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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Chaika)

작가소개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 러시아 소설가, 극작가. 타칸로크 출생. 단편소설과 중편·산문 등에서 사회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문학세계를 이루었고 근대연극에서 기분극(氣分劇)의 창시자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16세 때 아버지의 파산으로 고학하며 1879년 모스크바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오락잡지와 신문에 ‘안토샤 체혼테’라는 필명으로 7년간 400편 이상의 단편소설과 콩트를 기고하였다. 1884년 첫 번째 단편집 <비극의 여신 설화>를 출판하였다. 이들 초기작품에서는 다양한 작풍을 보였으나 대부분 인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무사상적·인상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대학 졸업 후 의사로 있을 때인 1886년 작가 그리고로비치로부터 재능을 낭비하지 말라는 충고의 편지를 받고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1888년에 단편소설집 <황혼>(1887)으로 푸슈킨상을 받았으며 희곡 <이바노프>(1887), 소설 <광야>(1888)와 <등불>(1888), <지루한 이야기>(1889) 등을 본명으로 발표하면서 문학가로서 확고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객관적인 문학론을 주장하며 재판관이 아닌 사실의 객관적 증인이 되는 것이 작가의 과제라고 보았다. 또한 톨스토이와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받은 영향이 <지루한 이야기> 이후의 작품에 나타났다. 특히 이 작품은 노년에 들어서도 자신의 인생을 가지지 못한 어느 퇴직 노교수의 절망을 그린 것으로 작가의 심리상태가 반영된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시대적 요구였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확고한 이념 대신 ‘나에게는 사상이나 감정을 통일하는 공통이념이 없다’고 주인공을 통해 대답하였다. 1890년 악화된 폐결핵을 무릅쓰고 제정러시아의 감옥실태를 조사하고 정신적인 정체를 해소하기 위해 죄수들의 유형지인 사할린으로 여행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와 여행결과를 담은 탐방문학 <사할린섬>(1895)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그 뒤부터 민중의 생활을 직접 목격하고 지식인의 무력함을 통감하여 현실사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톨스토이즘이나 스토아철학의 영향에 의한 금욕적·자폐증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모습을 인정하기 위하여 인간성 해방에 눈을 돌렸다. 1892년 발표한 <6호실>은 현실개혁의 허무함을 깨닫고 모든 것에 무관심해져 정신병자와 얘기하던 중 자신까지 쇠창살에 갇힌다는 내용인데, 전제정치 아래 러시아와 지식인의 운명을 암시하는 작품으로서 감옥에서의 잔혹행위에 대한 저항의식을 불어넣었으며, 1880년∼90년 초 체호프의 비판적 리얼리즘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다. <다락이 있는 이층집>(1896)에서는 농민에게 문학을 가르치고 진료소를 만들어 주는 일 등으로 민중생활을 향상시키려는 딸 리자와 현실개혁은 일시에 해야 함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무기력한 어느 화가와의 대화를 통하여 공론(空論)뿐인 19세기 러시아 지식인을 비판하였다. 이 밖에도 톨스토이즘을 비판한 <나의 인생>(1896)과 농민생활의 비극을 그린 <농군들>(1897), <골짜기>(1899) 등의 농촌소설이 있다. 