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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낙선재 난간(60110) 크게보기 창덕궁 낙선재 난간(60110) 크게보기
창덕궁 낙선재 난간(60110)
문양설명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에 다시 짓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가장 오랫동안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궁 역할을 하였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大造殿)을 비롯한 침전에서 불이 나서 희정당(熙政堂) 등 19동의 건물이 불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을 헐어서 창덕궁의 건물들을 재건하였다. 창덕궁은 197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낙선재(樂善齋)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로 헌종 12년(1846년)에 건축하였다. 낙선재는 상중(喪中)에 있는 왕후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단청을 하지 않았다. 낙선재 일원의 건물은 후원의 빼어난 조경으로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문양장식이 주목된다. 낙선재,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의 세 건물이 옆으로 길게 붙어 있고, 그 뒤편에 자연스럽게 후원을 조성하였다. 낙선재의 앞과 오른쪽에는 행랑이 있어서 외부와 경계를 짓고 있으며, 행랑 남쪽 가운데에 장락문(長樂門)이라는 출입문이 나 있다. 1963년 일본에서 돌아온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이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창덕궁 낙선재 난간의 난간대를 받치고 있는 하엽이다. 연꽃의 모양으로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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