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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계월 (본명:이경옥, 1921.10.19~)

예술가
묵계월 (본명:이경옥, 1921.10.19~)
출생지
서울시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75.7.12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34.3. 주수봉(住壽鳳)에게 경기도창 사사 1936.10. 최정식(崔貞植)에게 경기도창 사사 1938. 이문원에게 삼설기 사사
생애(약력)
1936. 정동방송국 출연 1939. 부민관 명창대회 출연 1957. 신세계, 유니버셜, 20세기 등에서 레코드 취입 1960.1. 한국민요연주회 부회장 1962.1. 제일동포 위문공연 1962. 제일동포 위문 일본전역순회 공연 1963.1. 한국국악협회 이사 선임 1964. 동아방송 주최 명인명창대회 출연 1965.1. 한국국악협회 민요분과 위원장 1965.1. 한국국악협회 민요분과 위원장 1968.4. 제1회 세종상 수상 1971.~2003. 한국민요연구회 부회장 1972.~2003. 한국국악협회 이사 1979.1. 한국국악협회 고문 1981. 경기민요전수소 개설 및 운영 1981.10. 중요문화재 발표공연 1990.10. <인생 70 소리 60> 발표회 1992.11. 국악대상 수상 1995.9. 묵계월-1995 끝없는 소리의 길 공연 1995.12. KBS 국악대상 특별공로상 수상 1996.10. 제27회 중요문화재 발표공연 1997.10. 제29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문화훈장 보관 수여 1998.10. 중요무형문화재 무대종목대제전(17개 종목) 1998.11. 1998한국의 신명, 그 소리의 몸짓 1999.11. 묵계월 경기소리 및 삼설기 발표회 2000.9. 제5회 소민연극상 수상 2001.10. 충주세계무술축제 참가 공연 2002.6. 월드컵 문화행사공연(국립극장 문화마당) 2003.2. 경서도학회 고문
리뷰
60년동안을 경기민요로 일관 <삼설기>송서의 맥 홀로지켜 경기민요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경기도와 그 주변에서 불러지는 민요를 말한다. 장단은 굿거리·자진타령·세마치 등이 쓰이며 ‘솔’로 마치는 창부타령형, ‘라’로 마치는 한강수타령형, ‘도’로 마치는 경복궁타령형으로 나누어지는데 대개 흥겹고 구성지며 경쾌하다. 곰보타령, 병정타령, 기생타령, 맹꽁이타령, 방아타령, 양산도, 도라지타령, 매화타령, 개성난봉가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경기민요에는 이처럼 짧은 장절형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절로 나누어지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설시조를 확대한 모습으로 부르는 통절형식의 긴 잡가가 있다. 이것을 ‘경기잡가’라 이르며 12종이 있어 12잡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는 바로 이 12잡가를 지정한 것이다. 이 12잡가는 서울 문안과 근교의 장인과 밭장이 출신 소리꾼들에 의하여 전승 발전되어 왔으며 특히 사계축 소리꾼들이 잘 불렀다. 사계축이란 만리재와 청파동 일대를 말한다. 조선조 후기에는 박춘경 같은 명창이 나왔고 그의 문화에서 송수봉, 최경식이 배출되었으며 김태운, 이창배 등의 명창이 나왔다. 현재 경기민요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는 묵계월, 이은주, 안비취 세 사람이 있다. 그 중 지난 10월에 예도 60년 및 고희기념공연을 가진 묵여사를 신당동에 있는 경기 12잡가 전수소로 찾아갔다. 묵계월여사의 본디 이름은 이경옥이다. 이경옥은 서울의 광희동에서 그의 아버지지가 매듭과 사세 등을 만들어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는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서울토박이인 묵여사는 광희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이웃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듣고 흥얼거릴 정도로 어려서부터 남달리 소리에 대한 소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이 광대가 되는 것을 그냥 놓아둘 수 없다며 바깥에도 못나가게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생각다 못해 그의 노래솜씨를 아껴주는 이웃 이씨의 주선으로 낙원동의 묵씨 집안에 수앙딸로 보냈다. 이때 그의 나이 열 살이었다. 말하자면 그저 소리가 좋고 무작정 배우고 싶은 심정에서 아버지의 반대에 맞서 가출한 셈이다. 