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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도(Die Ruber)

작가소개
요한 크리스토퍼 프리드리히 폰 쉴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 독일 극작가, 시인. 마르바흐 출생.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성직자를 희망하여 그 과정을 밟았으나, 13세 때 영주인 카를 오이겐 공의 간섭으로 진로를 바꾸고 명령에 따라 군학교(카를학원)에 입학했다. 군대식 규율과 감독이 엄한 이 학교에서 처음 2년 동안 법학을 배운 뒤 의학으로 바꾸었다. 1780년 <인간의 동물적 본성과 정신적 본성의 연관에 관해서>라는 논문으로 졸업한 후 바로 연대 부속 군의관으로 임명되었다. 재학 중 몰래 읽은 당시의 신문학운동의 여러 작품, 특히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과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셀로>(1604)에 자극받아 희곡 습작을 시작하고 있던 무렵, 격심한 자아주장과 깊은 종교감정이 교착하는 처녀작 <군도(群盜)>를 거의 완성하고 있었다. 그는 1781년 초여름에 <군도>를 익명으로 출판했으며, 다음해 1월 만하임국민극장에서 초연되자 평판이 대단했다. <군도>는 쉴러에게 ‘가족과 조국에 대가를 치러야 했던’ 작품이었다. 중상하는 사람이 있어 영주의 노여움을 사게 된 쉴러는 1782년 만하임국민극장 지배인 달베르크를 의지하여 망명했다. 그 후 함께 도망한 슈트라이허의 도움으로 바우어바흐에 있는 볼초겐의 어머니의 별장에 숨어서 정치적 야심가와 공화제의 비극인 <게누아의 피에스코의 반란>(1783)과 궁정적 전횡(專橫)의 희생이 된 청순한 사랑을 그린 시민비극 <음모와 사랑>(1784)을 썼다. 1783년 만하임국민극장 전속 시인이 되었으나 다음해 계약이 갱신되지 않아 다시 궁지에 빠졌고 이때, 쾨르너의 도움을 받아 2년 동안 그의 밑에 있었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 베토벤의 <제 9 번 교향곡> 합창 텍스트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환희에 부치다>(1785)와, 이상과 우정의 비극인 <돈 카를로스>(1787)가 있다. 그는 <돈 카를로스>를 그때까지의 거칠고 파괴적인 산문적 작풍을 버리고 운문으로 썼는데, 그것은 그가 슈투름 운트 드랑(Sturum und Drang)과 결별하고 고전주의적 문학양식으로 나아가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그는 이 작품이 완성되자 1787년 괴테, 헤르더, 빌란트 등이 있는 바이마르로 이주하여 왕성한 의욕으로 <네덜란드 이반사(離反史)>(1788)와 소설 <견령자(見靈者)>(1787∼89)를 쓰는 한편, 그리스 비극과 칸트철학을 연구했다. 1789년 예나대학 역사학교수가 되었다. 1791년 문학사상에서 고전주의의 프롤로그로 평가받은 뷔르거 비평을 발표했으며, 시인에게 불가결한 요건은 개성의 순화와 이상화 기법에 의한 보편적 인간성의 조형(造形)이라고 갈파했다. 이어 <30년전쟁사>(1791∼93)를 썼으며 또한 칸트의 철학서를 탐독하여 많은 영향을 받음과 함께 그 주관주의적 미학이론을 극복하려는 일련의 미학논문을 썼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우미와 존엄에 관해서>(1793),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1795), <소박한 문학과 감상적 문학에 관해서>(1795∼96) 등이다. 쉴러는, 인간의 인격적 완전성은 이성과 감성의 조화적 통일에 있다는 관점에서 첫 번째 논문에서 그와 같은 인격적 완전성을 <아름다운 영혼>이라 했다. 