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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1938.11.20~)

예술가
이영희 (1938.11.20~)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74.6.12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전수 장학생 선정 1976.5.31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이수자 선정 1982.9.1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후보 선정 1991.5.1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53.~1984. 이덕렬, 한일섭, 신쾌동, 김윤덕에게 가야금 산조 사사 1961.2.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1976.5. 전수 장학생으로 가야금산조
생애(약력)
1961.11. 공보부 주최 전국신인국악경연대회 1등 수상 1962.4.~1978. 한국국악예술학교 교사 1962.4.~1978.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야금 독주회 1968. 멕시코올림픽, 뮌헨올림픽 및 북미, 남미, 아프리카 순회 공연 1969.3. 문화공보부장관 감사패 수여 1973.4. 국민훈장 석류장 서훈 1980.~1981. 제6회~제7회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 심사위원 1983.~1985. 제1회~제3회 경주신라문화제 심사위원 1985.3. 중앙대학교 국악과 강사 1999.10. 공개행사 발표공연(국립국악원 우면당) 2002.11. 제2회 산조축제 및 학술회의(영암실내체육관) 2002.11. 공개행사 발표공연(국립국악원)
리뷰
40여년을 오직 가야금으로 일관(一貫) 지금도 매일 2시간씩 자기수련(自己修鍊) 우리 민속음악을 성악과 기악으로 크게 나누고 각각 그 대표적인 음악을 꼽으라면 판소리와 산조를 들게 된다. 산조는 시나위가락에서 나온 기악 독주곡이다. 산조는 가야금산조가 가장 오래되었고 그 다음 거문고산조가 연주되었는데 최근에는 대금산조·피리산조·해금산조 등도 연주되고 있다. 가야금산조의 장단은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로 되어 있는데, 유파에 따라서는 굿거리·엇모리가 더 있으며 휘모리 다음에 단모리(세산조시)를 더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나 느린 장단에서부터 시작해서 중간장단을 거쳐 빠른 장단으로 끝내게 되어 있다. 산조에는 여러 유파가 있어 제나름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데 가야금에 그 유파가 가장 많다. 유파는 바디(流) 또는 제(制)라고도 하는데 이는 주로 사사(사사)계보와 지역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가야금산조의 유파는 분류방법과 그 명칭에 다소 혼선이 있으나 대체로 강태홍류, 김병호류, 김윤덕류, 김죽파류, 성금연류, 최옥산류의 여섯 유파로 나눈다. 오늘날 가야금산조는 이들 여섯 유파가 모두 연주되고 있으나 그 중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김윤덕류와 김죽파류 및 최옥산류 뿐이다. 김죽파류는 양승희씨(보유자후보)가 그 맥을 잇고 있으며 최옥산류는 함동정월(예능보유자) 씨에게 전승되어 오고 있다. 김창조(金昌祖), 안기옥(安基玉), 정남희(丁南希), 김윤덕(金允德)으로 이어져온 김윤덕류의 산조는 현재 예능보유자 이영희(李英熙)씨가 이어가고 있다. 말하자면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는 함동정월과 이영희의 두 예능보유자에 의하여 그 굵직한 맥이 이어져 가고 있는 셈이다. 그 중 함씨는 연로한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대외적인 공연을 거의 하지 않고 있는데 반하여 이씨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대에 올라 원숙한 기량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전성기를 맞고 있다. 지난 7월 10일 오후 ‘국립국악원 소극장’에서 있은 <일요명인명창전>에서는 이영희씨의 김윤덕류 가야금산조 연주가 있었으며 청중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한번 무대에 서고 나면 2~3일간은 꼼짝없이 몸져누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며칠이 지난 뒤에야 서울 반포동에 있는 그의 아파트로 찾아갔다. “가락에 연주자의 기와 혼이 담기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음악이라 할 수가 없지요. 한시간 남짓 연주하는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쏟아낸 기(氣)를 되찾기 위해서는 며칠 쉬어야 해요. 감상하는 입장에서 보면 연주하는 게 쉬워 보일지 모르지만 연주자로서는 뼈를 깎고 피를 말리는 일입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힘을 손가락 끝에 모아 농익은 산조가락을 담아내야 하니까요.” 그래서 이씨의 손가락 끝은 바위돌처럼 단단한 못이 박혀 있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의 예능보유자 이영희씨는 1938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1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세 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번화가에서 신발대리점을 하는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민속음악이 성한 호남에서 자라다 보니 자연히 일찍부터 음악에 눈과 귀가 뚫리게 되었다. 그가 처음 배우려 한 악기는 피아노였다. 지금이야 지천으로 많은 게 피아노교습소이지만 그때만 해도 그리 흔치 않았다. 이웃 천주교회에서 피아노를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으나 신자가 아니면 배울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포기하고 말았다. 