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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朴珍)

개요
박진은 1905년 7월 10일 서울 공평동에서 함경도 감사까지 지낸 박기양(朴箕陽, 1856~1932)의 3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이 승진(勝進)이었던 그는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어머니를 졸라 연흥사에서 <육혈포강도>와 같은 신파극, 무성영화 등을 닥치는 대로 보았다고 한다. 양정고보에 진학해서도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연극반을 조직하여 교내연극을 직접 제작, 연출하기도 했다. 1923년 일본으로 건너가 연극과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동양대학 문화과에 입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연극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니혼대학 예술과로 옮겼다. 귀국한 후에는 마침 토월회에서 탈퇴한 시인 홍사용 등과 함께 산유화회를 조직하면서 처음으로 기성연극 <향토심>(홍사용 작)과 <소낙비>를 연출하기에 이른다. 이 작품들은 비교적 긍정적 평가를 받았으나 극단이 곧바로 해산되고 만다. 연극동료들과 극단 화조회를 만들어 <환란을 당한 자>라는 작품을 연출했으나 이 극단 역시 해체됨으로써 경성방송국 객원 연출가로 일하게 된다. 우리나라 방송사상 최초로 PD가 된 것이다. 박진은 방송국에 나가면서도 박승희의 권유로 토월회의 간부로 가담했다. 토월회의 재기공연작 <아리랑 고개>(박승희 작)가 크게 히트하면서 그는 일약 유명연출가가 되었다. 그러나 토월회마저 강제 해산 당하면서 이 일 저 일로 소일하게 된다. 그러던 중 무용가 배구자(裵口子)가 1935년 12월 전문공연장인 동양극장을 건립함으로써 비로소 연극인으로서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다. 즉 동양극장 전속 연출가 겸 작가로 입단한 것이다. 당시 동양극장은 연중무휴 공연이었던 데다가 레퍼토리 역시 며칠에 한 번씩 바꿔야 했기 때문에 전속작가와 연출가들은 쉴 새 없이 극본을 써대고 또 연출을 해야 했다. 1936년 봄, 연애비극 <청춘광상곡>을 쓰는 것을 시작으로 여러 편의 희곡과 <춘향전> 연출을 통해서 전문 연출가로서도 성과가 컸다. 그러나 배구자의 남편이 갑자기 타계하고 최독견 지배인마저 극장을 떠남으로써 그 역시 동양극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여느 연극인들과 마찬가지로 박진 역시 총독부의 친일국책문화운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마지못해 1943년 9월 제2회 전국연극경연대회에 연출가로서 극단 청춘좌의 <꽃피는 나무>(임선규 작)를 갖고 참여한 후 도망치듯 중국으로 간다. 해방 후에는 박승희 등과 만나 토월회 재건에 힘쓰지만 무위로 돌아간다. 이때부터 소속 없이 연출과 극작을 하다가 1948년 유치진 등과 함께 우익 민족진영 연극인들의 결집체인 한국무대예술원을 만들기도 했다. 이후 1957년에는 국립극장이 환도하면서 전속극단 정단원으로 들어가 민극(民劇) 대표를 맡았다. 그는 일관된 예술활동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문화계에서 여러 가지 직책도 맡아 수행했다. 유치진에 이어 한국무대예술원장, 문총최고위원, 예술원회원, 국립극단 초대단장도 지냈다. 1963년에는 예총이 탄생하면서 부회장도 지냈다. 박진은 연출가로서 수백 편의 작품을 연출했고, 극작가로서도 70여 편의 작품을 창작했다. 현존하는 작품이라야 고작 세 편으로 처녀작인 <절도병환자>, <끝없는 사랑>, 창극대본 <배비장전>이 전부지만, 그의 경우처럼 연출가로서 70여 편의 작품을 쓴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우리 근대희곡사 혹은 연극사에서 박진이 차지하는 비중을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다.