그의 수양어머니는 그에게 휘영청 밝은 달 속의 계수나무처럼 만인이 우러러보는 예도의 명인이 되라며 계월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가 열 한 살 때부터 수양어머니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니 올해로 소리판인생 60년을 헤아린다. 수양어머니는 그의 소리를 살리기 위하여 가정교사를 대주기도 하였으며, 좋은 선생을 골라가며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기도 하였다. 맨 처음에 사사한 사람은 이광식이었다. 이광식은 예도를 익히려면 수신제가를 먼저 하여야 한다며 엄하게 교육을 했다. 이 곳에서 그는 어린 나이에 경기민요에 대한 당찬 열정을 보여 그의 스승을 놀라게 하였으며 천재적인 소질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이광식에게 사사하기 2년만에 스승의 모든 것을 익힌 그는 이어 당대 12잡가의 일인자인 송수봉과 소리뿐만 아니라 제자양성 신 민요작곡으로 우리 국악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최정식으로부터 12잡가의 모든 것을 섭렵하여 경기창과 서도창을 두루 익혔다. 그는 또 송서(고문이나 옛 소설에서 가락을 구성지게 읽어나가는 것)의 명창 이문원에게 삼설기(옛 단편소설을 노래 가락으로 읽는 것)를 전수받아 경기민요의 기목으로 자리를 굳혀갔다.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이 알려진 그는 15세 때에 무대에 끼어들었고 그해에 당시 경성방송국의 국악프로그램에 출연, 이름을 날렸으며, 18세 때에는 당시 부민관에서 개최된 명창대회에 출전하여 당당히 입상하면서 명창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해방 후에는 음반 취입, 재일동포 위문차 순회 공연하였으며 미국에도 건너가 순회공연을 가졌으며 한국국악협회의 민요분과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왔다. 1968년에는 당시 문화공보부 주최 ‘제1회 세종국악상’을 수상했으며, ‘TBC-TV에서 민요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또한 1970년대에는 한국 민요연구회 부회장과 한국국악협회 이사를 역임하면서 우리 민요의 전승, 보급에 남다른 열의를 보여 오기도 하였다. 지난 1975년 경기민요가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면서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인정받기에 이르자 이 때부터 그는 후학의 양성에 온갖 열정을 쏟아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보유자후보 임정란을 비롯하여 이수자 고주랑, 임수현, 조경희, 정경숙, 박순금 등은 모두 그의 문하생들이다. 묵여사는 지난 10월 13일 오후 호암아트홀에서 <인생 70 소리 60>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가졌다. 그의 문하생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마련해 준 자리였다. 그는 이 공연에서 12잡가의 하나인 출인가와 그가 홀로 지켜오고 있는 송서 <삼설기> 그리고 ‘긴아리랑’ 등을 불러많은 박수 갈채를 받았다. 묵여사는 11세때부터 고희에 이르기 까지 60평생을 고스란히 소리에 온갖 정열을 쏟아부으며 외길인생을 살아왔으며 고희를 넘긴 지금도 전수소에서 전수생들에게 그의 모든 것을 물려주기 위하여 남다른 정열을 쏟고 있다. 묵여사가 가장 든든한 후계자로 지목하고 있는 임정란씨는 묵여사를 “어머니 같이 포근하고 정스러우면서도 소리를 가르칠 때는 그렇게 엄할 수가 없다.”고 했다. 묵여사는 “제자들이 더도 덜도 말고 자신과 똑같게 소리를 하도록 가르쳐 놓는게 유일한 소원”이라며 후진양성에 여념이 없었다. 묵여사는 “모든 국민이 우리 음악을 사랑하도록 어려서부터 국악교육을 보다 당연화하고 전수생들이 국악공부에 전념할수 있도록 보다 많은 전수 장학금이 지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월간 문화재>, 1990년 12월, 제77호 재인-전통 예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73 <b십이잡가에 실려온 한평생, 영원한 소리꾼 <삼설기>는 단연 독보적 백이숙제 착한 이와 도척 같은 몹쓸 놈도 죽어지면 허사로다. 역려건곤에 부생이 악몽하니 즐거움도 얼만고 병측야유하며 독시담론 자락하니 한가하기 측량없다. 일생이 이러하니 상산사호 죽림칠현 한가롭다… 깊은 밤, 은근한 석유등잔 불빛이 창호지 문틈으로 새어나온다. 동네 할머니 대여섯이 둘러앉아 이 집 며느리가 읊는 알듯말듯한 소리를 내 신세와 견줘가며 듣고 있다. 소리하는 며느리가 지칠까봐 이따금씩 ‘그려!’ 하며 추임새로 부추긴다. 구슬픈 듯 하면서도 청아한 목소리로 읊어대던 며느리의 소리가 바로 <삼설기>다. 아무나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책 읽고 편지 읽는 투의 그 목청인 것이다. <삼설기>는 수많은 경기잡가 중에서도 ‘족보있는 소리’다. 