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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판굿 꽃다지 1

출연 / 스태프
출연 노동자 노래단, 예울림, 민요연구회, 서노협노래패, 극단 현장, 놀이패 한두레, 터울림, 민미협 노동미술부, 미술운동집단 가는패 스태프 연출/박인배 음악/김호철,김애영
내용
1. 1987년 칠팔구투쟁 (힘차게 판을 여는 판씻이의 의미를 가진다) 힘차게 몰아쳐 들어오는 풍물패와 그 장단 사이사이에 울려퍼지는 구호소리. 상황해설과 함께 관객들이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도록 유도되며, 합창대에서 이를 받쳐준다. 1987년 울산 태화강 진군 <총파업가> -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는 기세 (풍물진의 형상) – 1988년 지노협 결성 <동지> (풍물개인놀음도 설정) – 1988년 가을 노동법개정투쟁 (여의도 진군) <노동자 행진곡> (춤과 행진) 2. 노조일상활동 (참가자 개개인의 일상생활의 정서로부터 공연판으로의 몰입을 유도한다) 몇 사람의 전형적인 성격의 주인공들이 설정된다. 노조활동을 둘러싸고 그 성격의 차이에 따라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각자의 집안사정에 따라 고민하기도 한다. - <사랑과 행복>, <꽃다지> - 김씨와 김씨처 <노동자 청춘> - 명진과 오계장 - <해식의 노래> 3. 나리마당 (적으로서의 풍자의 대상을 설정함으로 초기단계의 공감대 형성을 유도한다) 관중석의 구호가 외쳐지는 가운데 사장들이 나와 노동운동에 대한 개사곡을 불러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공권력의 개입을 요청하기로 한다. 4. 파업투쟁 (소외된 노동과 파업을 대비시키고 노동자의 최대의 무기인 단결을 확인한다) <단순조립공> - <노동의 새벽> - <노동의 새벽2> - <장벽을 깨자> - <파업가> 5. 지원방문단 <파업중인 놀이한마당> 전체 관객을 조합원으로 이웃의 동료들이 지원온 것으로 설정된다. <미아리 아줌마> 6. 규찰을 돌며 (집단적 규율을 확인하고 사기를 붇돋운다) <규찰대 춤> - <장작불>, 야식, 음주, 오인, 소주병을 화염병으로 - <진짜 노동자> 7. 관계기관대책회의 (관료, 독점재벌, 정보기관을 상징하는 커다란 탈을 쓴 등장인물들이 나와 노동탄압을 획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8. 부당해고의 위폐 (좌절의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처절하고 끈질긴 투쟁정서의 뿌리를 드러낸다) 위폐공고 – 항의 – 공권력 개입 – 죽음 - <끝내 살리라> - <열사의 그 뜻대로> - 투쟁결의 9. 연대집회 (서노협 노래패가 직접 합세함으로써 연대투쟁의 힘을 느끼게 한다) 주인공들의 새로운 투쟁의지를 다지며 이어서 장면은 연대집회의 장소로 설정된다. 공연에 참여한 각 노조의 깃발들이 박수를 받으며 입장하고 서노협 노래패와 전교조 노래패의 노래가 있는 사이 사이에 선동 연설과 그 내용을 상징하는 커다란 깃발들의 독무가 삽입된다. <노조연대가> - 서노협 노래패 10. 전노협 깃발아래 (전노협 건설의 의지와 열기를 전체 관객의 의식적 구호로 확인한다) 4개의 커다란 깃발들이 다시 모여 힘찬 연대를 상징하며 보다 더 큰 전노협 깃발을 앞세우고 들어온다. 관객들은 모두 일어나 “건설 전노협”을 외치고 전체 출연진의 유도로 전노협 깃발이 세워지면 모두가 노래를 같이 부르고 깃발은 행진을 한다. 깃발춤 – 전노협 깃발 세우기 - <전노협 진군가> - <총단결가> - <노동조합가> - <단결투쟁가> - <전노협 진군가>
평론
노래판굿 <꽃다지>는 전노협 건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공연이다. 아니, ‘공연’을 빙자(?)한 집회이다. 공연인가 하면 집회이고 집회인가 하면 공연이다. 지난 12월초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4회 동안 일만 명 가까운 관중을 들썩이게 하더니 그 여세를 몰아 인천,부산,울산지역을 한바탕 휩쓸었고 이제 서울에서 한차례 더 판을 벌인 후 다시 포항, 대구 등지로 돌아칠 모양이다. 이 노래판굿은 말하자면 노동자 전국조직 건설의 의미와 결의를 다지는 공연행사이자 행사공연으로서, 가는 곳마다 노동자들과 진보적 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고 한다. 양적 변화의 축적을 통해서 새로운 질적 변화의 상태로 나아간다고 언급했다시피 1987년 7,8,9월 투쟁 이후 노동자의 조직은 단위노조에서 지역노조 및 업종별 노조로 대단한 양적, 질적 확산을 이루었고,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거나 노동자 자신이 주체가 되는 노동자 문화예술 활동도 이에 못지않은 발전을 이뤄 왔다. 노래판굿 <꽃다지>는 일한 양질전화를 제대로 증거하는 하나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이 행사를 주관한 서울노동자문화예술단체협의회를 구성하는 여러 문화패들은 각기 오랫동안 노동자들과 집적 접촉하거나 노동자들 속으로 아예 들어가 실천활동을 벌여왔으며, 이제 적지 않은 상호침투를 통하여 노동자적 생활과 의식에 거의 밀착되어 있는, 이를 테면 예술노동자로서의 자기 위치를 점차 자리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 판굿은 연행에 참가했던 사람들 스스로가 이 작품을 두고 ‘그 동안 공연해온 노동연극들의 짜깁기가 될 것’이라고 농담삼아 말했다고 한다. 실제의 공연을 보니 그 농담이 과연 허언은 아니었다. 그러나 <꽃다지> 판굿은 결코 다 떨어진 옷감들을 이것저것 꿰어다 맞춘 엉터리 짜깁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조각난 옷감들을 대담하게 짜고 기워서 전혀 새로운 옷을(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디자인의) 옷을 질기고 편하게 그리고 모양새 좋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과연 노동자들만이 할 수 있는, 노동자의 솔직담백한 심성과 빛나는 투지와 과감한 재단기술,봉제기술이 아니고서는 결코 상상할 수도 없는 값싸고 튼튼한 옷이 멋지게 걸려 있는 느낌이었다. 아니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 구경하러 간 사람들마저 그 멋진 옷을 한 벌씩 얻어 입은 듯한 풍성한 느낌을 받았다. 노래판굿 <꽃다지>가 1980년대를 마감하면서 이처럼 성황을 이루게 된 것은 결코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오늘 이 큰 판이 만들어지는 데 그 동안 작은 현장 연극들이 숱하게 겪어야 했던 고충과 시행착오들이 밑거름이 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의 노래판굿에서는 그 동안 소집단 노동문화패들이 경험해야했던 시행착오들이 상당히 걸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래만 하더라도 전투적인 진군가와 되받아치는 ‘노가바’(노래가사 바꿔부르기) 그리고 가슴속 절절이 스며드는 서정적인 노래들이 두루 망라되어 있고, 몸짓들을 보면 전래의 탈춤 기량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옛 춤사위를 과감히 변형시키고 동작보다는 정지를 활용하여 집단적인 힘을 과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공연 아니 이 집회의 절정은 마지막 장면, 전노협 깃발을 높이 세우는 대목이다. 풍물의 난타와 관중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와 외쳐대는 구호 속에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커다란 깃발이 펼쳐져 나부끼는 그 순간, 판은 비등점을 넘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양적 변화의 축적이 새로운 질적 상태에 도달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리고 그 고양과 충만감은 이윽고 전노협 결성에 대한 굳은 신념으로 이어진다. (<한겨레신문>, 임진택, 1989년 12월 23일, '전노협, 신념의 깃발아래')
