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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노래

출연/스태프
출연 봉추산/김명곤 유란,방초/방은진 황매령/이혜은 황운/김기천 선화/박혜숙 성락/고동업 완배 /박철민 광대/송영탁 범수/김병춘 광대/이지은 월중선/오연실 구마모토/이찬영 광대/김현정 복만/함은호 주태백/김남수 억만/안찬모 도상/박희정 순갑/김재성 각설이/서후석 만기/하창범 광대/이홍근,라희선 추월/김소영 운창/강학수 거지소녀/김아리 소년추산/정현우 소년완배/이법민 완용/이현민 소년성락/김종민 덕구/김진솔 스태프 기술감독/구근회 무대미술/오윤균 의상/김현숙 조명/김창기 안무/안찬모 음악/김만중 전통인형,소품/김남수,고규미 무대감독/이미연 영상/강경환,강영민 사진/한세준 분장/안희준
내용
시장통에서 거지패와 함께 생활하다 남사당패에 들어간 소년 추산은 바람처럼 떠도는 삶을 알게 되고 장성하여 패를 이끄는 꼭두쇠가 된다. 추산은 유랑의 길을 가던 중 쫓기고 있는 유란을 숨겨준 것이 계기가 되어 첫사랑을 알게 된다. 한편 어릴 적부터 추산을 시기하던 성락은 추산과 유란의 관계를 질투하며 패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유란 또한 떠도는 삶을 견디지 못하고 추산의 가슴에 아픔만 남긴 채 떠나간다. 10년 후, 추산은 장터에서 우연히 만나 서커스단과의 합작을 제안하는 성락을 완강히 거절하고, 여사당인 선화패와 줄타기의 명인 황운과 합류한다. 어린 삐리였던 황운의 딸 매령은 어엿한 처녀로 성장해 있고, 추산을 사랑하는 제자 방초는 이런 매령을 질투하게 되면서 추산과 매령, 방초의 삼각관계가 시작된다. 어느 날 마을에서 공연을 하던 중 시비를 걸어오는 일본인 건달 구마모토로 인하여 싸움이 벌어지고, 이 자리에서 구마모토의 칼에 맞은 황운은 매령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추산은 일본인들의 이런 횡포에 분노하게 되고, 결국 구마모토를 살해한 후 자신도 부상을 당한 채 쫓기게 된다. 깊은 부상에 신음하는 추산을 간병하던 방초는 약을 구하러 나갔다가 형사에게 붙잡히게 되고 추산을 보호하려다 목숨을 잃게 된다. 추산의 도피로 패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홀로 자신의 곁을 지키는 매령과 어렵게 연희를 이어가던 추산은 청룡사에 도착해 그곳에서 패원들을 다시 만나 길에서 목숨을 잃은 혼령들을 달래는 놀이판을 벌이던 중, 추산을 추격해온 일본 군인들에 의해 매령이 줄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자신의 유랑을 그림자처럼 지켜주었던 매령을 그리워하던 추산은 감옥을 나와 어린 덕구만을 데리고 장터에서 공연을 한다. 그때 도둑으로 몰린 거지 소녀를 궁지에서 구해주고 다시 유랑을 꿈꾸며 함께 길을 간다. 조선 후기에 생겨나서 지금까지도 그 연희 방식을 전승하고 있는 남사당패. 그들은 악천후나 추위로 공연을 할 수 없는 때를 제외하고는 일년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살았다. 길 위에서 자고, 먹고, 놀고, 사랑하고, 죽었다. 그리고 그 길은 산길이기도 하고, 들길이기도 했으며, 계곡길도 있고, 마을길도 있었으며, 숲길이요, 바닷길, 신작로이기도 했다. 그 위에서 살며 예술혼을 불살랐던 그들의 삶은 자연과 사람의 중간 어디쯤 존재하는 인물로의 예술가를 연상하게도 한다. 연극인 뿐 아니라 창극단원, 풍물패 등 여러 분야의 연희자들이 모여 하나의 공연을 이루었으며, 출연자들이 줄타기, 탈놀이, 재주넘기, 꼭두각시놀음, 버나돌리기, 풍물놀이 등의 남사당패의 6가지 놀이를 대역 없이 직접 보여주었다. 길 위에 선 예인들의 외로운 삶과 한을 그려낸 작품 <유랑의 노래>는 전통연희의 무대화에 대한 고민을 한껏 드러낸 작품이다.