두 번째 논문에서는 근대인이 <아름다운 영혼>에 이르는 길은 예술에 의한 미적 유희교육뿐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이 말의 완전한 의미로서의 인간일 때에만 놀 수 있으며, 놀 때만 완전한 인간이다”라는 그의 말은 유명하다. 세 번째 논문에는 시인을 2가지 유형으로 파악했는데, 자연에 따라 살고 자연을 현실로서 묘사하는 시인을 소박시인, 자연을 상실하여 자연을 이상으로서 묘사할 수밖에 없는 시인을 감상시인이라 하였으며, 인위적인 근대문화 안에서 감상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근대 시인과 문학 본연의 모습을 논했다. 1794년 여름, 괴테와 쉴러는 급속하게 친해졌고, 이후 쉴러가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두 시인은 변함없는 우정으로 협력하여 독일고전주의를 확립했다. 이들 사이에 오고 간 1009통의 편지는 보기 드문 우정의 기념비이며 귀중한 문학사적 자료이다. 1795년 여름, 봇물 터지듯이 시상(詩想)이 다시 넘치자 <이상과 인생>, <산책> 등의 사상시가 나왔으며, 1796년 가을에는 사극 <발렌슈타인>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797년에는 한 때, 괴테와의 경쟁작으로 서사시에 몰두했으며 1799년 <발렌슈타인>을 겨우 완성했다. 이후 거의 1년에 1편 씩의 희곡을 썼으며, <마리아 슈투아르트>(1801), <오를레앙의 처녀>(1801), <메시나의 신부>(1803), <빌헬름텔>(1804)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1805년 5월 9일 바이마르에서 생애를 마쳤으며 <데메트리우스>라는 미완성 유고를 남겼다. 쉴러는 그 웅혼한 희곡, 전아한 사상시, 고결한 이상주의적 정신 때문에 오늘날에도 괴테와 나란히 경애받는 독일의 국민시인이다. 출생지인 마르바흐에는 쉴러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으며 쉴러국민박물관이 있다. 바이마르에는 쉴러의 자택과 괴테·쉴러 문고가 있다.
내용
쉴러의 처녀작으로, 형제간의 불화를 다루었다. 동향 시인인 슈발트가 쓴 이야기를 골자로 폭정(暴政)에 대한 젊은 극작가의 반항과 넘칠 듯한 시적 정열을 쏟은 일종의 사회극이다. 지방 영주의 장남인 고결한 성품의 칼은 음험한 동생 프란츠의 책모로 아버지로부터 의절 당하여, 몰이해한 아버지와 차가운 사회에 대한 의분에서 보헤미아의 숲 속에다 도적단을 조직하고 그 두목이 된다. 압제와 일그러진 세상을 실력으로 바로잡고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은 약탈을 일삼는 부하들의 행동과 일치되지 않아 그의 고뇌는 점차 커져만 간다. 형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프란츠는 병약한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형의 연인을 손에 넣으려는 음모를 꾸민다. 동생의 비행을 알아차린 칼은 도적단을 이끌고 고향에 돌아가 동생에 대한 복수를 하고 유폐된 아버지를 구해낸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군도의 두목임을 알고는 놀란 나머지 죽게 된다. 칼은 자기를 사모하는 애인 아마리에를 죽이고, 지금까지 극단적인 행위로 사회를 어지럽힌 비행(非行)을 후회하고 자수함으로써 스스로 속죄한다. 이 작품은 당시 독일의 갖가지 인습을 들추어내고, 인간의 자유문제를 싱싱한 힘으로 표현한 점에서 이른바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 문학운동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압제에 의한 반역에서 비롯된 사회혁신의 의욕과 강한 콘트라스트, 그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상주의의 경향은 이 작품의 커다란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 인간성이 지닌 선과 악, 이상과 현실의 상반되는 양면에 대한 날카로운 묘사도 뛰어났다.