연구
대형집회적 총체공연물과 <꽃다지>식 노래판굿 1. 머릿말 89년에 등장한 노래판굿 <꽃다지>의 열풍은 가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89년 <꽃다지1>과 90년 <꽃다지2>, 그리고 91년 봄 <해방맞이>를 거쳐 가을의 <꽃다지3>에 이르기까지, <꽃다지> 공연이라면 만사 제쳐놓고서라도 달려오는 엄청난 수의 관중과 판의 뜨거운 열기는 근대 이래의 우리 예술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87년부터 시작된 연행예술 장르의 노동예술 활동의 집결이라는 의미에서도, 매 시기 운동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내용과 집회적 열기의 창출이라는 점에서도, 그리고 노래판굿이라는 대형집회적 총체공연 양식의 창출과 그 대중적 실험의 성공을 통한 정착이라는 점에서도 <꽃다지>는 80년대 후반 예술운동의 중요한 성과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다지>로 대표되는 일련의 노래판굿 작품들에 대한 연구와 비평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소홀하게 이루어져 왔다. 짐작컨대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이들 작품이 여러 장르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총체공연물이어서 어느 한 장르에서 선뜻 평가·연구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이들 작품이 대형집회적 성격 즉 현장적 운동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음으로써 외적 상황과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완결된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관행화된 우리의 비평·연구 풍토에서 선뜻 예술적 비평과 연구의 대상으로 올리기 힘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꽃다지> 작품들은 줄곧 ‘매우 좋았다’는 감상으로만 남아있거나 예술적 연구가 불필요한 현장성이 두드러진 작품이라는 식으로 취급되어 왔고, 나름의 원리를 가진 예술작품으로 대접받지 못한 감이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는 <꽃다지>라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예술연구 풍토와 역량의 한계로부터 생겨난 일이며, 그 결과 비평가·연구가들은 이러한 작품들을 만들고 평가하고자 하는 실천가들의 고민에 대해 전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 글에서 <꽃다지>식 노래판굿 작품들을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들 작품의 원리를 객관화·논리화함으로써 이후 작품의 창작과 평가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하는 기본적으로 드러난 의도는 물론, 나아가 이러한 작품들을 우리 시대의 중요한 예술작품적 성과의 하나로 대접하고, 나아가 예술과 작품에 대한 원론적 이해와 연구틀을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데 기여하고자 하는 숨은 욕심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바 없는 부분에 대한 언급이라 당연히 거칠고 엉성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해방맞이>와 92년의 <92, 자 우리 손을 잡자>까지를 포함한 소위 <꽃다지>류 노래판굿 작품들을 주로 공연양식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꽃다지>식 노래판굿 양식은 다른 대형집회적 총체공연물 양식과 어떻게 다른지, 즉 노래판굿 양식의 고유한 양식적 특질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 이러한 노래판굿 양식을 비롯한 대형집회적 총체공연물의 출현과 정착이 우리에게 어떤 예술론적 문제의식을 제공하는지에 대한 간단한 단상을 덧붙이고자 한다. 2. 집회적 공연, 공연적 집회 ‘노래판굿’이라는 용어는 <꽃다지>를 통해서 새롭게 조어(造語)되어 일정한 공연양식을 지칭하는 말로 정착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노래판굿은 <꽃다지>식의 대형집회적인 총체공연물을 의미하는 것인바, 이러한 새로운 조어가 필요하고 또 가능했던 것은 <꽃다지>의 공연양식이 그 이전의 어떤 대형총체공연물과 다른 변별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몇몇 대중들은 <꽃다지>에 대해서도, <꽃다지>와는 다른 양식적 원리를 가지고 있는 ‘집체극’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이들이 ‘집체극’과 ‘노래판굿’의 양식적 변별성을 객관적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대형총체공연물이라는 공통성이 더욱 크게 느껴졌거나 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꽃다지>로 대표되는 공연양식 노래판굿이 집체극을 비롯한 다른 대형총체공연물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즉 노래판굿의 변별적 특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노래판굿을 노래판굿답게 하는 특질을 밝히는 데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노래판굿은 그 공연이 매우 대형이며 대규모 대중집회적인 공연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한 장르의 예술에 의존하지 않고 노래, 풍물, 연극, 춤 등 다양한 장르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러한 대형집회적 총체공연물은 노래판굿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몇 종류의 대형집회적 총체공연물을 보아왔으며 또 거기에 익숙해있다. 다른 예술에 비해 공연예술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집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소수이든 다수이든 관중이 한 자리에 모여않아 있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연예술은 기원에서부터 제의 등의 집회와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술사의 흐름은 공연예술과 집회가 분리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집회와 공연예술은 매우 가깝게 서로 넘나드는 경우가 많았다. 