>를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그 다음해에는 전라북도 학무과에 초빙되어 도내 초중학교를 돌며 한글에 대하여 순회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안농고의 국어교사로 발탁되고 이듬해인 1948년에는 전주명륜대학의 전임강사로 초빙되었으며 6·25후인 1951년에는 김제고교로 옮겼다가 53년에 전주고교 교사로 전임하였다. 전주고교 교사시절에는 특별활동반으로 국악반을 만들어 교사와 학생들에게 시조를 보급하고, 전주국악원 창립의 산파역을 맡는 한편 단소·대금·북가락·범패 등의 채보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스스로 춤·거문고·단소 등도 계속 배웠다. 그리고 1955년에는 10여 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채보하고 정리하여 온 국악보를 간행해 냈다. 이 악보는 18종의 악기연주법을 비롯하여 가사·가곡·시조는 물론 판소리·민요·단가·가야금병창 등에 이르기까지 국악의 주요분야를 총망라하고 있어 선구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주고교를 끝으로 교직생활을 마친 정경태는 풍류객으로 시조와 가사를 부르며 전국을 순유하여 ‘정삿갓’이란 별명을 얻었다. 정경태는 이때 지방에 따라 각기 다른 시조의 가락을 통일하였다. 경제·내포제·완제·영제·반영제·원제 등으로 각기 다른 가락을, 가사와 가곡을 배운 것을 밑거름으로, 반영제를 바탕으로 하나의 체계로 통일하니 전국의 시조인들이 이를 석암제라 부르고 있다.김천에서 대전으로 거처를 옮긴 정경태는 `1961년 대한시우회를 결성, 1963년 대한시우회를 창설하였다. 정경태는 전국에 지부와 지회를 조직하고 전국에 시조·가사·가곡을 보급, 국민개창운동을 벌이는 한편 매년 전국시조·가사·가곡 경창대회를 열고 있다. 1975년 7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자 그 해 11월에는 국립극장에서 가사·가곡발표회를 가졌으며 이후 가사와 시조, 후학지도와 보급운동에 전념해 왔으며 1979년에는 국악계 원로들로 대한정악회를 창설, 회장직을 맡아 국악의 올바른 뿌리와 줄기를 찾아 그것을 계승 보급하는 데 온 힘을 쏟아 왔다. 그의 저작활동도 특기할 만하다. <가사보>를 비롯하여 <시조보>·<가곡보>·<조선창악보>·<아악보>·<국악보>·<가악보>·<증보주해시조보>·<시호록>·<금립시집직역본>·<고금천문학> 등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악보정보
가사의 악보를 최초로 담은 거문고악보는 19세기 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삼죽금보>인데, 이 악보에 <상사별곡>·<춘면곡>·<길군악>·<매화곡>·<황계곡>·<권주가> 등 여섯 곡이 전한다. 현행 가사의 악보로서 정간보로 채보된 악보가 처음으로 출판된 것은 이주환(李珠煥)의 <가사보(歌詞譜)>이고, 그 뒤 이양교(李良敎)의 <십이가사전(十二歌詞傳)>이 출간되었다. 이 두 가지 정간보는 현행 12가사를 장구 반주보와 함께 기보해 놓았다. 이밖에 그래프식 기보법과 정간보로 채보한 정경태(鄭坰兌)의 <가사보(歌詞譜)>가 있다. 5선보로 채보된 악보로는 김기수(金琪洙) 채보의 <한국음악> 제9집이 있다.
관련도서
<개정판 국악통론>, 서한범, 태림출판사, 1995 <국악개론>, 장사훈·한만영 공저, 사단법인 한국국악학회, 1975 <국악대사전>, 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84 <전통음악개론>, 김해숙·백대웅·최태현 공저, 도서출판 어울림, 1997 <최신국악총론>, 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9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91 <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일조각, 1984 <한민족음악론>, 권오성, 학문사, 1999
용어해설
육보(肉譜) : 육보는 구음(악기의 소리를 입으로 흉내낸 소리)으로 표시한 악보이다. 육보는 악기마다 각기 다른 구음을 가지고 있어 번거롭고, 구음 한자에 두 음 이상이 해당하는 경우도 있어 육보만으로는 그 실음을 파악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대개 합자보와 함께 사용되었다.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 정악을 유지, 보급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교육기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음악교육기관이었던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의 후신으로 1911년 6월에 발족하였다. 사무소는 광화문 기념각 뒤에 있던 전 기로소에 있다가 1912년 5월 재동 취운정 안에 있는 일가정으로 옮겼으며, 1915년에는 수송동 숙명여자고등학교 서쪽에 있던 한옥으로 이전하여 6·25 직전까지 활동을 하였다. 입학자격은 중등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로 15세 이상으로 규정하고, 학생 정원은 50명이었다. 교육내용으로 전공과목은 조선악과에 가곡·거문고·가얏고·양금·단소·생황, 기타 취악을 두었고, 서양악과에는 악리·창가곡조·풍금·사현금을 두었다. 수업시간은 조선악과가 매주 6회로 하였고, 서양악과의 성악전공은 매주 6회, 기악전공은 매주 5회로 하였다. 수업료는 기악이 매월 1원, 성악은 매월 50전으로 하였고, 서양악과의 풍금·사현금은 매주 1회로 하되, 매회 20전으로 하였다. 수업기간은 가곡과 거문고는 1년, 가얏고와 단소는 6개월, 양금은 3개월, 풍금·사현금은 각 1년이었다. 대표적인 교사는 하규일·명완벽·함화진·김경남·김인식 등이었다. 연구위원은 홍긍섭·한만용·함재운·명완벽·하규일·김인식의 6명으로 <악학궤범> 3책을 편집하였고, 거문고보·양금보에 의한 남창·여창 반주보 4책을 편집하였으며, <영산회상>과 <여민락>을 서양의 5선보로 채보하였다. 이 가운데 김인식이 5선보로 채보하여 출판한 양금을 위한 <영산회상>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1913년 10월 현재 이왕가 잡문서에 나오는 졸업생과 재학생을 보면 조선악과와 서양악과를 합하여 졸업생은 제1회에는 18명, 제2회에는 20명이었으며, 재학생은 49명이었다. 이후 정악전습소의 활동은 1916년부터 차츰 둔화되었다. 정악유지회의 지원이 흐려지자 차츰 풍류방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극심해진 1944년에는 46년만에 잠시나마 문을 닫게 되었고, 광복 후는 한국정악원(韓國正樂院)으로 다시 문을 열어 현재에 이른다. 1943년 무렵까지 정악전습소를 지켜온 사람은 최영재·김인수·민완식·김윤덕·최성환 등이었다. 정악전습소는 흩어진 국악의 맥을 계승하게함은 물론, 이상준·홍영후 등을 배출하여 우리나라 초기의 서양음악 발전에도 끼친 바 공이 크다.
연계정보
-가곡원류(歌曲源流)
-악장가사(樂章歌詞)
-청구영언(靑丘永言)
관련사이트
가곡원류
관련사이트
한국정가원
관련사이트
정경태
관련사이트
풍류마을
관련사이트
국립국악원
관련사이트
디지털한국학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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