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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오광대

흐름
가산오광대는 경남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에서 전승되어 온 탈놀음으로 다른 탈놀음들이 1900년대 초에 전승이 중단되었던 것에 비해 1960년에 마지막으로 연행될 때까지 비교적 오랫동안 전승되었다. 그 후 1971년에 발굴 재현될 때까지 전승이 중단되었다가 1974년에 경남지방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1980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다시 지정되었다. 가산오광대는 일명 조창오광대(漕倉五廣大)라고도 하며, 진주오광대의 한 분파로 여겨지고 있다. 또 통영이나 고성의 탈놀음보다 고형(古形)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산오광대가 전승되고 있는 가산리는 진주에서 서남쪽으로 30리 정도 떨어진 해변에 위치한 마을로 1908년 동학혁명 때 폐지되기 전까지 의령, 함양, 남해, 사천, 하동, 진양 등 7개 군의 조곡(粗穀)을 모아두는 조창(漕創)이 있던 곳이다. 당시의 가산리는 300여 호가 거주하는 매우 큰 마을이었으며, 정기적으로 장이 서고 배가 조곡을 싣고 나갈 때면 마을에서 굿과 풍물놀이가 성행하는 부유한 곳이었기 때문에 지형적, 경제적 측면에서 오광대가 지속적으로 전승, 발전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마을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가산오광대는 약 2, 3백년의 전통을 가진 것이라고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문헌이나 기록은 없다. 그러나 가산리에 조선 말까지 조창이 있었고, 당시에는 가산오광대를 조창오광대라고 불렀으며 탈놀이 연행이 가능한 경제적 기반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는 점, 가산리에 한(韓)씨들이 정착한 지 11대 이상이 되었다는 점, 음력 정월 초하루에 모시는 천룡제(天龍祭) 직후에 시작하는 지신밟기가 대보름에 노는 탈놀음까지 연결되는 점 등은 이 탈놀이의 역사가 그리 짧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가산리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어느 봄에 바닷가에 궤짝이 하나 표류해 왔기에 보니 그 속에 탈과 문서(文書)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탈은 연년세세 궤에 모시고 놀이 때에만 썼으며 문서는 두루마리로 되었는데 길이가 약 한 발쯤 되었고 그 대사에 의하여 연희를 해오다가 6·25 전쟁 당시에 유실되었다고 한다. 또 탈은 1960년대 말까지 전해오다가 하나씩 없어졌다고 한다. 현재 가산오광대의 전승은 가산오광대 보존회가 맡고 있다.
내용
가산오광대는 마을의 안녕과 행운을 비는 일종의 동제의식으로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 밤 9시 경부터 자정까지 연행된다. 섣달 그믐날밤 자정 후에 지내는 동제인 천룡제 직후부터 지신밟기를 시작하여 보름날까지 계속되므로 이것이 탈놀음의 앞풀이 구실을 하는 셈이다. 이때 얻어지는 전곡(錢穀)은 탈놀이 경비로 사용한다. 이처럼 가산오광대는 그 절차상 마을 동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오방신장무가 남아있는 유일한 탈놀음이다. 또 사자무과장이 따로 없지만 사실은 영노과장과 합친 셈이다. 즉 영노과장의 대사는 다른 지역의 탈놀음들과 내용이 비슷하고 영노탈은 다른 지방의 사자탈이 그대로 영노역을 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노에게 양반이 잡혀 먹히는 장면까지는 영노과장의 내용이고 황제장군을 잡아먹은 영노가 포수에게 사살당하는 것은 통영오광대의 사자무과장과 내용이 동일하다. 문둥이 과장과 할미영감과장에 5명의 문둥이와 5명의 무당이 나오는 것 역시 다른 지역 탈놀이와 다른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투전불림 장타령이 나오는 것, 할미영감 과장에서 영감이 죽은 뒤 오구굿을 하는 것도 가산오광대에만 나타나는 특징이다.가산오광대는 대체적으로 진주오광대와 비슷하지만 할미영감 과장에 있어서는 중부지방 탈춤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영감의 재산분배 방법이 봉산·해주탈춤과 흡사하며 영감과 할미의 싸움에서 영감이 동티로 죽는 것은 해주탈춤과 비슷하다. 등장인물 가운데 마당쇠란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나 옹생원이 신장수로 되어 있는 것도 유사한 점이라 하겠다.가산오광대에서 사용하는 탈은 1) 중앙 황제장군, 2) 동방 청제장군, 3) 북방 흑제장군, 4) 서방 백제장군, 5) 남방 적제장군, 6) 영노, 7) 도문둥이, 8) 문둥이(4개), 9) 어딩이, 10) 큰양반(영감탈 겸용), 11) 작은양반(2개), 12) 말뚝이, 13) 소무, 14) 서울애기, 15) 노장, 16) 상좌, 17) 할미, 18) 마당쇠, 19) 옹생원(봉사와 겸용), 20) 봉사, 21) 큰무당, 22) 무당(4개 : 큰무당과 탈이나 의상이 비슷하다)이다. 그리고 포수, 모리꾼, 순검, 의원, 대잡이 등은 탈없이 등장한다. 탈놀이에서 사용되는 악기는 꽹과리, 징, 장구 등이고 굿거리장단에 맞춰 덧뵈기 춤을 춘다.