즉 공연예술에서 집회적 성격을 보다 강하게 갖는 작품이 사라지지 않고, 또한 잘 짜여진 집회는 공연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시대의 이러한 대형집회적 공연물의 출현이란 그리 신기하거나 유별난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근대 예술사를 훑어보건대, 이러한 대형집회적 공연물이 한꺼번이 많이 출현하는 것은 분명 80년대에 두드러진 현상인바, 이는 80년대라는 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80년대에 들어서서 민족예술운동에서 대형집회적 공연물이 늘어나게 되는 것은 80년대에 대중운동이 성장하고 이로 인하여 대규모 대중집회가 가능해지고 또한 요구되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형집회적 공연물의 출현은 이러한 정세 변화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연극을 중심으로 한 연행예술운동이 70년대 이래 삶의 공간 속에서의 공연예술이 되기 위해 행한 꾸준한 실천과 노력이 이러한 대형집회적 공연물에 대한 요구를 앞서서 추동해낸 측면도 크다. 말하자면 대학 내에 대중집회가 금지되었을 시절에도 연극이나 노래공연을 통해 대중집회적 분위기, 즉 현장적 운동성을 지난 공연을 앞서서 만들어내어 대리집회적 효과를 만들어내었으며, 나아가 70년대 이래 꾸준히 대중의 일상공간, 교육공간에서의 공연예술의 존재 가능성을 실험해온 마당극운동은 보다 적극적으로 80년대 중반 이후 가능해진 대중집회들을 공연예술적으로 구성해내는 데에 기여하였다. 따라서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몇 종류의 대형집회적 총체공연물은, 넓게 보아서는 공연적 집회 즉 무굿을 형태로 이뤄지는 장례식이나 추모행진, 공연적으로 잘 구성된 총학생회 발대식 같은 대형집회 등과 함께 하나의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지점에서는 공연인지 집회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양자의 구분은 어느 정도까지는 필요하고 또 가능하지만 공연의 본원적인 집회성이나 대중의 정서적 조직화와 고양을 요구하는 집회의 본원적 성격에서 이들이 반드시 분명한 선으로 구별되어야 한다고는 볼 수 없다. 또한 이러한 대형집회적 공연물은 대개 여러 장르가 결합된 총체공연물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공연이 대형화되면서 불가피하게 다매체적인 화려함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70년대로부터 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몇 백 명 규모의 작은 집회적 공연에서는 마당극, 즉 연극의 주도성이 두드러진 반면, 80년대 중후반 집회적 공연이 대형화되면서는 노래, 춤, 풍물 등의 역할이 강조되고 특히 노래의 주도성이 두드러진다. 이는 연극이 인간의 산문적인 움직임과 언어를 표현의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대사는 마이크를 쓰지 않는 것이 오랜 관행이어서, 야외의 대형 공연의 경우 산문적인 미묘한 표정이나 움직임, 육성의 대사가 많은 관중에게까지 잘 전달되지 않는 것에 비해, 노래나 춤, 풍물과 같은 장르는 보다 운문적일 뿐 아니라 노래의 경우에는 이미 관중과의 일정한 작품의 공유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보다 야외의 대형의 공연에 보다 적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작품들이 노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노래에 의존하는 정도는 공연에 따라, 혹은 양식에 따라 양적인 차이가 있다. 3. 몽타쥬식 총체공연 양식(집체극) 대형집회적 총체공연물 양식으로서 그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소위 집체극이라고 불리는 몽타쥬식 총체공연이다.(이 글에서 집체극이라는 알려진 용어 대신 몽타쥬식 총체공연이라는 다소 거추장스러운 용어를 쓰고자 하는 것은 ‘집체극’이라는 용어가 그러한 양식을 지칭하기에 적절하지 못하다는 판단 때문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 장의 마지막에서 설명하겠다) 노래판굿도 집체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간간이 있다는 것은 그 용어가 그만큼 널리 알져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대형집회적 총체공연물의 몇 가지 양식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집체극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쉬울 듯하다. 집체극이라는 말은 88년 4월, 현재 노동자문화운동연합의 전신이었던 민중문화운동연합의 ꡔ제1회 민중문화의 날ꡕ 공연에서부터 비롯되었지만, 실상 그 양식적 틀은 그보다 훨씬 전인 83년 경부터 시작되어 85년 경에는 이미 학생대중에게는 익숙해진 소위 노래공연의 양식과 같은 것이다. 88년 이른바 집체극의 공연 주체들은 그 공연을 올리면서 연극운동의 주도적 양식인 마당극을 봉건적 양식으로 규정하여 전면 부정하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양식이 바로 집체극이라는 내용의, 다소 자극적이고 센세이셔날한 글 <집체극에 대하여>1)를 공연 팜플렛을 통해 발표함으로써 용어의 대중적 확산이 보다 손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부정확한 사실 인식과 논리적 비약으로 마당극운동의 성과와 마당극양식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오류를 빚었으며2), 특히 극이 아닌 대형집회적 총체공연물인 집체극을(집체극이 왜 ‘극’이 아닌가에 대해서는 바로 뒤에 설명하겠다) 극복대안으로 내세우고 있음으로 해서 많은 대학탈반과 연극반이 극을 포기하고 집체극의 낭송자의 역할에만 매달리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양식은 88년에 다소 자극적으로 다가왔던 것처럼 완전히 새롭게 등장한 양식이 아니다. 이 양식은 이전에 소위 ‘노래극’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몽타쥬식 노래공연3)과 동일한 양식이다. 이 몽타쥬식 노래공연은 83년 고려대 노래패 석화회에서 처음 시도하고 84년 노래모임 새벽의 <또다시 들을 빼앗겨>를 계기로 대학노래패 사이에 급격하게 확산된 양식이다. 그 이전에는 대학노래패에서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노래를 발표하던 노래발표회식의 공연만이 이루어졌었는데, 노래발표회식의 공연은 노래 하나하나가 가지는 메시지와 감동을 가장 중시하는 대신, 노래라는 단형의 서정적인 예술작품이 가지는 특성 때문에 인지적 내용성이 매우 적고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내용이나 작품적 흐름은 없거나 매우 느슨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학생운동 상승기였던 83, 84년에 이르러 단형의 서정적 노래 하나하나가 갖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서서 작품 전체의 인지적 메시지를 강화하고 공연 전체가 일관된 주제의식과 흐름을 갖춘 노래공연에 대한 요구가 생겼고, 몽타쥬식 노래공연은 이와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내용 전개나 어조를 중심으로 몇 부로 나뉘어지며, 각 부는 또 개개의 노래를 중심으로 몇 개의 소단위로 나뉜다. 