국내공연연보
1959년 한독협회 / 황은진 연출 1973년 4월 12일~16일 극단 광장 / 국립극장 / 이진정 연출 1976년 6월 4일~6일 프라이에 뷔네 / 서강대대학극장 / 김승수 연출 1980년 극단 민예 / 박찬기 역 2005년 4월 29일~5월 8일 국립극단 / 국립극장해오름극장 / 이윤택 연출 / 공연제목: 떼도적
예술가
이윤택(李潤澤, 1952~ ) 극작가 겸 연출가인 이윤택은 1952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부산중학교, 경남고등학교를 거쳐 서울연극학교(현 서울예술대학)를 중퇴하고, 방송통신대 초등교육과를 독학으로 졸업했다. 1979년 시 <천체수업>, <도깨비불> 등을 <현대시학>에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출발, 1979년 7월 부산일보사 편집부에 입사하여 신문기자 생활을 한다. 1980년 <열린시>, 무크지 <지평> 동인으로 시와 비평활동을 겸했다. 1986년 부산일보사 신문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돌연 연희단거리패와 가마골소극장을 창단하고 개관해서 그곳을 중심으로 연극 활동을 재개한다. 그는 극작, 연출, 연기훈련, 무대술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작업을 통해 1990년대 한국 실험연극의 기수로 등장했다. 시나리오, TV 드라마, 신문칼럼을 쓰고, 무용, 이벤트 연출도 겸하는 전방위 예술가이다. 부산 가마골소극장, 서울 우리극연구소, 순회극단 연희단거리패의 대표이고 계간 종합 문예 비평지 <관점 21-게릴라>의 발행인 겸 편집주간이기도 하다. 1989년 희곡 <오구-죽음의 형식>으로 한국평론가협회 최우수예술가상(연극부문), 1990년 <시민K>로 영희연극상, 1991년 동아연극상 작품상, <청부>로 연출상, <길 떠나는 가족>으로 서울연극제 대상, 1994년 <비닐 하우스>로 서울연극제 연출상, 1995년 <비닐 하우스>로 동아연극상 연출상·작품상, 1996년 <햄릿>으로 서울연극제 연출상, 대산문학상 희곡부문 수상. 1998년 <느낌, 극락같은>으로 서울연극제 작품상·희곡상·연출상·무대미술상 수상. 1998년 한국연극협회 베스트5 선정, 한국평론가협회 올해의 베스트3로 선정됐다. 영화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로 1987년 대종상 각본상 수상, 1991년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로 대종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 <오세암>, <서울 에비타>,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장군의 아들2>를 각색했다. TV드라마로는 <행복어 사전>, <도시인(1~25회)>, <춘원 이광수>, <사랑의 방식>, <머나먼 쏭마강> 등을 집필했다. 희곡집으로는 <웃다 북치다 죽다>(평민사, 1993. 12), <문제적 인간>(공간미디어, 1995. 8), <어머니>(평민사, 1999. 5), <도솔가>(평민사, 2000. 7)가 있다.
리뷰
Ⅰ. 기다림 프리드리히 쉴러의 초기작 <떼도적(Die Räuber)>이 이윤택과 국립극단의 배우들을 통해 새롭게 빚어져 쉴러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는 독일 만하임 쉴러 페스티벌의 폐막작으로 초청된다. 이윤택은 그가 <떼도적>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만하임으로의 본격 장정에 오르기 한 달여 앞선 지난 4월 29일부터 약 1주일 동안 해오름 극장 무대를 통해 국내 관객들에게 먼저 선을 보였다. 이것은 그간 이루어진 작업의 결실을 일단 국내 관객들 앞에 풀어 놓고 이들로부터 일차적 평가를 받고자 하는, 말하자면 일종의 최종 점검의 차원에서 기획된 것이었으리라. 사실 <떼도적>을 둘러싼 이윤택의 작업은 작년부터 이미 우리 연극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 작품이 이 글의 초두에 밝히고 있듯 쉴러 페스티벌에 공식적으로 초청을 받아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그 일차적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사람들이 이 공연을 기대했던 이유는 연극의 대중성과 역사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곡예사의 첫사랑>과 같은 소위 ‘서커스 악극’에 이르기까지 그 실험의 경계를 다양하게 확장했던 이윤택이, 지난 97년의 <파우스트> 이후 소위 전체 연극사의 꽃이라 불리는 독일고전주의 희곡으로 다시 돌아와 과연 어떤 식으로 그의 연극적 세계관과 문법을 녹여낼 것인가라는 점이었다. 이윤택은 지난 <연극평론> 겨울호를 통해 가장 한국적인 <떼도적>을 구상하고 있음을 진작부터 전해온 바 있다. 