각 마당별 내용 및 등장인물
제1과장 : 오방신장무(五方神將舞)과장 황제장군(黃帝將軍)을 중심으로 오방신장이 나와 춤을 추며 논다. 이 과장은 고사(告祀)에 해당하는 의식무(儀式舞)이다. 제2과장 : 영노과장 영노가 춤을 추며 등장하여 ‘삐-삐-‘ 소리를 내며 놀이판을 돌아다닌다. 영노는 춤추고 있던 신장들을 차례로 물어 퇴장시키면 황제장군만 남는다. 영노가 황제장군을 잡아먹으려 하면 황제장군은 쫓기면서 영노가 즐겨서 잘 먹는 물건을 들먹이다가 드디어 잡혀 먹힌다. 이때 포수가 등장하여 영노에게 총을 겨눈다. 황제장군을 잡아먹은 영노는 포수와 대치하여 싸우다가 포수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제3과장 : 문둥이과장 문둥이의 비참한 생활상을 표현한 과장이다. 입, 코, 눈, 귀, 팔, 다리 등이 심히 상한 문둥병신 5명이 등장하여 장단에 맞춰 처량하게 병신춤을 한바탕 춘다. 도문둥이의 지휘에 따라 장타령도 하며 앉아서 이를 잡기도 한다. 이들은 부잣집 잔치에 와서 술을 많이 얻어 먹은 뒤 투전놀이를 시작한다. 투전불림을 하며 즐기다가 서로 속임수라면서 싸운다. 천연두를 앓고 있는 아들을 업은 어딩이가 투전판에 개평을 청하자 도문둥이가 차서 쓰러뜨린다. 어딩이는 화가 나서 순검에게 고발하면 순검이 와서 병신들을 꾸짖으니 용서를 빈다. 순검이 잘 타이르고 퇴장한다. 어딩이가 다시 개평을 청하자 도문둥이가 나무라며 때린다. 어딩이의 고발로 순검이 다시 와서 모두 포승하고 퇴장한다. 제4과장 : 양반과장 양반을 모독하는 말뚝이 재담을 연행하는 과장이다. 양반이 두 아들을 데리고 나와서 춤을 추는데 하인 말뚝이가 문안 드리고는 “생원님을 찾노라고 방방곡곡을 다니다가 미나리꽝 뒷골목 둘쨋집 돼지막 위에서 죽을 먹노라고 훌쩍훌쩍 합디다”라고 하여 상정양반을 돼지에 비유한다. 말뚝이는 다시 양반의 부인을 모욕한다. 또 외설스러운 말로 양반의 신분을 야유하면 양반은 이에 맞서 양반의 지체와 재주를 자랑하다가 함께 춤을 추며 퇴장한다. 제5과장 : 중과장 파계승이 등장하는 과장이다. 소무가 서울애기를 데리고 들어와서 춤을 추는데 상좌가 노장을 모시고 등장한다. 노장이 서울애기를 유혹하여 업고 달아난다. 말뚝이에게 잡혀 온 노장은 매를 맞고 양반에게 꾸지람을 들은 뒤에 음양타령을 부르며 굴갓, 염주, 죽장을 차례로 던지고 마지막으로 썼던 가면까지 벗고 여러 가지 단가를 부르며 속화(俗化)하는데, 경우에 따라서 소리꾼이 뛰어 들기도 한다. 이때 상좌가 관중들에게 노자(路資)를 얻는다. 제6과장 : 할미영감과장 영감, 할미, 서울애기의 애정적 삼각관계가 연행되는 과장이다. 할미가 궁둥이춤을 추면서 등장하면 마당쇠(할미의 아들)가 뒤따라 들어와서 외설스러운 대화를 주고 받는다. 할미가 물레질을 하는데 옹생원(봉사, 신장수)이 와서 외상값을 청하며 할미를 희롱한다. 마당쇠가 옹생원이 준 돈으로 과자를 사먹고 배앓이를 하니 의원이 와서 침을 놔서 고친다. 영감이 서울애기를 데리고 들어와서 마당쇠를 시켜 할미에게 인사시키는데 할미는 여러 번 거절하다가 마침내 서울애기를 용납한다. 옹생원이 또 신값을 받으러 온다. 영감이 재산을 분배하되 좋은 것은 모두 첩에게 주고자 하므로 할미가 반발한다. 영감이 홧김에 조상단지를 깨버리자 동티가 나서 까무라친다. 옹생원을 불러다가 괘(卦)를 빼고 독경을 하였으나 효험이 없어 5무당이 나와 오구굿을 한다. 파지굿 뒤풀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모든 배역이 나와 관객들과 어울려 함께 춤춘다.