그리고 각각의 소단위는 시나 성명서·보고문 등의 낭송, 사진·그림의 영사를 통해 노래나 음악보다는 인지적으로 구체적인 인식을 전달한 다음, 이를 노래로 연결하여 하나의 통일적 인상을 부여하며 정서적으로 마무리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몽타쥬식의 연결로 각각의 낭송 멘트, 사진과 그림, 노래 등은 보통 따로 존재할 때보다는 훨씬 인식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강화되고 풍부한 메시지를 관중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노래로 하나의 소단위가 정리되고 나면 또 그 이미지를 바탕으로 다음의 소단위로 연결된다. 즉 각 소단위의 구성에 비해 소단위끼리의 연결은 연상적으로는 느슨하되 논리적인 편이다. 각각의 소단위들이 단순 나열된 것 같으면서도 한 부를 다 보고 나면, 우리 사회의 민중들의 고통이든, 일제시대의 암울했던 역사이든,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된다. 그리고 각 부는(예를 들어 1부가 민중의 고통, 2부가 지배자들의 행태, 3부가 투쟁에의 결의 등으로) 나름의 흐름을 가짐으로써, 공연은 (개개 노래의 나열이 아니라) 일관된 흐름을 가진 하나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진다. 가수는 노래발표회처럼 조명 속에서 등장하여 사회자의 소개를 받고 관중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 사회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노래 작품에 대한 소개도 없다. 가수와 낭송자는 암전 중에 등장하여 노래나 낭송이 끝나면 인사나 관중의 박수 없이 암전되고 퇴장한다.(가끔 오페라 공연에서 아리아 중에 박수가 나오는 것처럼 노래의 중간이나 노래가 끝난 직후 암전을 무시하고 박수를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멘트는 정서적으로도 고양되어 있으면서도 도시적 건조함이 있다. 문장은 신문기사나 성명서에서 직접 따온 것이 많으며, ‘0000년 0월 00일, 00사건 발발하다’ 식의 일지 형식의 것도 많다.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관중에게 사실만을 전달할 뿐 평가나 감정적 반응, 결의의 촉구 등을 극도로 배제하고 있는 듯 보이며, 그래서 매우 건조하고 절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각 내용의 선택과 조합, 낭송자의 객관적인 듯하면서도 긴장되고 격앙된 어조, 각 멘트의 긴박한 연결 등은 관중으로 하여금 일정한 입장과 태도를 갖게 하며 상황을 지켜보는 긴장감 속에 몰아넣으며 정서적으로 고양시킨다. 이렇게 멘트가 주로 건조한 사실 전달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멘트의 적극적 사용은 주로 현실의 암담한 모습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부에서(대개는 1부에 이러한 것이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며, 투쟁의 결의를 촉구하는 부분은 아무런 멘트가 없이 투쟁적인 노래의 쉴 틈 없는 연속으로 관중의 투쟁정서를 고양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이러한 작품들은 각각의 부분들은 이미 있는 노래나 시, 성명서 들로 채워진다 하더라도 부분부분을 연결하여 전체를 짜나가는 구성에 있어서나 연출에서는 전문적 기량이 요구되며, 이를 연행하는 가수나 낭송자 역시 작품의 리듬감을 잃지 않도록 반복적인 연습이 요구된다. 집체극은 이러한 몽타쥬식 노래공연 양식에 풍물과 춤이 더 결합되어 시각적인 부분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물론 작품에 따라 풍물과 춤의 역할을 매우 극소화되기도 하며 실제로 <제2회 민중문화의 날> 공연에서는 거의 노래가 대부분을 차지하기도 하였지만, 88년 4월의 <제1회 민중문화의 날 공연>은 풍물과 춤, 실루엣 등의 다양한 예술이 그 틀 속에 결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즉 몽타쥬식 노래공연으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공연양식은, 88년 집체극이라는 이름으로 대형 총체공연물로서 완성된 셈이다. 따라서 집체극 역시 앞에서 이야기한 몽타쥬식 노래공연과 동일한 구성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정조나 질감의 면에서도 동질적이다. 88년 민문연의 집체극에서는 그 멘트가 주로 김정환의 시로 채워졌으므로 일반적인 기사나 성명서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지만, 그 김정환의 시 역시 이러한 공연의 관행을 존중하여 사실의 객관적 전달이라는 큰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풍물이나 춤도 노래와 멘트 연결의 리듬감이나 질감을 해치지 않고 긴박하고 스피디하면서도 격앙되고 예리한 느낌을 주도록 짜여져 있다. 즉 이 양식은 긴박하고 도시적인 스피디함과 예리한 질감을 가지고 있으며, 격앙되어 있으면서도 주지적인 건조함과 감정절제의 질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질감이야말로 <꽃다지>식 노래판굿 양식과의 두드러진 차이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작품의 특성 때문에 관중을 집단화·자발화하지 않는다는 것도 집체극의 노래판굿과 구별되는 가장 큰 변별성 중의 하나이다. 감정의 직접적 표현, 행동의 촉구, 평가나 호소 등이 아닌 사실의 건조한 전달을 주로 하는 멘트에서도 보여지듯이, 이 작품은 관중으로 하여금 작품과 작품 속의 상황을 시종 조용하고 냉철하게, 그러면서도 긴박하게 지켜보게 하다가 마지막에서 투쟁의 결의를 촉구하거나 해방된 세상으로 기쁘게 나아가는 전도양양의 느낌을 주는 식으로 되어 있다. 노래도 함께 따라부르지 못하도록 하는 암전이나 음향 처리를 하고 있으며 노래 함께 부르기 같은 시간도 없다. 사진이나 그림의 영사 역시 이러한 효과를 돕는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관중의 직간접적인 개입을 철저히 제거하는 진행과, 관중들을 개별화시켜 개개인이 무대 위의 상황에 집중하게 하는 암전 처리로, 대학의 노천극장과 같은 규모의 관중이 모였다 할지라도 이들이 집단화·자발화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이 요구하는 것은 관중들의 예리하고 냉철한 현실인식과 전망, 그리고 개개인의 단호한 결의 같은 것이리라 여겨진다. 그래서 집체극은 전반적이고 인식적이며 주지적이며 개인적인 성격이 강한데, 여기서 인식적 성격이라는 것은 개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양이라기보다는 주지적인 질감의 차원의 것이다. 