그는 쉴러가 독일 고전주의의 틀을 넘어 이미 가장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 잡고 있는 이상, 쉴러의 정서는 분명 한국적 정서와 충분히 통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따라서 그는 소위 고전의 현대의 재해석이라는 이름으로 그 고전이 지닌 원래의 틀을 임의적으로 변경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지양하고 가능한 한 원작을 있는 그대로 무대에 올리고자 한다고 했다. 다만 그는 가장 보편적인, 그래서 가장 한국적인 <떼도적>을 위해 ‘탈극’과 ‘범패’, ‘정가’ 등 한국의 전통적인 공연양식을 적극 적용할 것이라 했다. 이로써 그는 쉴러가 꿈꾸었던 이상적 세계의 원형과 한국적 원형을 하나로 녹여내어 쉴러의 ‘동시대성’을 부각시키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기다렸다. Ⅱ. 만남 막이 오르면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황량하고 밋밋한 무대의 전면이 나지막한 신음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독일 프랑켄 영주 막시밀리안 폰 모오르 백작의 성이다. 산송장과 다를 바 없는 영주 막시밀리안 폰 모르(장민호)가 링거 병이 잔뜩 달린 휠체어에 몸을 의지에 무대에 들어서고 그의 둘째 아들 프란츠(오순택)가 뒤를 따른다. 이때 무대의 처음을 채웠던 신음소리는 막시밀리안 폰 모오르의 것일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당시 봉건적 압제에 신음하는 기층 민중들의 탄식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떼도적>은 시작되어 형제간의 불화, 돌아온 탕자와 같은 일련의 모티브를 뼈대로 삼아, 자유를 향한 열망과 좌절, 진정한 정신의 해방이라는 쉴러의 절대명제를 향해 3시간 남짓한 시간을 숨 가쁘게 달려간다. 원작인 <떼도적>의 한 축을 이끌어가는 칼 무어는 불같이 타오르는 거침없는 영혼의 소유자이면서, 과감한 용기의 소유자이다. 그는 한때 젊음이 지칭하는 방종한 열정으로 말미암아 도적떼의 우두머리가 되는 등 일탈과 좌절, 나락에 빠지지만 끝까지 고귀함과 존경심, 위엄을 잃지 않는 인물이다. 이성과 도덕, 감성과 열정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그의 정신세계는 자유가 아닌 군주의 권력이, 무한에 대한 경외심 대신 교회의 위선이 지배하는 당시 사회에 대해 강하게 반기를 쳐든다. 그런 그는 당시의 계몽된 귀족계급 내지 ‘스투름 운트 드랑’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감정과 격정, 이성과 도덕 그리고 자유를 지향하는 젊은 쉴러의 정신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칼에 맞서 극의 다른 한 축을 이끄는 인물은 그의 이복동생 프란츠 무어이다. 그는 칼이 지닌 감성과 자유, 시민적 이상에 확실하게 대립되는 인물이다. 그는 냉정하고 조소적이며, 정신과 감정의 기계적 진행을 믿는다. 인간의 모든 행동을 계획된 근거에 의해 산출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오직 정치적 권력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 든다. 그는 절대적 독재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아버지의 생명을 단축시키려 할 정도로 한없이 ‘냉정하고’ ‘목석같다’. 그는 절대로 타인과 더불어 공존할 줄 모른다. 그가 속한 세계는 철저하게 계산된 이기주의 및 무시무시한 내적 고독의 세계이다. 그의 신체적 추함은 그의 뒤틀린 내면이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계몽주의의 비틀어진 잔재, 즉 계몽의 탈을 빌어 뒤집어 쓴 비(非)계몽 내지 반(反)계몽의 전형적 인물이자 자유와 이성에 반하는 악덕의 화신이다. 이 글에서 희곡 자체가 안고 있는 인물들에 관해 논하는 것은 공연 자체에 대한 밀도 있는 논의를 전개해감에 있어 자못 불필요한 부분이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희곡의 차원에서 주요 등장인물의 성격을 가능한 한 꼼꼼히 되짚어보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연출자의 말대로 이번 <떼도적>이 원작의 정신을 가능한 한 최대한도로 존중하고 그로 인해 가능한 한 그 틀을 유지하려 했다면, 인물 및 작품의 사상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꼼꼼하고 심도있는 탐구 및 이해가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쉴러의 <떼도적>을 무대의 언어로 되살려내고자 할 때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원작이 안고 있는 비극적 격정 내지 숭고함이다. 