또한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자본의 노예가 되어가는 청년의 고뇌를 그린 <3년>(1894)도 사회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작품으로 체호프가 세기말 러시아를 휩쓴 자본주의의 필연성과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사할린 여행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1892년 모스크바주의 멜리호보로 옮겨 창작을 계속하면서 농민들을 무료로 진료하고 학교, 교량, 도로건설 등 사회사업도 하였다. 1899년 크림반도의 얄타로 요양지를 옮겼는데, 이 무렵 고리키, 톨스토이, 부닌 등과 친분을 맺었다. 1892년 멜리호보에서 1899년 얄타요양지로 옮겨갈 때까지는 체호프 소설의 원숙기로서 작품의 공통 주제는 타성에 젖어 목적 없이 살면서 속물화되는 인간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진실한 삶에 대한 물음이며 1890년대에 새로운 조류를 형성한 상징주의, 마르크스주의, 나로드니키와 체호프 사상 사이의 논쟁을 반영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 <결투>(1892), <이오니치>(1898), <상자에 들어간 남자>(1898) 등이 있으며 톨스토이가 격찬한 단편 <귀여운 여인>(1899)에서는 여러 번 결혼하지만 그때마다 새 남편의 의견을 그대로 추종하는 여주인공 오렝카의 삶을 통하여 가짜 인생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다. 이 밖에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1899)과 원숙기에 접어든 후기작품 경향이 잘 나타난 <골짜기>(1899), <약혼자>(1902) 등이 있다. 연극에서 체호프는 인생탐구를 근본목표로 삼는 내용에 장치, 조명 등 기술적 부분을 포함한 조화로운 전면적 표현을 추구하였고 당시 연극경향을 따라 특수한 분위기를 무대 위에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분극을 창시하였다. <이바노프>(1887), <갈매기>(1896), <바냐 아저씨>(1897), <세자매>(1900∼1901), <벚꽃동산>(1903∼1904) 등은 체호프의 5대희곡으로 꼽히는데 러시아 근대 리얼리즘을 완성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들 작품은 공통적으로 후기 단편소설에 나타난 인간의 진실한 삶을 주제로 삼았다. 특히 <갈매기>는 상연 후 혹평을 받았으나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출로 선구적인 근대연극으로서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무대화에 성공하였으며 생활 그대로의 연극과 정서를 위주로 한 연극을 추구한 작품이다. 1902년 정부가 고리키의 아카데미회원자격을 박탈하였을 때 코롤렌코와 함께 항의하는 뜻으로 아카데미회원자격을 반납하였다. 1901년 모스크바예술극장 배우 크니페르와 결혼하였고 3년 뒤 요양 중이던 독일 바덴바덴에서 병이 악화되어 44세로 죽었다. 체호프는 비판적 리얼리즘 작가로서 고골리, 코롤렌코, 푸신 등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 영향의 흔적은 영국의 맨스필드, 울프, 미국의 헤밍웨이 등의 작품에 나타나 있다.
내용
1막 소린 영지의 한 정원, 해질 무렵, 여름. 젊은 작가 지망생 코스차는 유명한 여배우인 자신의 어머니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나 어머니는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그녀가 현재 저명한 작가인 트리고린과 열애 중이라 더더욱 심기가 불편하다. 그는 자신이 만든 연극이 어머니의 무시에 의해 엉망으로 끝나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한편 마샤는 의사선생님에게 코스차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2막 크로케 코트가 있는 정원, 나른한 오후, 일주일 후 도시인들은 지루한 농촌생활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관리인이 여배우에게 외출용 말을 내놓지 않자 떠나버리겠다고 소리친다. 코스차는 니나가 트리고린에게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분노를 이기지 못해 죽은 갈매기를 그녀의 발 밑에 던진 채 사라져 자살을 시도하나 실패한다. 한편, 니나는 낚시를 마치고 돌아오는 트리고린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사랑에 빠진다. 3막 식당, 정오, 일주일 후. 여배우와 소설가가 떠나는 날. 코스차는 어머니와 화해를 시도하나 결국 또 싸우기만 한다. 트리고린은 니나와의 아쉬움으로 좀 더 머물 것을 제안하나 이를 알아 챈 여배우는 현란한 말솜씨로 그를 다시 자기 품안에 넣는다. 그러나 니나와 트리고린은 몰래 모스크바에서 만나기로 밀약한다. 4막 구조가 바뀐 응접실, 늦가을 밤, 2년 후. 코스차는 유명작가가 된다. 사랑에 실패한 니나가 거의 폐인이 되었다는 소문만 무성히 들린다. 트리고린은 다시 어머니의 애인으로서 관계를 유지하고 니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기억을 지운 지 이미 오래다. 그곳에 우연히 들르게 된 니나는 그의 집에 살짝 찾아 들어와 코스차를 만나나 다른 방에서 들리는 전 남편의 아련한 목소리에만 관심을 가진 채 코스차의 사랑을 거부하고 떠나 버린다. 그는 다시 권총을 들어 자살하고 만다.
