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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공조합대표

개요
1927년 1월 <문예시대> 2호에 발표된 송영의 단편소설. 젊은 노동자가 조직적인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까지의 과정에서 겪는 가족간의 갈등과 공장주의 탄압을 그리고 있다. 초기 경향소설에 등장하는 노동자가 대개 룸펜프롤레타리아이며 개인적 저항의 좌절로 인한 부정적 전망을 보여주는 데 반해, 이 소설에서는 공장노동자와 조직운동이 등장하면서 이를 극복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내용
젊은 석공 창호는 스물이 갓 된 아내와 첫돌 가까운 아들, 50대 초반의 아버지와 함께 살아간다. 아버지는 석공장 주인의 과원(果園)을 거두고, 아내는 평양의 고무공장에 직공으로 나간다. 창호는 얼마 안 있어 서울에서 열릴 전국석공조합 대표자회의에 평양 대표로 참석할 기대에 부풀어 있다. 그런데 석공장 주인이 대회에 못가도록 회유와 협박을 일삼고 조합 자체에 대해서도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한다. 아버지까지 직장과 집을 잃을까 하는 염려로 대회 참가 재고를 간청한다. 창호는 번민하지만, 자신을 뽑아준 동료 석공들과 그간의 치욕스런 삶을 생각하며 다시 씩씩한 조합원으로 돌아온다. 창호가 평양을 떠난지 닷새째 되는 날, 석공장 주인영감이 창호네 집으로 들이닥쳐 아버지에게 일을 그만두고 집도 비우라고 호통친다. 애원하던 아버지는 결국 분노가 치밀어 주인영감에서 달려들고 극에 달한 울분으로 뒤로 넘어지고 만다. 넘어진 아버지의 얼굴이 질려가는 그 무렵, 대회를 마친 서울 광무대 안에서는 창호의 목소리가 섞인 만세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저자
송영(宋影)
생애(1903~1978)
본명은 무현(武鉉). 서울 출생. 배재고보를 중퇴한 후인 1922년 ‘염군사’에 참여하였으며 미발간 잡지인 <염군>에 소설과 희곡을 실었다고 알려져 있다. 1922년 일본에 건너가 공장노동자로 전전하면서 현장경험을 쌓았고, <늘어가는 무리>(1925)가 <개벽> 현상공모에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카프에 참여하여 계급간의 갈등을 극화해 내었으며 프로 희곡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가로 인정받았다. 카프 해산 후, 대중극의 대표적 극단인 ‘청춘좌’와 ‘호화선’에서 극작 생활을 계속하였다. 광복 이후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에 잠시 관여하였다가 1946년 월북, 북조선문학예술동맹상무위원을 비롯한 요직을 역임하였다.
주요작품 및 작품세계
동경대지진 후 임시가옥을 짓는 노동현장에 들어간 지식인의 갈등을 그린 단편 <늘어가는 무리>로 문단에 데뷔, 노동자 계급의 삶을 작품의 주된 대상으로 설정하고 형상화했다. 그러한 노력은 적극적 실천을 통한 현실변혁의 가능성을 모색한 <석공조합대표>(1927)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이후 <인도병사>(1928), <백색여왕>(1929~1930), <교대시간>(1930) 등에서는 작가의 노동자체험이 목적의식적 창작을 요구하는 프로문학운동의 정론과 효과적으로 결합되지 못함으로써 소설구성상의 문제를 초래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 카프 사건에 연관되어 피검되었다가 풀려나온 후로는 소시민적 삶이나 의식의 현실에서의 패배를 그리는 작품으로 변모하였다. 극작가로서 송영의 희곡은 세 가지 경향으로 나누어진다. 1920년대 후반기 <정의와 칸바스>(1929), <아편쟁이>(1930) 등의 작품들은 촌극이거나 단만극 형식을 사용, 계급의식을 고취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었다. 1930년대 전반기의 <일체 면회를 사절하라>(1931), <호신술>(1931) 등의 작품에서는 공연을 크게 의식하고 부정적인 인물이 자신의 결함을 스스로 폭로하는 방식의 풍자극으로 일관하였다. 카프 해산 이후, 상업극단에 가담한 시기에는 <황금산>(1936), <윤씨일가>(1939) 등을 제외하고는 세태비판 수준 이하의 내용으로 흘러 단순한 소극으로 떨어진 작품이 많다 하겠다. (……) 송영은 노동자소설의 효시가 되는 작가이다. 