쉴러에게 있어 격정은 고뇌가 한층 승화된 형태이다. 그것은 칼이 온갖 역경과 방종, 반항 속에서도 초감각적인 것, 즉 도덕적인 자유의 이념을 위해 처절하게 고민하고, 더 나아가 손상된 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할 때 진정한 도덕과 예술의 차원으로 진입한다. 그런 점에서 도덕적 동기가 결여된 채 방종과 감정으로 일관하는 도적떼들은 칼의 비극적 숭고함과 도덕적·정신적 자유와 분명히 구분된다. 그가 도적떼들과 행동을 같이 하면서도 끝내 그들과 차별화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떼도적>은 아쉽게도 원작이 요구하는 그 비극적 격정의 깊이를 살려내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필자가 관람했던 이 공연의 주요 배우의 평균연령이 60대 후반이었다는 것에서부터 문제가 노정되고 있다. 칼 역의 신구는 그가 지금까지 여러 무대에서 보여준 배우로서의 관록과는 별개로 비극적 격정, 즉 감정과 도덕적 요구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의 치우침도 없는 칼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에는 실패하지 않았나 싶다. 60대 후반의 그는 <청바지를 입은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텔레스 역에는 더없이 적격이었으나 칼이라는 인물이 담고 있는 이율배반적 갈등과 깊이를 격정적으로 담아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는 끝내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지금까지 다른 무대를 통해 빛나는 연기의 힘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무대의 신구는 칼이 젊음의 혈기에 싸여 열정과 방종을 이야기할 때에는 지나치게 진지했고, 도덕과 정신의 자유를 구가할 때에는 필요 이상으로 높게 소리를 높였다. 그가 진정한 정신적 자유를 위해 스스로 법과 질서를 교란시킨 대가를 치르고자 아말리아를 죽이고 자수를 선택하게 되는 극의 결말부는 비극적 장중함 내지 숭고함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의 결말부가 그저 힘없이 끝나버린 것은 칼이 무대를 끌어가는 힘, 즉 비극적 격정의 깊이를 충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 쉴러는 그의 희곡에서 모순으로 가득한 다양한 현실의 구조를 삶에 대한 자신의 모든 감정들과 함께 복합적으로 파악하고 표현해내고자 개개의 독자적 장면들, 즉 각각의 상황과 장면들을 서사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본 공연의 경우, 다소 반복적으로 교차되는 감이 없지 않은 사건의 무대는 커다랗게 두 개의 공간, 즉 프란츠의 궁정세계 및 칼과 도적떼들의 공간인 보헤미안 숲 속으로 구분되는 가운데, 그때그때 회전 각도를 달리하여 약간의 변용을 시도한다. 기다란 경사면으로 구성된 프란츠의 궁정세계는 아무런 장식 없는 밋밋하고도 공허한 공간으로, 인위적이고 무미건조한 생명 없는 규칙들만이 가득한 프란츠의 불안하고 뒤틀린 정신세계를 대변한다. 이 무대에서 특히 프란츠를 비롯한 배우들의 동작은 지나치게 절제되어 단조롭기까지 한데, 이것은 무대 및 궁정세계가 안고 있는 비생명적인 공허함과 물화의 상태를 더더욱 부각시켜주는 효과를 낳았다. 반면 칼과 도적떼들의 공간인 보헤미안 숲 속은 심장박동 소리를 비롯, 난장에 가까울 정도의 떠들썩한 분위기로 채워짐으로써 생동감과 격동, 반항과 감정의 생생한 기운을 담고 있다. 탈극을 응용한 도적떼들의 역동적인 춤사위와 소리는 프란츠의 궁정세계와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이윤택은 유독 이 무대에 특별한 공을 들였다. 그가 이처럼 보헤미안 숲 속의 도적떼들이 등장하는 장면 안에 우리의 전통적 공연양식을 적극 녹여냈던 이유는, 동양적 사유의 공간이야말로 차갑고 무미건조한 궁정세계가 의미하는 비합리성 내지 부조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미래적 가능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세계는 아버지를 부정하는 프란츠의 세계, 보다 보편화시켜 말하자면 중심을 상실한 현대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다. 칼은 그 미래적 세계의 새로운 인간이다. 