즉 관중 개개인으로 하여금 현실을 긴장감 나게 ‘지켜보게’ 하는 태도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질감적 차원의 것이다. 이 양식은 그 출발에서도 대학노래패로부터 시작되었거니와, 88, 89년의 전성기에 이르러서도 주로 대학의 문화패에 의해 대학생 관중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작품의 전반적 질감이나 노래의 선곡에서 노동자관중의 취향과는 다소 유리되었고, 따라서 노동자대중에게는 그리 대중화되지 못하였지만, 주지적이고 인식적 태도를 바탕으로 운동을 대하는 대학생 관중에게는 매우 빠르게 대중화되었다. 마지막으로 ‘집체극’이라는 용어에 대한 유감을 덧붙여야겠다. 이 용어는 이러한 양식을 지칭하는 이름으로는 전혀 적당하지 않다. 우선 ‘집체’라는 말은 ‘집체창작’, ‘집체무’ 등의 용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한이나 연변에서 사람이 많이 모여서 한다는, 즉 집단적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므로, ‘집체극’이라는 경우에서와 같은 ‘여러 장르가 결합되어 있다’는 의미로 쓰기에는 합당하지 않다. 또한 ‘극’이라는 말도 그러하다. 이 양식은 처음에도 노래극이라는 용어로 불려졌고, 지금도 88년에도 집체극이라고 명명되어, 작품의 창작자나 대중의 대부분이 ‘극’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 양식은 극과는 매우 다르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는 인물과 사건으로 이루어지는 극의 원리가 아니라 연상에 의존하는 몽타쥬적인 원리이다. 가끔 짤막한 극적 장면이 노래극이라는 용어가 쓰일 때가 있는데, 그 경우에도 대부분은 연극적 장면이 마치 낭송이나 슬라이드처럼 몽타쥬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식은 ‘극’이라는 말로 지칭되어서는 안된다. 노래극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몽타쥬식 구성원리와는 달리, 오페레타나 뮤지컬 등 완벽한 극적 흐름 속에 노래가 대사로 기능하는 등 연극의 주도 속에 노래가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오래전부터 필자는 이 양식을 노래‘극’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누차 한 바 있는데, 이는 단순한 용어상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의 창작 실천과 연관된 문제이다. 즉 이 양식은 소위 오랜 축적을 이룬 양식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된 것인데, 이러한 양식을 노래극, 집체극 등의 ‘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이 양식의 구성방식이 극과는 다른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극이 되다만 작품, 극을 만들지 못해서 대충 얽어놓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몽타쥬식 구성방법의 나름의 원리와 그 장단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결국은 일관된 인물과 사건 등 극적 구조를 가져야만 완성되는 작품이라는 생각으로 불필요한 극 지향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대학노래패에서 이러한 양식의 공연을 함에 있어서 무리하게 극적 원리를 관철하려다가 실패한 경우는 적지 않으며, <제3회 민중문화의 날>의 공연에서도 동일한 오류에 빠졌었다. 87년 즈음 이 몽타쥬식 노래공연 양식이 극이라는 잘못된 명칭으로 불려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북한의 음악무용서사시라는 공연양식의 명명법을 본따 ‘음악서사시’라고 부르자는 제안이 있기도 했었지만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 4. 노래판굿 노래판굿은 노래극, 집체극 등 몽타쥬식 총체공연과는 다소 늦은 89년 겨울에서야 <꽃다지1>로서 등장하였다. 노래판굿 양식도 물론 몽타쥬식 총체공연과 마찬가지로 전체를 관통하는 극적 원리를 갖지 않으며, 따라서 처음부터 ‘극’이라고 명명되지 않고 ‘노래판굿’이라고 명명된 것은 다행스런 일임에 틀림이 없다. 노래를 중심으로 하는 대형 총체공연물이라는 점에서 이 양식은 여러 가지로 몽타쥬식 총체공연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한 작품이 몇 개의 부로 나뉘어지고 각 부는 또 각기 노래와 풍물, 춤, 연극적 장면 등의 연상적 연결로 이루어지며, 작품 전체가 일관된 내용과 흐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노래는 역시 각 부분의 정서적 고양과 관중의 정서적 공감대 형성의 중심점을 이루며, 이를 중심으로 연극적 장면과 멘트, 풍물판굿 등이 배치되어 단형의 서정적 노래가 지니는 정서에 산문적 구체성을 부여하거나 그 정서를 더욱 풍부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혹은 노래가 먼저 상황과 분위기를 열어주고 이어서 연극적 장면이 배치된 후 다시 노래로 정리해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몽타쥬식 총체공연에서는 기사나 일지 등의 객관적인 사실 전달의 멘트와 사진 영사가 하던 역할을 노래판굿에서는 주로 연극적 장면과 풍물 등이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즉 객관적인 사실 전달의 짤막짤막한 멘트를 긴박하게 연결하는 대신, 주로 마당극 양식으로 이루어진 노동연극의 한 장면과 같은 연극장면, 노동자들의 투쟁을 대형춤 내지는 춤적 마임으로 형상화한 장면(예를 들어 노천극장의 큰 마당을 꽉 채우는 골리앗크레인 투쟁 장면 등) 등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다. 이들 장면에서는 노동자와 민중 인물이 주인공이며, 이들이 그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또한 낭송자의 멘트 역시, 객관적인 사건 전달을 긴박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대중집회의 사회자처럼 노동자 내지는 관중의 입장에서 직접 투쟁의 결단을 하며,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분노, 기쁨, 감격 등 정서적 평가를 내린다. 노동자의 입에서 나오는 넋두리, 승리의 기쁨, 고민스러움, 기막힘, 분노 등이 그대로 관중들에게 전달되며, 관중들이 함께 이들과 같은 태도를 취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객관적 사실 전달의 짤막한 멘트의 연결에서 풍겼던 스피디한 긴장감, 예리함, 격앙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을 냉철하게 지켜보는 듯한 절제와 주지적 분위기가 사라지고, 작품 안에 등장하거나 멘트를 하는 노동자들의 울끈불끈한 질감과 그들이 내리는 평가와 정서적 반응이 그대로 풍겨나오는 주정적인 분위기, 그리고 대개의 연극장면에서 만들어내는 노동자 집단의 집단적 낙관성이나 투쟁력 등이 배어나온다. 물론 노래판굿의 이러한 장면에도 스피디한 긴박함과 절제가 있으나, 그것은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의 절제와 스피디한 긴박함이 아니라, 그 상황 한복판에 들어서서 그것을 체험하는 자, 싸움을 수행하는 자의 긴박함과 절제이다. 