송영이 노동자소설을 쓰게 된 데에는 물론 1920년대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한 물질적·객관적 조건이 가장 근본적인 기반임엔 틀림없지만, 초기 프로문학운동 단체였던 ‘염군사’ 활동이 실패로 끝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겪었던 노동자 생활과 노동운동의 경험 또한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송영의 소설에서는 통속성이나 주관주의 등의 결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반면, 당시 민족주의문학 계열의 작가인 염상섭이나 현진건 등의 소설이나 초기 경향소설 작가인 최서해와 조명희 등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부정적 전망과는 달리 노동자의 계급적 각성과 노자간 투쟁과정을 통해 도식적·주관적이긴 하지만 ‘긍정적 전망’을 형상화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 <석공조합대표>는 석공인 창호가 전국석공조합대표회의에 참석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공장주와의 갈등 및 창호 집안에 대한 공장주의 탄압을 통해 계급대립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소설은 결말 부분에서 전국석공조합대표회의 장면을 공장주의 창호일가에 대한 탄압과 대비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계급투쟁의 역사적 필연성과 긍정적 전망을 드러내고 있다. <석공조합대표>는 노동조합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조직적 차원에서의 계급모순 극복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용광로>보다 진일보한 의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실제 활동이 전혀 그려지지 않은 채 단지 배경으로만 처리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전망의 추상성을 극복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다. 또한 창호와 공장주와의 갈등의 치열성이 미약하여 그것이 계급간 대립의 차원으로까지 뻗어나가고 있지 못한 한계도 나타난다. 그러나 보다 큰 결함은 창호의 계급적 각성 과정이나 대회 참가까지의 창호의 내적 갈등 과정에 대한 묘사가 전혀 없거나 현실적 계기성을 결여함으로써 소설적 구체성과 서사적 객관성 및 박진감을 획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 - ‘식민지시대 노동자소설의 변모 양상’, 하정일, <식민지시대 노동소설선>, 민족과문학사, 1988(……) 송영의 세계관적 특징은 민중 우선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첫 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송영의 세계관의 근간을 형성한 것은 ‘북풍회’였다. 북풍회 선언은 “조선의 대중은 이미 움직이었으므로”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운동의 주체와 주동력을 민중에 두고 있다. (……) 송영의 민중주의 세계관은 그 자신의 노동 체험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가 노동현장을 택한 것은 북풍회나 염군사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지만, 북풍회의 노선을 작가의 세계관으로 파지하게 된 동인은 그의 노동 체험인 것 같다. 대중과 함께 자본주의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개혁한다는 북풍회의 세계관과 그에 의거한 창작적 실천은 우리 문학사에서 선구적 위치에 놓임도 앞에서 살펴본 그대로이다. 1932년 창작계 총평에서도 <오전 9시> 등의 작품을 몇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세련된 테크닉과 함께 건실한 작가적 의도가 두드러진 것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임화도 “그 시대 우리 문학 운동의 몇 개의 기념비적 작품을 생산한” 송영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조남현은 “송영의 작품은 거의 모두 노동자의 조합운동, 선동의 기미를 보이는 농도 짙은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회월은 송영을 노동자로서의 체험과 세계관에서 독보적 존재였음을 술회하고 있다. (……) 송영 문학의 본령은 노동자 문학이다. 그의 문학에는 조직을 바탕으로 한 전문적 이론가나 지식인이 운동을 매개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노동자가 주체이다. 그리하여 운동이 고도로 조직화되거나 계통성 있게 진행되지 못하는 약점을 가진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들의 삶의 현실에 뿌리를 두고 열정적인 투쟁을 전개한다. 그 결과의 성공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당시 실제 운동이 초보적 단계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창기임을 고려할 때, 송영의 민중주의 세계관은 그의 작품을 통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 ‘송영 문학의 구조적 특성’, 박대호, <한국 근대 리얼리즘 작가 연구>, 문학과지성사, 1988
작가의 말