국내공연연보
1966년 11월 6일 극단 여인극장 / 국립극장 / 이진순 연출 1976년 6월 21일~30일 제1회 연극·연출워크숍 / 연극인회관대연습실 / 오사랑 연출 1980년 4월 17일~21일 극단 맥토 / 국립극장소극장 / 문석봉 연출 1983년 5월 30일~6월 7일 극단 광장 / 문예회관대극장 / 이진순 연출 1993년 한국연극연출가협회 / 김영환 외 2인 연출 1994년 2월 17일~23일 극단 광장 / 문예회관대극장 / 문고헌 연출 / 이진순 10주기 추모공연 2001년 6월 14일~16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 크누아예술극장 / 양지원 연출 2001년 10월 1일~7일 극단 주변인들 / 국립극장별오름극장 / 서충식 연출 2002년 2월 20일~3월 9일 극단 오늘 / 문예회관소극장 / 이수인 연출 2003년 4월 4일~13일 극단 연희단거리패 / 가마골소극장 / 윤광진 연출 2003년 11월 18일~30일 우리극연구소 / 아트홀 스타시티 / 윤광진 연출 2004년 10월 1일~31일 극단 애플씨어터 / 정동극장 / 전훈 연출
예술가
이진순(李眞淳, 1916~1984)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일본대학 연극과에서 함께 공부했던 이진순은 단역배우로 무대에 서면서부터 연극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일본유학생들로 결성된 학생예술좌에서는 주로 단역배우로 나섰고, 1938년 귀국 후에는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유치진 주도의 극연좌 신인배우로 한두 번 무대에 섰다. <목격자>(앤더슨 작)와 <깨어서 노래부르자>(클리포드 오뎃츠 작) 두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진순은 곧 극단을 떠나 북경으로 이주한다. 1938년부터 1946년까지 8년 동안을 그곳에서 보내게 된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는 대학동기생인 이해랑, 김동원 등과 어울리다가 1947년 10월 중국통이라 할 김광주와 손잡고 극단 신지극사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그리고 김승호, 강계식, 전두영, 주선태, 하옥주 등 소장배우들과 함께 중국 작가 조우의 <태양이 그리워[日出]>를 직접 연출하여 공연했으나 별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2회 공연으로 <언덕에 꽃은 피고>라는 작품을 직접 쓰고 연출했으나 창립공연보다도 관심을 모으지 못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간간이 연출을 했다. 이때 신협에서 <붉은 장갑>을 연출했지만 호평을 받지 못하면서 신협과 멀어졌고, 이후 국립극장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국립극장과는 1950년 개관 공연 때 오페라 <춘향전>을 연출한 인연이 있었다. 그러다 1960년대 동인제 극단 시대가 열리자 그도 1966년에 극단 광장을 조직하고 나섰다. 그는 창단의 변에서 “어디까지나 민중과 더불어 살며 입김을 나눠야 한다. 민중이 연극에서 멀어져가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연극에 대한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데 있지 않을까”라며 기성극계를 비판한다. 따라서 그는 고설봉, 백성희, 신원균, 이진수, 이석구, 고은정 등 중견과 신인을 중심으로 극단을 조직하고 셰익스피어의 <윈저의 아낙네들>로 창립공연을 올린다. 음악극에 관심이 많았던 이진순은 국립극장에서 추진한 창극정립운동에 앞장섰고, 연극잡지 발간에도 열성을 기울였다. 즉 그는 6·25전쟁 이후 최초로 연극 전문지인 <연극>을 자비 출판한 것이다. 물론 이 <연극>지는 2호를 발간하는 데서 멈췄지만 우리 연극계에 전문잡지의 필요성을 제시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연극전문 잡지 발간에 대한 욕구는 그가 동국대 연극과 전임이 되고 연극협회 이사장까지 맡으면서 실현된다. 전문잡지 <한국연극>을 월간지로 발행하고 한국희곡전집도 발간하는 등 출판사업에 힘을 쏟는다. 이진순은 작품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연출하기로 유명했다. 가령 정통극에서부터 악극, 창극, 무용극, 오페라 등 전방위에 걸쳐 손대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그가 연출한 수백 편의 작품 가운데 대표작은 역시 정통극과 창극에 있다. 1961년 국립극단의 <산불>로부터 <갈매기>(체호프 작), <학마을 사람들>(이범선 원작), <로물르스 대제>(뒤렌마트 작)로 이어지는 정통리얼리즘 계열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미첼 작), <전쟁과 평화>(톨스토이 원작), <남한산성>(김의경 작) 등 대형작품들은 이진순이 연출가로서 족적을 남긴 작품들로 평가된다. 또한 1960년대 국립극장이 국극정립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면서부터 창극에 깊숙이 간여한 그는 누구보다도 창극에 애착을 갖고 작업에 임했다. <춘향가>, <흥보가>, <배비장전>, <수궁가>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어쨌든 이진순은 해방 이후 이해랑과 함께 연출 제3세대의 양각(兩脚)을 이룬 인물이다. 이해랑과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며 서구근대극을 이 땅에 이식, 구체화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연출활동을 했다. 그러나 연극전문화, 대중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오로지 신극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일관했던 이해랑과는 다른 의의를 지니는 연극인이라 하겠다.