따라서 그 긴박함은 도시적이고 예리한 주지적 분위기의 그것이라기보다는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 특유의 여유와 치열함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관중이 상황에 대하는 태도를 몽타쥬식 총체공연과는 다른 것으로 만든다. 몽타쥬식 총체공연이 관중을 개개인으로 만들고 그 관중 개개인이 상황을 냉철하고 긴박하게 지켜보도록 만든 다음, 이를 바탕으로 일정한 다짐을 유도하거나 해방된 세상을 향하고 있는 전도양양의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에 비해, 노래판굿은 관중을 집단화·자발화시킨다. 마당극적인 노동연극 장면, 대형 춤판들과 집회장의 사회자와 같은 태도로 하는 멘트 등은 노동자와 민중의 삶과 집단적 투쟁에 대해 객관적인 거리를 가지지 않고 바로 그 한복판에 있다는 느낌을 주게 되며, 따라서 관중으로 하여금 그러한 노동자의 집단적 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이들과 같은 분노와 고통, 기쁨 등 정서적 평가와 투쟁의 결의를 갖게 한다. 또한 멘트 낭송자는 마치 관중들을 집회장에 모인 집단적이고 자발적인 관중으로 대하며, 각 연극 장면의 흐름이나 전체의 흐름 모두가 (마치 마당극의 그것처럼) 관중이 집단적이고 자발적으로 호흡을 개입시킬 수 있도록 의도적인 ‘틈새’를 열어놓고 있다. 즉 공연의 참가자들은 그 곳에 모인 관중 집단을 자신들과 이야기 상대로 놓고 자신의 대사나 행동에 의도적인 틈새를 열어놓음으로써 그들이 대꾸하거나 동조하는 호흡을 집단적으로 개입시키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래판굿은 매우 스피디하고 리드미컬하나 그것은 숨죽이고 지켜보는 스피디함과 긴박함이 아니고, 집단적인 관중과 끊임 없이 주도받으며 관중과 함께 만들어가는 리듬감이다. 그리고 매우 큰 판에서 이러한 주고받음의 리듬감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므로, 이는 대본 구성, 연기와 연주, 연출 모두에서 당연히 매우 전문적인 기량을 요구한다. 관중의 집단적 반응까지를 계산하는 치밀함과 그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터져나오는 매 회 관중의 즉각적 움직임에 대처하는 즉흥성을 요구한다. 이렇게 관중이 집단화, 자발화되는 데에는 노래와 음악의 쓰임도 크게 한 몫하고 있다. 노래판굿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관중과 노래를 함께 부르는 시간을 마련해놓고 관중이 익숙한 노래들을 합창단과 함께 부름으로써 관중의 집단화, 자발화되도록 한다. 또한 중간중간에도 관중과 함께 부를 수 있는 종류의 집단적 정서의 노래(예를 들어 행진곡풍의 투쟁가 등)를 의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관중의 집단성과 자발성을 다시 한번씩 되잡아나간다. 88년 집체극에서 관중이 함께 부를 수 있는 행진곡풍의 투쟁가가 극도로 배제되었다거나, 행진곡풍 투쟁가인 <진짜 노동자2>, <전진하는 새벽> 등을 관중이 따라부르지 못하고 노래의 내용을 개인적으로 음미하고 관조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느리게 불렀던 것과는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바로 이러한 다른 특성 때문에, 각 부분의 연결이 연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몽타쥬식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렵게 한다. 즉 몽타쥬라는 기법 자체가 미술에서 시작하여 영화에까지 확장되어 쓰이고 있기 때문에, 주로 대상을 ‘지켜보는’ 태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은 넓은 노천극장에서의 집중을 위해 밤을 선택하는 것이 보통이며, 보통의 경우 객석의 암전도 이루어지나, 작품 자체가 이러한 암전 속에서도 관객이 집단성과 자발성을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관중은 객석 암전에도 불구하고 집단적으로 구호를 따라 외치고 노래를 함께 부르며 집단성과 자발성을 고양시켜 간다. 배우나 낭송자, 가수들은 사회자의 소개를 받거나 관중에게 인사를 하지 않지만, 재미 있는 연극 장면을 끝내고 퇴장할 때나 독창가수가 노래가 끝난 후에는 관중이 박수를 하는 것이 보통이며, 연극 장면 중간중간에도 구호나 반응, 박수를 할 틈새가 열려있는 것처럼, 이때에도 역시 관중이 박수를 할 수 있는 틈이 보장되어 있다. 이렇게 관중이 집단화, 자발화되어 있기 때문에 노래판굿은 시종 격앙된 집회장의 분위기를 유지하게 된다. 관중은 끊임 없이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함께 부르게 되며, 공연의 마지막에서 투쟁의 결의를 한 후 자연스럽게 마당에 내려와 대오를 지어 깃발과 풍물패를 앞세우고 행진까지 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꽃다지>류의 작품이 그때마다 어느 대중집회 못지 않은 열기를 안게 된 것은 단지 작품의 내용에서만이 아니라 양식상으로도 보장되어 있었던 것이며, 작품의 마지막을 아예 단병호 전노협 의장 등 실제 인물로서의 연사가 나와 투쟁이 결의를 모으는 식의 완전히 실제의 집회와 거의 다를 바 없이 마무리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도 앞에서부터 이러한 집회적 분위기를 유지시켜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집회적 분위기와 관중의 집단화·자발화는 노래판굿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공연을 본 관중들이 앞으로의 투쟁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는 것도, 사람이 많이 모이고 분위기도 좋았던 성공한 집회에서 받는 감동과 흡사한 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노래판굿의 이러한 제반 원리는 이전 시기 마당극운동의 성과를 계승한 80년대 후반 노동연극, 그리고 노동가요의 성과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노래판굿이 노동연극, 노동가요 등 80년대 후반 노동예술의 성과를 결집하고 있다는 것은 비단 기존의 연극 장면이나 노래를 쓴다거나 기존의 작품에서 내용을 빌어온다거나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노동연극, 노동가요의 연행원리와 정서, 질감, 매 시기 운동 속에서 내용과 양식을 선택하는 태도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래판굿은 학생과 지식인은 물론 노동자대중에까지 널리 대중적이다. 오히려 노동자대중에게 먼저 정착한 후 그 여세로 지식인과 학생대중까지를 끌어들였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4. 역사맞이굿과 그 밖의 양식 앞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 양식이 80년대를 대표하는 대형집회적 총체공연물이지만, 이외에도 몇 가지 양식을 더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이밖의 몇몇 양식 또한 적잖이 공연되었던 것일 뿐 아니라, 앞의 두 양식과의 비교 역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역사맞이굿’이다. 