피아노에의 꿈이 좌절된 그는 군산여중 1학년 때 친구가 승무와 살풀이춤을 배우는 것을 보고 어머니에게 배우게 해달라고 졸랐다. <호남가> 가사를 줄줄 외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던 터라 딸의 춤수업을 쉽게 승낙했다. 선생은 군산지방의 명기 김향초(金香草)로 춤뿐만 아니라 다른 국악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학교수업만 끝나면 무조건 달려갔어요. 요즈음처럼 시간당 레슨비를 내는 것도 아니고 월사금을 내던 때라 아무때나 가서 몇 시간이든지 배울 수가 있었거든요.” 김향초에게 1년 남짓만에 승무와 살풀이춤을 모두 익힌 그는 춤을 출 때의 가야금 반주에 매료되었던 터라 이제 가야금이 배우고 싶어졌다. 그래서 군산의 풍류객 이덕열(李德烈)에게 가야금풍류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씨는 그에게서 가야금풍류뿐만 아니라 양금·대금풍류도 배웠다. 2년 가까이 풍류를 익히고 나니 민속기악의 본령은 뭐니뭐니해도 산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래서 군산여고 재학 중에는 호남지방의 대표적 광대였던 이운조(李雲朝)에게 가야금산조의 기본을 익혔다. 승무·살풀이춤으로 시작해서 풍류와 산조로 이어진 그의 예술수업은 대학은 진학마녀서 본격적인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 당시만 해도 국악을 배울 수 있는 대학이 거의 없어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야금에 대한 미련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장사훈 선생을 찾아가 가야금선생을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김윤덕 선생을 소개해 주더라고요. 그 길로 운현궁에서 가야금을 가르치고 있던 김윤덕선생을 찾아 뵙고 본격적인 가야금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때 김윤덕이 운현궁에서 가야금을 가르치게 된 것은 대원군의 손자며느리인 박찬주의 아들이 그에게서 가야금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만 해도 김윤덕은 그의 스승인 정남희류(丁南希流)산조만 가르치고 있었다. 김윤덕은 그 후 60년대 후반 정남희류에 강태홍류 산조와 함께 자신의 독창적인 가락을 짜넣어 김윤덕류를 완성했다. 운현궁에서 나온 김윤덕은 익선동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 아쟁의 한일섭이 이곳에 자주 들르게 되어 아쟁도 배우게 되었다. 이때 배운 실력으로 이듬해인 대학 4학년때(1961년) 공보부 주최 ‘전국신인국악경연대회’에 나가 아쟁산조로 기악부 1등상을 탔다. 이때 이 대회의 심사를 맡았던 국악예술학교의 박현봉 교장으로부터 대학 졸업 후 자기 학교의 교사가 되어줄 것을 제의받았다. 당시만 해도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던 때라 이는 대단한 특전이었다. 그래서 이듬해인 1962년부터 국악예술학교에서 가야금과 국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 당시 이 학교에는 성금연, 신쾌동, 박녹주, 박초월, 김소희, 박귀희, 한영숙 등 국악계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모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씨는 젊은 나이에 이 최상의 대열에 낄 수 있다는 것이 큰 보람이었다. 주변에 훌륭한 선생이 많았었기에 이 학교 재직중 국악의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박녹주에게는 단가를, 신쾌동에게는 거문고를, 정권진에게는 판소리를 배웠다. 가야금산조에 대한 집념은 유별났다. 1966년부터 1978년 김윤덕이 작고할 때까지 김윤덕류를 사사한 것 외에도 성금연, 함동정월, 김죽파 등으로부터도 수업을 받아 유파를 뛰어넘는 기량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김윤덕류의 가야금 산조만 연주한다. 김윤덕류의 가락이 그의 심성에 가장 잘 맞기 때문이다. 1979년까지 국악예술학교에 재직했던 이영희씨는 1967년부터 1985년까지는 ‘리틀엔젤스예술단’, 1985년부터 작년까지는 중앙대 국악과 강사로 출강하는 등 후진양성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세종문화회관’에서의 독주회 등 여러 차례의 국내 연주회는 물론 해외공연도 아프리카대륙을 빼고는 모든 나라에서 순회공연을 가져 우리 국악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였다. 그의 국악에 끼친 공로를 참작하여 ‘문화공보부장관의 감사패’와 ‘국민훈장 석류장’이 수여되었으며 1982년에는 스승인 김윤덕의 뒤를 이어 보유자후보가 되고 1991년에는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이씨는 보유자후보가 된 이래 이효분(추계예술대 교수), 이미정(숙대 강사), 홍은주(전북대 강사), 김정숙(은광여고 강사) 등 4명의 이수자를 배출하였으며, 지금도 서정선과 이진 두 사람을 전수장학생으로 가르치고 있는데 이씨는 이들 두 사람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영희씨는 이밖에도 매일같이 10여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다. 취미삼아 배우겠다는 아마추어는 절대사절이다. 예술이란 평생을 배워도 어려운데 어디 감히 취미삼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씨의 국악교육에 대한 원칙은 남달리 엄격한 데가 있지만 자기자신의 수련 또한 게을리하지 않는다. 지금도 매일 아침 6시30분부터 2시간 동안을 고수와 함께 산조 두 바탕을 연주하고 나서야 다른 일과를 시작한다. 40여 년을 오직 가야금으로만 일관해온 이씨지만 아직도 미진하다고 겸손해하면서, 자신의 기량향상과 보급전수를 위하여 남은 생을 더욱 불태울 생각이라면서 좌절하거나 회의를 갖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나가 국악의 소질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몸에는 우리 음악을 물려준 선조들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누가 더 열심히 하느냐, 누가 더 오래도록 꾸준히 버티어 내느냐에 달려 있으니 열심히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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