생애와 약력
1905년 서울 공평동 출생 1911년 교동보통학교 입학 1915년 양정보고 진학 1923년 의학공부를 핑계로 도일, 동양대학 문화과 입학 / 이후 일본대학 예술과로 진학 1924년 토월회 가입 1927년 귀국 / 홍사용 등과 극단 산유화회 조직 / 극단 화조회 조직 / 경성방송국 객원 연출가 1936년 동양극장 전속 연출가 겸 작가로 입단 1940년 조선연극협회 이사 1942년 조선연극문화협회 이사 1944년 북지(北支) 위문 무용단 무대감독 1948년 유치진 등과 함께 한국무대예술원 조직 1951년 군예대 고문 1957년 국립극장 환도로 전속극단 정단원으로 들어가 민극 대표를 맡음 1963년 예술인총연합회(예총) 부회장 1974년 타계
상훈
1945년 제1회 연극경연대회 연출상 수상(김영수 <혈맥>) 1961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작품활동
1927년 산유화회 조직 후 <향토심>(홍사용 작), <소낙비> 연출 1929년 <아리랑 고개>(박승희 작) 연출 1930년 희곡 <절도병 환자> 발표 1936년 동양극장에서 <청춘광상곡>외 수 편 집필 / <명기 황진이> 발표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임선규 작> 연출 1943년 제2회 전국연극경연대회에 <꽃피는 나무>(임선규 작, 극단 청춘좌)로 참가 1945년 토월회 재기공연 <40년> 및 <윤봉길 의사> 공연 / 이후 김영수 주도의 신청년 작품 <혈맥>, <사육신>, <반역자>, <가로등>, <화전지대> 등 연출 1951년 <공작선생> <끝없는 사랑> 발표 1953년 <야화>(윤백남 원작, 하유상 각색, 대구문화극장) 연출 1957년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하유상 작, 시공관) 연출 1958년 <인생일식>(강문수 작, 시공관) 연출 1959년 <젊은 세대의 백서>(하유상 작, 시공관) 연출 /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박동화 작, 시공관) 연출 / <대수양>(김동인 원작, 이광래 각색, 시공관) 연출 1961년 <마을의 봉팔이>(이석청 작, 시공관) 연출 1962년 <재건리 사람들> 발표 / <젊음의 찬가>(이용찬 작, 명동 국립극장) 연출 / <동물원 가족>(송일남 작, 명동 국립극장) 연출 1963년 <아리나의 승천>(하유상 작) 연출 / <푸른 명맥>(이용찬 원작) 연출 1965년 <수선화>(이원경 원작) 연출 1966년 <그 길고 지루한 여름>(김병원 작) 연출 1968년 희곡 <이차돈의 사> 발표
대표작품
<아리랑 고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 <대수양>
저서
<세세년년>, 박진, 경화출판사, 1966
리뷰
(……) 모든 것을 초월하야 오즉 진정만으로 맺어진 사랑. 하늘이 문허져도 깨여지지 안는, 만인이 부러워할만한 아름다운 사랑이엿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을 언제까지든지 그대로 두지 안햇다. 출세, 영예, 지위, 인간의 모든 욕망은 제각기 제 하고십흔대로 날뛰여 끗칠 날이 업섯다. 물은 물대로 기름은 기름대로 제 갈 곳을 차저가고 “기생은 백번 땅재주를 넘어도 기생”이엿고 “개고리는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하얏다.” 세상은 언제나 새로운 길을 차즈랴하면서도 늘 오든 길을 되푸리하는 것 갓햇다. 행로를 이즌 청춘남녀의 현대의 고민상! 박제행, 황철, 김선초, 심경순, 심영, 서월영, 남궁선, 기타 출연. - <매일신보>, 1936년 7월 24일(<한국신극사연구>, 이두현, 서울대출판부, 1990에서 재인용) (……) 동양극장의 최대 히트작은 역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연애 비극작품이었다. 어쩌면 그 작품의 히트로 말미암아 동양극장은 신파극장이란 이미지를 오래도록 남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작품의 히트로 말미암아 동양극장은 기생들의 연극관이란 꼬리표를 오래도록 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물론 이 연극의 연출자는 박진이었다. 그렇다면 공전의 히트작인 이 작품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직접 연출했던 박진의 감회는 어떤 것이었을까? 처음 그 작품의 원고를 읽고 내버린 적도 있다는 에피소드는 그만두더라도,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런 내용을 풀어 놓고 있었다. “……아무튼 이것을 보러 기생, 오입쟁이, 노나리꾼, 바람둥이, 시골사람, 촌사람 몰리고 몰려 극장 전면을 환하게 박아 놓은 유리가 모조리 깨지고, 서대문 경찰서에서는 정리한다고 나와서는 구경 온 사람을 두들겨 패고 서대문 마루턱이 막혀 전차가 못 다닐 지경을 하면서 아흐레 동안 공연을 했다. 분장실은 홍도 좀 만나자고 찾아드는 기생들로 붐볐고, 그 오라비 역을 한 황철이는 도색 아가씨들의 인사차 내방으로 핑크빛 비명을 울렸었다. 그러면서 그 연출을 맡은 나를 찾는 할미 하나 없었으니, 나는 이름을 바꾸고 싶도록 낯이 화끈거렸다. 연극의 신이여, 죄를 사하여 주소서!” 바로 이 대목 “나는 이름을 바꾸고 싶도록 낯이 화끈거렸다”는 그의 고백이야말로 자신은 결코 저급한 삼류 신파극 예술가로서 만족할 수 없다는 표현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는 ‘기생 연극’이 싫어서 이운방에게 기생이 몰락하는 내용의 각본을 집필하게 해서 그 연극을 공연했는데, 그 연극으로 말미암아 명월관 기생들에게 테러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 <동양극장의 연극인들>, 김영무, 동문선, 1998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동양극장 개관 60주년 기념 공연작으로 선정되고 연출을 의뢰받았을 때 6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생각해보았다. 