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민중극단

개요
윤백남이 개량신파를 목적으로 조직한 극단. 윤백남은 일본 신파의 모방에 머물고 있는 신파 연극계에 대한 반성과 함께 신극을 수립하겠다는 포부를 내걸고 민중극단을 창단했다. 신파배우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안광익을 단장으로 송해천, 안종화, 홍정현, 최일, 나호진, 최난방, 문수일, 이월화 등 주로 신인들로 이뤄진 팀이었다. 창작신파를 공연하는 것으로 신파극계에 신선한 자극을 던져줬으나, 윤백남이 물러나고 극단이 안광익에게 완전히 넘어가면서부터는 원래의 목적을 잃게 된다.
해설
민중극단은 창단 이전부터 신파극 개량을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종래의 비열한 지위에 타락되었던 신극을 수립하여 예술적 지위로 향상케 하며 관중의 요구에 적할만한 정도에서 순문예적 각본을 상연할 계획 - <동아일보>, 1922년 2월 28일 민중극단은 출범하자마자 시연회를 열어 윤백남의 <등대적>과 <기연> 등을 무대에 올렸다. 시연으로 지방도시 순회를 먼저 하고 서울로 올라온 일도 독특한 경우였다. 그런데 민중극단이 신극운동을 목표로 세운 것은 당대의 관심사를 반영한 일이기도 했다. 당시 대표적 민족지 동아일보는 민중극단에 본격 신극운동을 요구하는 논설을 게재한다. 조선 형편에 처하여 민족연극에 오인이 희망할 것은 무엇인가 (……) 민족극단은 우리에게 울음을 주고 우리에게 소리를 발케할 책임이 있지 아니한가. 단테와 셰익스피어는 각각 민족을 위하여 혹 울고 혹 노래하였으며 톨스토이와 고리키는 인생의 근본정신으로부터의 고뇌 사회의 근본 계층으로부터의 신금을 호소하고 발표한 자이니 조선민족의 고뇌 조선민족의 향상을 위하여, 조선생활의 표현을 민중극단에 희망하노라. - <동아일보>, 1922년 6월 10일 그러나 민중극단에게 요구한 ‘조선생활의 표현’은 현실의 여건상 이뤄질 수가 없었다. 민중극단의 레퍼토리 <레미제라블>의 각색본 <희무정>, 윤백남의 <진시황>, <사랑의 싹> 같은 작품들을 보면 조선민족의 고뇌, 생활상의 리얼한 묘사를 찾기 힘들다. 결과적으로 윤백남이 영화 등의 일로 창단 1년을 함께하지 못하고 극단을 안광익에게 넘긴 후로는 민중극단의 행보는 여느 신파극단과 다르지 않게 흘러간다. 안광익이 주도한 민중극단은 초창기 레퍼토리인 <비파가>를 공연하는 등 방황하다가 흐지부지되고 만다. 하지만 민중극단의 신파 개량의 노력은 창작극을 갖고 시도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으며, 이 노력은 뒷날 동양극장에서 완전히 꽃피우게 된다.
대표작품
<등대직>, <기연>, <환희> 등 주로 윤백남의 작품을 공연했다.
윤백남
1888년 서울에서 태어난 윤백남은 16세에 경성학당을 졸업하고 1904년에 황실 유학생으로 도일, 후쿠시마 반성중학을 거쳐 동경 와세다 실업학교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으로 진학하였다. 학업을 마치고 1911년 귀국한 윤백남은 잠시 조선식산은행의 전신인 수형조합 이사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한일 합방이 체결되자 민족자주정신을 계몽시키기 위하여 보성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그후 언론기관인 매일신보에 입사, 편집장을 역임하면서 신극 동인 회원인 조중환을 알게 됐고 1912년 극단 문수성을 창립하였다. 이인직의 원각사를 인수한 윤백남은 민족 계몽을 위한 신극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후 이기세의 유일단과 합쳐 예성좌를 만들었고 1922년에는 나효진, 문수일, 이월화, 안세민, 안종화 등과 함께 민중극단을 결성하여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가지고 연극 작업을 했다. 그러던 중 조선 총독부 체신부의 위탁을 받아 1923년에 처음으로 저축 권장 영화인 <월하의 맹서>를 연출하게 된다. 윤백남이 각색까지 담당한 이 작품은 극적 전개가 조화있고, 세련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이후 윤백남은 영화계에서 활약하다 극작과 역사소설 집필에 전념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공보실장을 지냈으며 초대 서라벌 예술대학 학장으로 재임 중 1954년 작고하였다.
리뷰
(……) 민중극단의 출생 - 조선에 신극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는 이미 십여 년이나 되었으나 삼십만 인구를 가지고 잇는 경성에 완전한 연극장 한 곳이 없음은 직접 연극계에 대한 불익일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에 대해서도 유감 되는 일이라 연극계에 열심히 일하는 윤백남씨의 주선으로 중앙극장의 허가를 얻어 요사이 건축 준비가 진행한다함은 조선연극계에 대한 기쁜 소식이며 씨는 완전한 극장을 조직하기 위해 조선 신파계에 가장 유능한 기능을 가진 안광렬군과 기타 청년 배우를 망라하여 민중극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우선 지방의 흥행을 마친 후에 이월경에는 경성에서 공개할 터이라더라 (……) - <동아일보>, 1922년 1월 17일
관련도서
<한국근대연극사>, 유민영, 단국대출판부, 2000
연계정보
-월하의 맹서
-야화
-윤백남(尹白南)
관련멀티미디어(전체0건)
이미지 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