김명곤 (1952~ )
1952년 출생. 전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독어교육과를 졸업하였다. 1977년 <뿌리깊은 나무> 편집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1978년에는 배화여고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예술극장 한마당의 대표, 1986년부터 1999년까지 극단 아리랑 대표를 지냈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 2년간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의장을 역임하였으며. 2000년부터 현재까지 국립중앙극장장으로 일하고 있다. 국립극장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연출가로 배우로 활동하였으며 현재도 연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대표적인 연극 출연 작품은 <아벨만 이야기>, <아리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유랑의 노래> 등이며 <서편제>, <태백산맥> 등의 영화에도 출연하였다. 창작 희곡으로는 <창작판소리 수궁가>, <배꼽춤을 추는 허수아비>, <유랑의 노래> 등이 있고 저서로는 <광대열전>, <뿌리깊은나무 민중자서전-신기남편, 함동정월편>, <김명곤의 광대기행-限>, <비가비 광대> 등이 있다. 대표작품 <밤하늘의 별처럼> <인동초> <어머니> <백범 김구> <유랑의 노래> <우루왕>
평론
(……) 연극을 하면서 가난하던 시절, 우연히 채록하게 된 남사당패 여자 꼭두쇠의 일생을 통해 나는 이들 떠돌이 광대들의 삶에 진한 동료의식을 느끼며 언젠가는 이들의 삶을 무대에 올리리라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그 오랜 열망을 오늘에야 실현시킨다. 길에서 나고 사랑하고 죽어간 바람 같은 인생. 사회에서 추방된 천민의 신분으로 남색, 도박, 아편, 술, 싸움질 등 사회의 어두운 이면과 함께 해야 했던 고단한 하루 하루, 그 삶을 지탱해 주었던 한바탕의 놀이와 연희. 이것이 남사당패의 삶이다. 나는 이들의 삶에 담긴 절대적인 고독과 밑바닥 인생의 생명력, 열정적인 예술혼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여 무대에 올리고 싶었다. 60여 명의 등장인물과 40여 개의 장면에 남사당패 옛삶의 흔적을 담으면서 나는 이것에 담긴 현대성을 본다. 허무와 절망, 끝없는 도주와 탈출은 요즘 젊은이들의 감수성이고, 생존의 고달픔과 치열함 속에 우러나는 것은 깊은 휴머니즘이다. 그리고 예술에의 뜨거운 열정과 고집은 이 시대의 광대가 품어야 할 독기와 같은 의지가 아닐까. (……) - 참고: 1998년 프로그램 중 작·연출의 말 조선 말기 이후 뜬패(직업적 유랑 연예인 집단)로 형성된 남사당패는 갖가지 기예와 재담으로 전국 방방곡곡의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들은 대부분 더 잃을 것도 없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고, 동리에 들어온 사당패를 따라 나서는 것으로 예술 인생을 시작했다. 예술가라기보다는 천한 광대나 재인의 범주에 들었던 그들의 삶은 땅에 붙매여 살던 서민의 삶보다 더 고단하고 허수했으리라. 그러나, 그들이 평생 놀았던 재담과 소리의 원천은 바로 그 유랑의 삶이었다. 사회의 밑바닥을 훑으며 사람들을 위무했던 그들의 존재는 현대 연극의 배우들에게 과거와 동시에 미래를 보여줄 거울이 될 만하다. (……) 이 작품이 우리에게 연극 보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지는 않는다. 추산의 삶의 단편들이 시간의 순서로 연이어 놓이지만, 무대는 연극적 공간이 되어 변화하는 대신 모든 사건들이 흘러가는 색깔 없는 공간으로 남는다. 무대와 객석은 극단적으로 밝아졌다가 어두워짐을 반복한다. 거기에 약속된 규율은 없다. 추산을 둘러싼 인물들 역시 파편과 같다. 그들은 추산의 외로운 운명을 만들어주기 위한 도구처럼 나왔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 대신, 배우들이 어렵사리 연습한 남사당패 기예들이 무대를 채우는 주 요소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추산이 ‘왜놈, 양놈 광대’의 침탈과 변화하는 세상에 대항하며 외로움과 한을 천형처럼 안고 광대의 꿈을 이어왔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민족과 민중의 삶, 그리고 예술이 만나는 지점에 남사당패 광대를 두었다. 추산이라는 인물로 표현된 그 삶은 누구보다 도덕적이고 결벽하다. 작가는 우리 시대 배우들, 나아가 예술가들에게 그런 삶을 모범으로 제시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이러한 이상화로 연극은 오히려 가벼워진다. 현실의 무게가 덜하기 때문이다. 광대가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보다 도덕적이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아래 있는 광대가 갑자기 우리를 꿰뚫어 본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높고 낮음의 전도를 느끼며 광대를 받아들인다. 그때 광대는 한없이 낮은 존재이면서 무한히 보는 존재가 된다. (……) - 한겨레신문, 1998년 10월 2일, 노이정
연계정보
-극단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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