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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립교향악단

개요
1964년 6월 창단 후 같은 해 12월 창단연주회를 가진 대구시립교향악단은 현재까지 매년 25회 이상의 연주회를 기획하여, 정기연주회와 임시연주회 및 순회연주회를 열고 있다. 국내외 유명연주자들과의 협연무대를 활발히 여는 한편, 매년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 등을 기획해 지역의 중·고·대학생들의 음악교육과 정서 순화에 기여하고 있다. 또 매년 예술의전당 주최로 열리는 교향악축제에 국내 유수의 교향악단과 함께 참가해 뛰어난 기량을 선보여왔다.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전신은 이기홍이 1957년 창단했던 현악합주단 대구현악회이다. 이후 대구교향악단, 대구관현악단, 대구방송관현악단을 거친 후 1964년 6월에 이르러 시립교향악단으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창단 후 초대지휘자 이기홍을 시작으로 2대 우종억, 3대 강수일, 4대 박성완에 이르기까지 국내 지휘자들이 대구시향을 이끌며 단원들의 기량 향상과 우수단원 확보에 노력을 기울여 교향악단으로서의 기틀을 확립시켰다. 이후 세계 무대에서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가진 외국인 지휘자를 영입해 제5대 라빌 마르티노프, 제6대 보구슬라브 마데이를 거치며 동구권 음악에 이르기까지 레퍼토리를 넓히는 등 음악적 역량을 쌓으며 현재 제7대 지휘자 박탕 조르다니아에 이르게 된다. 2002년 1월부터 대구시립교향악단을 이끌고 있는 박탕 조르다니아는 특유의 안정감과 함께 역동성을 함께 갖춘 세계적 지휘자이다.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할 만큼 한국정서에 친숙하기도 한 그는 곡을 충실하고도 독창적으로 해석해내는 통찰력을 가진 지휘자로 대구시립교향악단이 세계적 오케스트라로 도약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구시립교향악단은 항상 새로운 레퍼토리를 연구하고 최선의 연주를 위해 노력해 가까이는 대구 시민들에게 보다 친숙한 교향악단으로, 한 발 나아가서는 지역문화의 기수로 자리매김해 나갈 것이다.
규모
- 상근단원 수: 91명 - 상근직원 수: 4명
연간 연주횟수
- 정기연주회 : 12회 - 비정기연주회 : 8회
활동내역
1978년 제83회 정기연주회 1984년 88올림픽주경기장 개장기념 특별연주회 1990년 제179회 정기연주회 ‘문화예술회관 개관 기념연주회’ 1994년 창단 30주년 기념연주회 1996년 상임지휘자 취임연주회 2000년 송년음악회 2001년 제279~281회 정기연주회 / 교향악축제 / 청소년 협주곡의 밤 / 주한외국인을 위한 음악회 2002년 제288~296회 정기연주회 / 교향악축제 / 시민을 위한 음악회 / 수능생을 위한 음악회 2003년 제297~305회 정기연주회 / 제300회 정기연주회 ‘대구지하철 사고 희생자 추모음악회’ / 수능생을 위한 음악회 2004년 교향악축제 / 창단 40주년 기념연주회
예술가
박탕 조르다니아(Vakhtang Jordania, 1944~) 그루지아 공화국에서 태어난 박탕 조르다니아는 구 소련의 명문학교를 거치며 음악적 역량을 폭넓게 쌓았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트빌리시음악원을 졸업한 후, 레닌그라드음악원에서 교향악과 오페라 지휘를 공부해 우등으로 졸업했다. 그 후 1971년 헤르베르트폰카랴얀콩쿠르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다..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그는 예브게니 무라빈스키의 부지휘자로 출발하여 레닌그라드라디오오케스트라, 사라토프필하모닉, 그리고 하르코프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을 역임했고, 인민공훈예술가라는 칭호를 받았다. 연간 100회 이상의 연주회를 지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그는 차이코프스키콩쿠르에도 두 번 지휘한 바 있다. 그러던 중 그는 구 소련체제에 환멸을 느껴 1983년 미국으로 망명한 직후 카네기홀에서 가진 데뷔 무대에서 뉴욕타임즈로부터 “자신감과 생기로 가득 찬 공연으로 공연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이 모두 기립하며 호응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어진 뉴욕, 로체스트, 로스앤젤레스, 포트워스, 덴버, 미네소타 등지에서의 그의 공연은 굉장한 환호를 불러일으켰다. 