그런 점에서 칼 역시 그가 이끄는 도적떼가 구현해내는 이 역동적 춤사위에 합류했어야 한다. ‘라이프찌히의 악동’인 칼은 ‘개 같은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쏟아내는 그의 겁 없는 도전과 용기를 수사학적 언어가 아닌 동양의 이 역동적 에너지 속에서 힘껏 분출해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이윤택이 적극 차용한 우리의 전통적 공연양식은 단순히 도적떼가 그저 한바탕 놀아보는 난장 내지 그를 통해 무대를 시각적 차원에서 미학적으로 수식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보다 깊이 있는 철학적 담론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정말 아쉬운 것은 이윤택이 분명 우리의 전통적 공연양식에 기댄 역동적 이미지의 창출에 많은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극의 주제로까지 밀도 있게 용해되지 못한 채 시각적 효과로만 머문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그 시각적 화려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힘을 잃어가는 공연에 그다지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고, 이미 어느 정도 그러한 이미지들에 익숙한 국내 관객들로서는 점차 ‘인내’라는 예의를 차리기 시작하였다. Ⅲ. 그 후 이윤택의 무대는 언제나 힘이 넘쳐난다. 시각적으로도 비교적 풍성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무대에 선 배우들은 거의가 그 에너지를 밀도 있는 내적 정서로까지 연결시키지 못한 채, 필요 이상으로 고함을 지르거나 필요 이상으로 거칠고 센 동작에 의지하는 등 외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감이 적지 않다. 이러한 아쉬움은 이번 <떼도적>의 경우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원로급 배우들의 연기력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기 보다는 극의 내용과 양식에 대한 논리적이고 치밀한 접근과 이해가 보다 필요했던 공연이었다. (……) 이번 <떼도적>의 ‘잔치’에 기대를 걸었던 이유는 이 잔치가 ‘이윤택’이 ‘국립극단’의 배우들과, 그것도 ‘쉴러 페스티벌의 공식초청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주인 역시 사람들 사이에 자기가 벌일 잔치에 관한 소문이 이미 자자하게 나돌고 있음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부담을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 잔치가 풍성해지도록, 찾아온 손님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틀림없이 많은 신경을 썼을 것이다. 적어도 양식이 있는 손님이라면 그 정도쯤은 알고 있다. 잔치를 여는 주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걸고 있는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킨다는 것이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매번 여는 잔치가 그때마다 손님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도 없으려니와, 설령 충족시켜주기라도 하면 다음 번 그가 여는 잔치에 대한 손님들의 기대는 또 그만큼 더 커져버릴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윤택이 ‘잔치’를 벌인다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여전히 남다른 기대를 품곤 한다. 앞으로도 분명 그럴 것이다. 그가 한때 벌인 몇몇 질펀한 잔치의 추억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이윤택이 조만간 보다 풍성하게 잔치를 벌이기를 기대하고, 기다릴 것이다. 그가 우리 연극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거저 얻어진 것은 분명 아니지 않은가. 그의 힘을 믿는다. 지난 잔치에 대한 기억은 잊고 벌써 다음 번 만남을 기대하게 되는 것은 분명 그 때문이다. ‘배우의 관록과 젊은 쉴러의 비극적 격정이 어이없이 서로 비껴갈 때’, 이경미, <연극평론>, 2005년 여름
관련도서
<군도>, 프리드리히 쉴러 저, 홍경호 역, 범우사, 2002 <쉴러의 문학과 미학>, 고창범, 서울대출판부, 1986 <쉴러의 미학 예술론>, 프리트리히 쉴러 저, 장상용 역, 인하대학교출판부, 1999
연계정보
-빌헬름 텔(Wilhelm 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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