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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숙 (1949.7.23~)

예술가
김금숙 (1949.7.23~)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76.8.11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전수 장학생 선정 1980.12.31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 선정 1983.6.1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조교 선정 1990.10.10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후보 선정
학력(계보)
1962.2. 청구고전성악학원 입학 1965.2. 선소리산타령 원장 이창배 문하 제1회 졸업
생애(약력)
1964.6. 제3회 신인예술상 신인국악상 수상 1983. 무형문화재예술단 창단공연(매월 1회 발표공연) 1984.6. 제10회 전국대사습놀이 차상 수상 1985.6. 제11회 전국대사습놀이 장원상 수상 1985.7. 제1회 경기민요의 밤 공연(공간사랑) 1986.3. 제20회 무형문화재예술단 공로표창 수여 1986.9. 이화여자대학 음악대학 국악과 경서도소리 강사 1986.9. 제주도 한라문화제 최우수상 수상 1988.8. 제주한라문화제 명창부 최우수상 수상 2002.11. 공개행사 발표공연(국립국악원 예악당) 2003.1. 설ㆍ대보름맞이 중요무형문화재 공연(경복궁)
리뷰
목표 높고 뚜렷한 소리꾼 지난해 10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의 예능보유자 후보로 인정된 김금숙(金錦淑)씨는 타고난 재능, 일찍 시작된 탄탄한 교육, 부지런한 성실함이 있고 도달하고 싶은 목표가 높고 뚜렷한 젊고 의욕 있는 소리꾼이다. “국민학교 때 김옥심·이은주 선생의 소리를 라디오로 듣고 반했어요. 금성플라스틱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분들의 소리에 빨려 들어갔죠. 그 소리에 매혹되어 둘째 언니한테 졸라서 종로에 있던 청구소전성악학원에 들어가게 됐죠.” 청구고전성악학원은 6·25후 선소리, 산타령의 인간문화재 이창배씨가 세운 학원이었다. 그가 이 학원의 문을 두드린 것은 14살, 국민학교를 졸업했을 때였다. “내가 제일 어린 학생이었어요. 1965년 이 학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성경린·이충선·허호영씨 등 국악계의 여러 어른들을 모시고 졸업식을 했습니다. 졸업생이 13명이었는데 지금은 그 중 막내였던 저만 계속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김옥심·이은주씨 등 대가들의 소리에 반한 어린소녀는 3년간 이창배·정득만씨 문하에서 배우면서 모범생, 재주있는 학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결석 한번 안 했으니까요.” 그는 거기서 시조·가곡·가사·12잡가를 두루 배웠다. 무섭기로 소문난 정득만 선생님이나 다른 선생들에게 꾸지람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는 총기 있고 재주 있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어린 민요학도는 18세쯤 됐을 때 커다란 실망을 겪었다. “선생님이 하루는 한복 챙겨 가지고 어딜 가서 노래를 하라고 시키셨어요. 가서 보니 어느 집 환갑잔치 였어요. 그런 어린 마음에 큰 충격이었어요. 환멸 같은 거였어요. 그때부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서 학원근처에도 안 갔죠.” 그러면서 그는 미용학원에도 다녀보고 마음의 방황을 겪다가 결혼을 했고 아기엄마가 됐다. “첫아이가 2살쯤 됐을 때 이춘희·김혜란·안정란 등 연배는 나보다 조금 우지만 소리는 엇비슷하게 시작한 사람들이 TV에 출연해서 노래하는 걸 보고 누르고 살아온 소리에 대한 욕망이 다시 일었어요. 이창배 선생님을 다시 찾아 뵈었죠. 선생님들은 모두 무척 반기시고 일본 전국순회공연에 참가시켜 주셨어요.” 공백기를 거친 후 다시 돌아온 그는 이제 성인으로서 경기민요의 젊은 재능으로 부각이 됐고 문화재지정과 함께 이은주씨의 전수생으로 발탁됐다. 성인이 돼서 새로 만난 경기민요의 스승 이은주씨는 어린시절 그에게 소리의 매력을 일깨워준 명창이었고 여자로서 예인으로서 그가 존경하는 큰 어른이다. “주부로서도 철저하시고 기독교인으로서도 충실하시고 노래에서는 물론 천재 예술가시죠.” 그는 1988년부터 연정국악원상임단원 민요강사로, 선생님께 배우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로 바쁘게 산다. 대전에서 그에게 배운 민요동호인 세력은 이제 상당히 크다. 주부제자가 1천명이 넘고 대전경기민요동호회 대전민요연구회 등의 모임으로 발전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서울로 대전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는 그에게 남편 송춘호씨는 냉정한 비판자다. 김옥심·이은주 선생의 레코드를 구해 들려주면서 그 소리 따라가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비평을 한다. “민요는 생활의 노래고 생활 자체죠. 누구나 공감하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죠.” 서울만이 아닌 지방 국악계에 정성을 쏟는 이유도 더 넓은 우리가락의 전파를 원하기 때문이다. <일간스포츠>, 구히서, 1991년 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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