이 양식은 주로 대학에서 상황극이라 불렸던 양식이다. 실제 상황이 벌어지는 것처럼 집단적으로 이를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일 텐데, 이미 상황극이나 시츄에이션드라마 등의 용어가 연극, 방송드라마 등에서 쓰이고 있어 적절치 못하다. 또한 실제 상황의 재현이라는 의미에서는 극적이라 생각될지 몰라도 실제 극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오히려 이보다는 연행예술운동의 선배들이 붙여준 역사맞이굿이라는 용어가 이 양식의 본질에 접근하는 정확한 용어라 생각된다. 말 그대로 이 양식은 한 집단이 함께 기억하고 기념할 만한 역사적 사건을 그 집단 성원 모두가 참여하여 몸으로 되풀이하여 맞이하며 기념하는 의식이다. 이는 84년 5월 서울대학교에서 처음 시도된 후 각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필자는 그 공연은 보지 못하였고, 또 이 양식이 워낙 의식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어 각 대학에서 이루어진 개개의 작품들이 작품으로서 기록이 남아있다기보다는 일과성의 의식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실제 작품의 예를 들지 못하고 대개의 관행에 근거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어느 대학에서 5월에 광주항쟁을 기억하기 위해서 역사맞이굿을 벌인다고 해보자. 이 경우 학생회관 앞은 도청 앞으로, 00건물 앞은 전남대 앞으로 설정되는 등 학교 전역이 광주항쟁이 벌어지던 그 때의 광주 시내로 설정된다. 즉 생활의 공간 전체가 공연의 무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학교의 학생 모두(적어도 공연이자 의식인 그 행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배우가 되어, 00과는 충장로에서 시위를 하던 시민들로, △△과는 공수부대원들로 역할을 맡는 등 참가자 집단적으로 일정한 역할을 맡는다. 즉 관중과 배우가 따로 없으며, 관중이 모두 배우가 되어 참여하는 것이다. 참가자들은 대본을 가지고 대사를 외우거나 연습을 하지 않는다. 전체의 대본과 대사는 연출자만이 알고 있다. 대신 이 작품은 작품 전체의 흐름을 알고 있는 여러 명의 연출자 내지는 지휘자가 필요하며, 이들은 연행이 이루어지는 요소요소마다 배치된다. 이들은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 메가폰을 통해 참가자 집단에게 어떤 행동과 구호를 할 것인가를 지시하며(예를 들어 “00과 학생들, 여러분들은 0일 00시 충장로에서 시위를 하는 시민들이며, 반대편의 △△과 학생들은 이를 저지하는 공수부대원들입니다. 시위대는 건물 앞쪽에서 동쪽으로 시위를 하면서 이동합니다. 이때 구호는 ‘계엄군은 물러가라’이며 노래는 <훌라송>입니다. 노래 한 곡이 끝날 즈음,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에게 무차별 구타를 가하면 시위대는 뒤로 물러서면서 쓰러지십시오” 식의 상세한 지시를 한다), 참가자들은 지시대로 움직인다. 이러한 상세한 지시를 위해서는 여러 명의 연출자는 작품의 흐름을 잘 알고 있어야 하며 서로 연락 가능해야 한다. 또한 지시대로 참가자들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참가자 집단마다의 지휘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경우 대개 (평소에는 공연을 위해 무대에 섰던) 대학 문화패 성원들이 이러한 연출과 연락, 집단의 지휘 등을 맡게 된다. 이렇게 진행되므로 이를 다 하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하여, 대개는 한나절이 꼬박 걸린다. 이 한나절동안 참가자들은 학교 전역을 누비면서 열흘 간의 광주항쟁을 몸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대개의 참가자들은 이 역사적 사건의 대강의 진행과정과 그 역사적 의의를 집단적으로 알고 있으며, 또 그래야만 이러한 공연을 가능하고 또 의미 있다. 따라서 대개의 공연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 참가자들에게는 어떤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한 일이며 그 역할에 대해 완전한 동일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맡아 재현하는 행위는 격렬한 싸움판이기 때문에 시위대의 역할을 맞아 구호를 외치다가 쓰러지는 행동을 집단적으로 직접 몸으로 재현하면서 쉽게 그때 광주시민의 심정과 동일시되고, 그 분노와 고통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몸으로 광주항쟁을 재현하고 그 의미를 체험적으로 되새기면서, 집단적인 결의를 다질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몽타쥬식 총체공연은 관중이 개별화되어 벌어지는 상황을 긴박하게 지켜보며, 노래판굿을 관중이 집단화·자발화되어 작품의 흐름과 작품 내적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호흡을 주고받는다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역사맞이굿은 관중이 자발적이고 집단적일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정한 지시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통제될 수 있을 정도로 조직화되어야 가능하다. 또한 이들이 오랜 시간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일상 속에서 익숙해져 있는, 충분한 넓이의 공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조건이 갖춰져야 하기 때문에 역사맞이굿은 어떤 공연과도 다른 특유의 체험을 할 수 있는 대형집회적 총체공연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이 각 과별로 조직되고 움직일 수 있는 대학을 제외하고서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또한 대학에서도 학생운동 상승기였고 총학생회와 학내 대중집회를 쟁취해내었던 만큼 학생 대중들의 조직적 귀속력과 자발성이 가장 강했던 84년의 유화국면에서 가장 잘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거론해야 할 것은, 노래와 춤 등 각 요소가 사회자에 의해 진행되는 식의 공연양식이다. 이는 가장 손쉽게 만들어지고 또 볼 수 있으며, 대규모 노래공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인데, 발표회 양식이라 해야 할지, 쇼 양식이라 해야 할지 아직 적합한 용어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름이야 어떻건 간에, 이 양식은 각각의 부분이 앞의 어느 양식보다도 독자성이 강하며 따라서 각 부분의 연결은 가장 느슨하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나 흐름도 매우 약하다. 각 부분의 독자성이 강하므로 각각의 노래와 춤은 그 자체로 관중을 감동시켜야 하며, 이를 위해서 각 부분의 긴밀한 구성보다는 각기 완결된 작품인 소단위가 잘 다듬어져야 한다. 