잡가에 능한 소리꾼이 많건만 묵계월씨(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경기민요)의 <삼설기>는 단연 독보적이며 발군이다. 그래서 묵씨는 ‘삼설기가 기막히다’는 칭송을 들을 때마다 16살 때 수양어머니(이정숙) 집 사랑방까지 찾아와 그 소리를 가르쳐 준 이문원(李文元) 선생을 잊지 못한다. 국악 1세대의 대표적 인물 인간문화재 묵계월씨는 또래 소리꾼 이은주, 안비취씨와 함께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이다. 추석이나 설 등 민족 고유명절 때면 TV를 통해 ‘묵계월과 그 문하생들’을 만날 수 있다. 깨끗한 한복에 쪽진 머리로 아무 시름없이 소리만 하고 살 것 같은 묵씨에게도 인생의 우여곡절은 깊다. 그가 살아온 한 생애는 묵씨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동시대를 살아온 동료, 선·후배 국악인들인 국악 1세대들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묵씨는 서울에서 나고(중구 광희동) 자란, 순 서울 토박이다. 가난한 서울 양반인 아버지(이윤기)의 넷째 딸로 태어나 열한 살 때 소리에 이끌려 수양 어머니에게로 가면서 운명이 확연하게 달라진다. 그 집에 살던 양언니 이름이 묵계홍이었고, 그 집안 성을 따라 묵계월(墨桂月)이라는 예명을 얻게 된다. 그때 이후 본명 이경옥(李瓊玉)을 버리고 예명 묵계월을 쓴지 60여년이 훨씬 넘었다. 수양 어머니는 소리선생으로 이광식씨를 불러 여창지름, 남창지름, 시조, 가사 등의 기초를 익히게 했고 13세 때 주수봉 선생을 만나 경기 12잡가를 속속들이 배우게 된다. 배워갈수록 자그마한 몸매에서 터져 나오는 다부진 소리에 주위 사람들이 매료됐고, 가는 곳마다 ‘묵계월 뿐’이라는 칭송을 듣게 되자 기왕 소리할 팔자라면 이골나게 배우자고 마음을 다진다. 이윤태 선생을 독선생으로 모셔다가 붙임새를 새로 보태고, 최정식 선생을 찾아가 경기민요를 모두 배운다. 18세 때는 경성 방송국의 국악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해 이름을 날렸고, ‘부민관 명창대회’에 출연하면서 장안의 명창이 되어 소리의 길을 탄탄하게 가꿔 나갔다. 해방, 6·25 등 민족의 격동기를 겪으면서도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고 수복 후 서울에 돌아와서도 소리를 계속해 국악계의 대들보로 자리를 굳혔다. 이래서 묵씨는 상·중·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특히 중·상청부분에서 꺾어 올려치는 끝막음 소리는 그의 제자만이 이어받아 낼 수 있는 일품의 경기민요다. 임정란(준문화재), 지화자(조교), 조경희, 박순금…등 문하에서 배우던 전수생은 모두 이수자가 되어 있다. 서울 중구 무학동 중부소방서 건물앞 ‘경기 12잡가 묵계월 전수소’에는 오늘도 문하생이 줄을 잇고 있어 묵씨의 경기민요 맥은 탄탄하다. 다만 소리 좀 할만하면 결혼과 함께 작파해 버리는 제자가 허다해 들인 공력이 아까울 때가 많다. <적벽가> 등으로 무형문화재 지정 경기잡가는 ①유산가 ②적벽가 ③제비가 ④소춘향가 ⑤집장가 ⑥형장가 ⑦평양가 ⑧선유가 ⑨출인가 ⑩십장가 ⑪방물가 ⑫월령가 등 12잡가로 나뉘어져 있다. 이중 묵계월은 <적벽가>, <출인가>, <선유가>, <방물가>로 1975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고 나머지는 이은주씨 안비취씨 몫으로 구분돼 있다. 1971년 묵계월, 이은주, 안비취, 김옥심, 이소향씨 등이 만든 ‘민요연구회’는 이들 경기민요꾼의 권익을 증진시키며 사회적 예우를 격상시켰다. 1968년 ‘문화공보부’에서 주는 ‘제1회 세종상’, 1992년의 ‘국악대상’ 등 수상 경력도 꽤 있는 묵계월씨는 현재 ‘국악협회’의 고문직을 맡고 있다. 묵계월씨는 이제 나이 70을 넘어 80을 바라보게 되니 별 생각이 다 든다. 아차하면 한달이고 문득 깨어보면 한 해가 가 버리고… 젊은 제자들이 찾아들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수시키려고 사정하며 가르치는 일만이 유일한 낙이다. 한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청춘에 짓밟힌 애끓는 사랑 눈물을 흘리며 어디로 가나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 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묵계월씨는 임과의 사랑, 인생무상이 듬뿍 담겨져 있는 강원도 민요도 즐겨 부른다. 애틋하면서도 홀로 서려는 기개가 확실한 애곡을 부를때면 살아온 한 평생이 그대로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세계일보>, 이규원, 1992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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