리뷰
우리나라 현대연극사에서 지촌 이진순 선생(1916~83)이 남긴 자취는 광범위하고도 깊다. 불확실한 시대와 열악한 공연환경 속에서 연극예술의 기틀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던 그의 10주기를 맞아 제자들이 추모무대를 마련하고 체호프의 <갈매기>를 공연한 것은 뜻 깊은 일이다. 작품의 내용과 표현양식을 볼 때 서양 근대연극을 소개하고 사실주의를 한국무대에 정착시키려 했던 고인이 생전에 가장 애착을 느꼈던 희곡이 <갈매기>였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이진순 선생이 30여 년 전에 한국에 소개했고 작고하기 전 마지막으로 연출했던 <갈매기>를 그의 제자들이 무대에 올릴 때 명작의 원숙한 공연을 보리라 생각했던 것은 지나친 기대였을까? 이제는 한국연극계의 중진이 된 그들이 스승이 세우려 했던 전통을 무대 위에서 진지하게 구체화하지 않는다면 그 분을 모르는 관객들은 어디에서 그의 자취를 볼 것이며, 젊은 연극인들은 어디에 기대어 옛 것을 배우고 새 것을 창조해낼 수 있을까? 문득 <갈매기>의 인물들이 새로운 상징이 되어 떠오른다. 타성에 젖은 자기중심적 배우 어머니 아르카디나, 부단히 새로운 양식을 추구하나 목적 없이 재능을 낭비하고 자살에 이르는 아들 트레블레프, 예술가에 대한 선망으로 연극에 뛰어드나 결국 진부한 배우로 남는 갈매기 같은 처녀 니나, 이들이 만들어내는 갈등과 비극적 상황이 우리 연극계의 현실과 밀접하게 다가온다. 스승에 대한 추모도 연극에의 애정도 연극인은 연극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체호프는 <갈매기>에서 의사 도른을 통해 말한다. “예술가를 선망하고 존경하는 것은 이상주의”라고. 과연 평생을 헌신한 예술가와 그의 업적을 존경하는 것은 이상으로 머물러야 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예술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야 하는 예술인 자신들의 소명의식과 태도에 달려있다. ‘연극인은 극으로 말해야-이진순 추모공연 <갈매기>’, 이혜경, <연극의 현실인식과 자의식>, 현대미학사, 1997
관련도서
<갈매기>, 안톤 체호프 저, 동완 역, 신원문화사, 2003 <안똔 체홉 : 새로운 형식을 위하여>, 문석우, 건국대학교출판부, 1995 <체호프와 그의 시대>, 추다꼬프 저, 강명수 역, 소명, 2004 <체호프 4대 희곡>, 안톤 체호프 저, 권영선 역, 혜원출판사, 1995 <한국연극과 안톤 체호프>, 안숙현, 태학사, 2003
연계정보
-이진순 인물
-이진순(李眞淳)
-바냐 아저씨(Dyadya Vanya)
-벚꽃동산(Vishnyovyi sad)
-세자매(Tri sestry)
관련사이트
밀양연극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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