내가 중학생의 모자를 벗어버리고 처음으로 캡을 쓴 것은 내 나이 열일곱 살 되던 해인 1919년 3월 초하루날 저녁때였다. 온종일 목이 쉬도록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무서움과 겁도 잊어버린 불덩이가 되어 있었다. (……) 그해 가을에 가서 놈들의 유혈적인 탄압으로 말미암아 이 운동은 일단 잠잠하여졌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다시 복교를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때 학생모자를 다시 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유달리 배일사상이 강해서 다시는 일제의 교육을 받지 않겠다는 사상적 견지에서가 아니라, 영락 일로를 걷고 있는 나의 집안 형편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대신 나는 3월 초하루날에 처음 썼던 캡을 그냥 눌러쓰고 한 달에 8원씩 월급을 받는 운송부의 잡역이 되었다. (……) 이 시기는 내가 우편국 고원(雇員)으로 있을 때다. (……) 그때 나는 <구름 끝까지>, <어부>라는 습작 장편소설을 썼다. 그것들이 어떻게 길었던지 아마 지금 200자의 원고지로 환산하면 두 편 합해서 만 매는 되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무계한 일이지만 그때의 나는 오직 창작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활화산 같은 정열 그것만으로, 제 자신도 무엇을 쓰는지 모르고 그냥 쭉쭉 내려갈겼던 것이다. (……) 그때 나는 여전히 우편국원이었다. 왜놈 상관 밑에서 민족적 차별을 받는 나의 직업생활은 나로 하여금 구체적인 배일사상을 가지게 하였으며 동시에 사회주의 서적 및 작품의 영향으로 계급적인 세계관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 이러한 가혹한 노동 속에서 민족적 차별과 계급적 착취를 당하면서도 습작은 하루도 그치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에 나의 사상도 자라났고 또 필력도 단련되었다. (……) 1922년 여름, 나는 왜놈 우편국장을 잉크병으로 때리고 즉석에서 쫓겨나 밥벌이도 할 겸, 고학도 할 겸 해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어떤 유리공장의 견습 직공살이를 하였다. (……)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나는 계급의식이 더욱 앙양되고 프롤레타리아 문학 창작에로의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이 시기 나의 생활은 카프 창립 전후에 발표된 단편들인 <용광로>, <석탄 속의 부부들>, <우리들의 사랑> 등 여러 작품 속에 반영되었다. (……) 청년 공산주의자인 시인 이호, 이적효 등 몇 동무와 더불어 프롤레타리아 문화단체인 ‘염군사’를 조직하였다. (……) 나는 가난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초기의 작품인 소설 <남남대전(男男對戰)>, <어두운 마을> 및 희곡 <백양화>들을 창작 발표하였다. ‘염군사’는 최대 한도로 당시의 합법성을 이용하면서 여러가지 형태로 활동을 하였으나 종내 일제 경찰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다. 그때 나는 서울시 근교의 어떤 농촌에서 사립강습소를 창설해놓고 교장 겸 교원, 소사의 일까지 혼자 도맡아하였다. 학생들은 대부분이 공립 보통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가난한 소작농, 고용농의 자제들이었다. (……) 야학까지 끝내고 밤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으나, 나는 이 시기에 새로운 장편 <저류(低流)>를 썼다. 그리고 단편 <늘어가는 무리>, <선동자>, <용광로> 등도 썼다. (……) 그럴 무렵 카프가 창건되었다. 카프 창건 이후에도 이와 같은 나의 농촌 생활은 계속되었다. 1927년 카프가 마르크스주의적 강령을 들고서 조직적으로 개편된 뒤에는 소년잡지 <별나라>의 편집 사무에 종사하였다. 동시에 카프 서기국의 상무 일꾼으로도 일하였다. 이 시기에 아동문학 작품으로서 소설 <쫓겨간 선생>, <을밀대> 등과 기타 동화, 아동극들을 썼다. 그러나 주로 단편소설을 썼고 간간이 단막 희곡도 썼다.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 <호신술>, <신임 이사장> 등의 단막 희곡, <석공조합대표>, <교대시간>, <인도병사>, <로임부> 등의 단편 소설들, 실로 1년에 수십 편의 창작을 발표하였다. (……) - ‘어두운 밤 폭풍을 뚫고’, 송영, <나의 인간수업, 문학수업>, 인동, 1989
관련도서
<송영>, 한국극예술학회 편, 태학사, 1996 <식민지시대 노동소설선>, 하정일 외, 민족과문학사, 1988 <한국 근대 리얼리즘 작가 연구>, 김윤식·정호웅 공편, 문학과지성사, 1988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한국문학명작사전>, 임헌영·김재용, 한길사, 1994 <한국근대문인대사전>, 권영민 편, 아세아문화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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