전승자 정보
가산오광대는 1960년까지 탈놀이가 전승되었기 때문에 역할 별로 전승 계보를 확인하기가 용이한 편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당시에는 한계홍(옹생원, 가면제작, 악사), 김오복(양반, 오방신장), 한윤영(말뚝이, 할미, 가면제작), 한주영(노장중, 꽹쇠) 등이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았으며, 한종기를 거쳐 현재는 한우성, 한우은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한윤영(韓允榮) 가산리 출생으로 1921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전승되어 온 가산오광대를 가까이 하여 19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익히기 시작하였다. 1979년 제1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은 뒤 이듬해인 198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3호 가산오광대 말뚝이로 예능보유자 지정을 받았다. 한윤영은 문화재 지정 당시 함께 보유자 지정을 받은 한계홍, 김오복과 함께 가산오광대 보존회를 조직하고 40여 명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가산오광대 놀이의 계승과 보급에 앞장섰다. 이러한 노력으로 오광대 가운데 비교적 옛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한종기(韓琮基) 1930년 가산리 출생으로 1972년부터 2001년에 사망할 때까지 28년 동안 가산오광대 원양반과 황제장군 역할을 맡아 활동하였다. 1991년 가산오광대 이수자로 선정되었고, 2000년 7월에 기능보유자 지정을 받았다. 1982년부터 2000년까지 가산오광대 보존회장을 역임하면서 전수를 위해 힘썼다. 특히 1985년에 가신오광대 전수회관을 개관하여 전수생 양성에 힘쓰는 등 기능보존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다.
연계정보
· 재구성 <무형문화재지정보고서 제134호 가산오광대>, 강용권,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6집(129~143), 문화재관리국 편저, 한국인문과학원, 1998 <한국예술사전(연극/무용/영화 편)>, 대한민국예술원, 1985 <한국전통연희의 이해와 실제 Ⅰ>, 유영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1998
관련도서
<무형문화재지정보고서 제134호 가산오광대>, 강용권,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 6집 : 129~143, 문화재관리국 편저, 한국인문과학원, 1998 <한국예술사전(연극/무용/영화 편)>, 대한민국예술원, 1985 <한국전통연희의 이해와 실제 Ⅰ>, 유영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1998
용어해설
오광대 : 오광대놀이는 조선 중기 합천의 초계 밤마리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에 이곳에서 홍수가 났는데 상자 하나가 떠내려 와서 건져 열어보니 다섯 개의 탈과 광대의 옷이 나와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가지고 탈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주로 서쪽 지역의 의령, 진주, 산청, 창원, 고성, 통영, 김해, 거제 등지에서 분포되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통영과 고성, 가산오광대만이 전승되고 있다. 대개 음력 정월 보름 무렵에 연행되며, 재담 ·춤 ·탈 ·의상(衣裳) ·반주음악 등에 이르기까지 향토색이 짙다. 덧뵈기춤은 오광대 특유의 춤으로 꼽힌다. 또 문둥탈의 병신춤과 사자춤이 가장 볼 만한 대목으로 여겨진다. 동제(洞祭) : 마을의 조상신이나 수호신에게 마을 사람들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말한다. 당산제, 동신제(洞神祭), 대동치성(大洞致誠), 산제(山祭)라고도 한다. 대개 마을 입구에 있는 제단이나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사당에서 지내며, 제단은 미리 청결하게 닦고 주변에 황토를 깔아놓고 솔가지를 끼운 금줄을 쳐 잡인의 출입을 막는다. 제주(祭主)는 마을사람 중에서 연로하고 상기(喪期)에 있지 않은 사람으로 한다. 제주는 1주일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육류를 먹지 않으며 상인(喪人)이나 병자를 만나지 않는다. 제사가 끝나면 일종의 오락 행사인 굿을 하면서 제사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는다. 동제에는 마을사람 가운데서 선출된 제관이 모든 행사를 주관하고 무당을 전혀 참여시키지 않는 유형과 마을사람 중에서 뽑힌 제관이 주관자 노릇을 하지만 모든 진행을 무당에게 맡기는 경우가 있다. 후자의 경우를 특히 별신굿·당굿·도당굿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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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동탈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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