관중 역시 전체의 흐름보다는 각기 완결된 작품 하나하나를 감상하는 태도를 가지며, 하나가 끝나면 충분한 박수를 보내고 다음 순서를 기다린다. 각각의 연결은 사회자에 의존하며, 사회자는 분위기를 보아 적절한 긴장과 이완을 주며 전체적 흐름을 조절해야 하므로 이 양식에는 매우 숙련된 사회자가 필요하다. 작품으로는 매년 3월 민예총에서 주최하는 노래공연 <자, 우리 손을 잡자>나 민가협이 연말에 여는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공연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며, 91년 가을의 <꽃다지3>도 (꽃다지류로서는 유일하게) 노래판굿적이라기보다는 이러한 발표회 양식의 경향이 강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 제기되는 예술론적 과제 이상에서 80년대 우리 예술운동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지고 널리 공연된 대형집회적 총체공연물의 양식에 대해 일별하였는데, 이를 통해 노래판굿이 다른 양식과 구별되는, 즉 노래판굿만이 가지는 고유의 양식원리와 특질이 무엇인지 어설프게나마 밝혀졌으리라 생각한다. 이들 대형집회적 총체공연물들은 80년대 예술운동의 중요한 성과의 하나로서, 이러한 양식의 변별적 정리가 각 양식의 특질을 고려한 작품의 창작과 작품의 보다 정확한 수용과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각기 자신의 장르 안에서의 활동에 익숙해 있고, 타 장르에 대한 이해가 충분할 수 없는 노래패, 연극패, 춤패, 풍물패 등이 이러한 총체공연물로 함께 작품을 만들면서 서로 자신의 장르가 다른 장르에 종속되어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기 쉬운데, 이 글이 이들 총체공연물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이해를 통해 그러한 오해를 씻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필자는 노래판굿을 비롯한 대형집회적 총체공연물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보다 예술원론적인 진전을 위한 과제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되며, 이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적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글에서 누차 강조하였던 노래판굿의 본질 중의 하나인 집회적 성격은 사실 예술의 특질의 하나이면서 예술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되었므로 그것의 예술론적 논리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80년대 초 제기되었던 ‘마당극에서 마당굿으로’라는 역설적인 명제를 떠올리게 된다. 어찌 보면 그 글에서 구상처럼 혹은 이념형처럼 이야기되었던 마당굿과 가장 흡사한 모습이 80년대의 노래판굿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는데, 어쨌건 이 역설적 명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의 공연의 삶의 제반 맥락과 일단은 분리된 공연 자체로 완결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관중의 집단적 삶의 제 과정, 집회적 맥락 속의 한 부분으로 조화롭게 들어가 그 속에서 삶의 과정과 집회적 맥락을 완성시켜주는, 그런 의미에서 굿적이며 의식적(儀式的)인 특성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래판굿과 함께 되새겨볼 만하다. 실제로 노래판굿을 비롯한 대형집회적 총체공연물은 그 집회적 성격이라는 것이 단지 작품 외적인 특성으로 치부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품 내에 녹아있는 본질적 특성으로 작품 전체를 규정하고 작품의 감동은 이러한 집회적 성격, 즉 의식성과의 상호침투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작품의 전체의 꼴은 자체로 완결되는 소우주와 같은 것이 아니라, 자체의 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집회적 성격, 즉 작품 밖의 현실의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만 완결됨(작품과 작품 외적 상황의 단순한 조화로움이 아니라)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태까지 예술작품을 완결된 소우주로 여기는 기존의 예술론으로서는 이러한 작품들은 잘 해명되지 않는데, 이는 거꾸로 예술작품을 작품 외적 맥락과의 상호침투라는 시각으로도 논리화해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이와도 통하는 이야기이지만, 관중의 문제, 즉 수용자의 문제는 역시 논리화하기 힘든 문제 중의 하나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작품 외적 맥락과 작품 내적 구조를 연결하고 있는 고리가 바로 수용자라는 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수용자와 작품과의 관계만을 따로 떼어 보아도 그러하다. 본문에서 필자는 몽타쥬식 총체공연, 노래판굿, 역사맞이굿의 수용자가 각각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즉 수용자의 특성에 따라 작품 내적 원리가 다르게 나타나고, 또 각 양식의 다른 원리가 수용자의 다른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실제로 수용자는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각기 다르게 이해하고 느낄 뿐 아니라, 공연예술처럼 수용자와 창작자가 직접 만나는 경우에는 매우 빠르고, 다른 예술의 경우에는 느리다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궁극적으로 작품 자체를 변화시킨다. 이러한 수용자의 부분 역시 기존의 작품중심적 예술론에서는 잘 해명하지 못하는 부분 중의 하나이다. 역할과 작품과의 상호침투 또한 몽타쥬식 총체공연처럼 관중을 배제한 상태에서 작품은 자체로 완결되어 관중은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경우에는 비교적 그 이해가 쉬우나, 관중 집단의 자발적인 호흡의 개입을 전제로 하므로 그것과 함께 존재함으로써만 작품의 완결성이 보장되는 노래판굿이나, 아예 관중이 없이 모두가 참가자가 되어 행동하며 수용하는 역사재현맞이굿의 경우는 매우 어렵다. 수용자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상태에서 어떻게 작품을 수용하는가 등등의 것을 고려한 예술론의 출현이 아쉽다. 그래야만 같은 작품의 노래라도 함께 부를 때와 들을 때, 같은 대사라도 대사를 들을 때와 따라할 때에는 현저히 다른 질의 예술적 체험을 한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해명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고 : <민족극과 예술운동>, 이영미, 199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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