제작 의뢰 측에서는 그대로의 재현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그건 나의 입장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하더라도 동시대의 삶의 의식으로 수용되어야 제대로 된 셰익스피어 극 해석이란 입장이기 때문에 동시대 의식으로 해석되지 않은 재현은 내게 있어서 연극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동시대적 해석이라고 해서, 당대 연극의 양식적 특성과 묘미를 무시한 재구의 미학은 유아독존적일 수밖에 없는 개인적 상상력의 한계에 떨어진다. 결국 나의 연출 방향은 우리 근대 대중극이 지녔던 풍부한 낭만성-극장성-총체성을 되살리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오늘의 연극은 애써 연극적이 아님을 숨기려 하는 게 리얼리즘이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무대 위에서 현실을 완벽하게 재현해낼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연극은 연극이다. 극장에 입장한 관객들에게 우리는 지금 연극을 하고 있다는 명확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 그리고 관객들과 함께 웃고 울고 생각하는 축제의 장을 만드는 것, 그리하여 그 옛날 디오니소스 축제처럼 우리의 무천이나 영고처럼 현실을 이탈하는 카타르시스의 시간을 제공하는 것, 이윽고 씻김의 제의를 거친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면서 깨어나는 일상성을 획득하는 것-이러한 것이 연극의 기능이라면, 이번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이런 연극적 기능을 극장주의적 관점에서 다양하게 시도하는 연극적 탐험이다. 연극이 지니는 본래적 낭만성-극장성-총체성이 얼마만큼 관객의 설득력과 연극 양식적 격조를 획득할 수 있을지 스스로 궁금해 하면서. - <우리극연구6>, 이윤택, 공간미디어, 1991
창작노트
(……) 그때 임선규라는 사람이 동양극장에 들어오기를 원하여 입장시험으로 써 내놓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지독한 신파여서 그냥 궤짝 속에서 몇 달을 묵고 있었는데, 아마 하도 반응이 없자 홍순언에게 직접 간청을 한 모양인지 하루는 홍군이 그것을 보고자 했다. 그래서 보였더니 이튿날 홍군이 그것을 하자고 우겨댄다. 나와 최상덕은 딱 잡아뗐으나 돈에 몰려 ‘이것은 내 극장이오’라고까지 나오는 주인놈을 꺾을 수가 없어서 결국 무대에 올리기로 했다. 그러나 제명만은 바꾸기로 하고 고심하는데 화풀이로 홍군을 약올리려는 최군이 장난으로 고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간판이 어느 틈에 나붙었다. 그 내용을 여기서 장황히 이야기할 틈이 없으나 아무튼 신파 비극의 48수가 듬뿍 들어찼고 기생을 좋게 써 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별반 고등 신파에 흥미를 안 느꼈던 기생 아씨들이 몰려오는데, 심지어는 돈냥간 쓸 작정으로 저녁 때부터 명월관, 식도원, 송죽원 등 요리집에 들어간 얼간이들이 술상은 놓아 둔 채로 기생의 꽁무니를 따라 동양극장으로 와 그 연극을 끝까지 보고 눈이 퉁퉁 부은 기생을 따라 다시 그 술상 앞으로 돌아가서 밤새도록 기생 아씨네의 관극평과 각자의 하소연을 듣고 새벽녘에 또 그 기생을 모시고 15전짜리 설렁탕 집에서 해장을 하는 것이었다. 이 신파 연극의 주인공은 홍도라는 기생으로 부유한 집 아들과 연애를 해서 시집살이를 하는데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기생인 까닭에 시집살이가 어려웠고, 기생인 까닭에 모함을 받았고, 너무나 너무나 억울했기 때문에 살인을 했고, 얄궂게도 그를 포승으로 묶어가는 것이 순사인 그의 오라비였다. 여기서 차홍녀가 홍도 역을 했다. 이때 기생 사회에서는 홍도와 홍녀를 혼동하기도 해서 화제마다 홍도-홍녀, 홍녀-홍도, 이래저래 차홍녀의 인기는 오르기만 해서 동양극장의 월급도 올랐다. (……) 그때 이 연극에 이서구가 쓴 가사를 붙여 ‘길가에 핀 꽃이라 꺾지를 마오.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 유행가는 요리집은 고사하고 목노집, 색주가집, 심지어 거리 거리에서 판을 쳤다. 그리고 진짜 신파 극단에서는 이 연극의 표절 아닌 도용으로 재미를 보았었고, 홍순언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돈 주체를 못할 정도의 연극이긴 했지만, 그 연출은 내가 했다. 연극의 신이시여! 죄를 사하여 주소서! - <세세년년>, 박진, 세손출판회사, 1991
관련도서
<증언연극사>, 고설봉 구술, 장원재 정리, 보양, 1990 <우리극연구6>, 김미도 편, 공간미디어, 1991 <동양극장의 연극인들>, 김영무, 동문선, 1998 <국립극단 50년사>, 김성희, 연극과인간, 2000
연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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