이밖에 한국, 일본, 뉴질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오스트리아, 베네수엘라, 아일랜드 등지에서 펼쳐진 해외공연에서도 연이어 호평을 받았다. 1985년에는 챠타누가심포니와 오페라의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1991년 스포케인심포니의 지휘자가 되었다. 1993년에는 하르코프필하모니와 성페테르부르크페스티벌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같은 활동으로 미국에서의 입지를 굳힌 후 1990년부터 1998년까지는 한국 서울에 있는 KBS교향악단의 수석 객원지휘자를 역임했다. 그는 또한 여러 장의 음반을 취입했는데 KBS교향악단과 함께 1992년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1993년 호바네스 39번, 46번을 출반했다. 1999년부터는 뉴욕의 카네기홀, 링컨센터의 에버리피셔홀 등지에서 런던의 로얄필하모닉, 베를린의 독일심포니와 주기적으로 쇼스타코비치 음악을 중심으로 한 연주와 음반취입을 시작했다. 매번 새롭고 색다르게 발매되는 그의 음반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음반들 중에 포함된다. 한편 오케스트라계에서나 오페라계에서도 전문가로 알려져 있는데, 볼쇼이나 키로프극장과 같은 구 소련의 최고 오페라극장에서 지휘를 했었다. 드보르자크의 <루살카> 북미 초연을 지휘했던 미네소타오페라와 함께 펼친 미국 공연과 하르코프오페라의 예술고문으로서 계속 활동하며 오페라계에서 지속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현재 그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채 러시아연방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 겸 예술감독으로 유럽과 아시아 등지를 오가며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미지
포스터
리뷰
(……)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마에스트로 보구슬라브 마데이가 지난 8월 9일 향년 72세로 운명하였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졌었다. 그는 지난 1999년 10월부터 2001년 9월까지 대구시향 상임 지휘자로 내부적으로는 시향의 연주력을 몇 단계 높였으며 외부적으로는 서울연주회를 통해 대구시향이 ‘국내 톱 5’ 교향악단이라는 극찬을 받도록 하였다. 마에스트로 마데이는 폴란드 출신으로 폴란드 포츠난음악대학과 영국 런던길드홀음악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전세계를 무대로 연주 활동과 더불어 바르샤바쇼팽음악원 학장 및 교수로 후학을 지도하였다. 계명대학교 음악교수로 초빙되어 대구와 인연을 맺었으며 러시아 지휘자 마르티노프의 후임으로 시향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마에스트로 마데이는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상임지휘자로 활약하였으나 그가 남긴 업적은 대구시향의 역사에 연연히 기억되리라고 생각된다. 첫 번째 업적으로는 취임 후 바로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를 통하여 오스트리아-독일 고전음악에 대한 기초를 단단하게 하였다. 두 번째 업적으로는 혹독한 조련을 통해서 대구시향의 연주력을 놀랄 만큼 향상시켰었다. 선율을 중시하는 다른 지휘자들과 달리 화성에 주안점을 두어 단원들을 교육시켜서 음악이 한층 더 풍성하고 고급스러우며 세련된 멋을 풍기게 하였다. 세 번째 업적으로는 음악 해석에서 전통에 바탕을 두면서도 참신한 해석을 첨가하여 객석의 애호가들로 하여금 감탄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시향의 연주회는 많은 지역 매니아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음악팬도 증가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대구시향의 연주력을 널리 홍보하는 데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 ‘고(古) 보구슬라브 마데이를 기리며’, 김일봉, <매일신문>, 2004년 8월 17일
연계정보
-대구시립합창단
관련사이트
대구광역시문화예술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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