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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개요정보

작품/자료명
대학로 개요정보
장르구분
대학로 문화지구
대학로의 어제와 오늘
대학로라는 지명은 1975년까지 이곳에 자리잡고 있던 서울대학교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울대학교의 모든 단과대학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의과대학, 문리과대학, 법과대학이 이곳 연건동, 동숭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1908년 대한제국 탁지부 건축소가 서양식으로 대한의원과 공업전습소 건물을 세우면서 기존의 전통적 공간과는 이질적인 근대적 경관이 이 일대에 형성되었다. 1926년에는 이곳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사가 준공되고, 1927년에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대한의원 뒷편으로 자리잡으면서 대학문화에 토대한 독특한 문화공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마로니에공원이라는 이름을 있게 한 마로니에 나무는 당시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우에노가 지중해에서 직접 가져다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대학로라는 공간의 형성이 일제 시대에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대학로의 독특한 아우라가 형성된 것은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생들의 문화와 관련이 깊다. 그중 상징적인 공간이 ‘세느강’과 ‘미라보 다리’, 그리고 ‘학림다방’이었다. 현재는 복개되어 대학로 도로 아래로 사라져 버렸지만, 청계천의 지류로서 문리과 대학 정문 앞을 가로질러 흐르던 대학천과 그 위에 놓인 다리를, 당시 서울대 학생들은 프랑스의 서정 시인 아폴리네르의 시 구절을 인용하여 ‘세느강’과 ‘미라보 다리’라는 이국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이름으로 불렀다. 1956년에 개점해서 현재까지도 굳건히 제자리에서 대학로를 지키고 있는 ‘학림다방’은, 서울대 문리과 대학생들에게 제25강의실이라 불릴 정도로 사랑받는 문화공간이었다. 또한 오늘날 홍대앞 문화공간이 홍대생만의 공간이 아니듯, 이곳 역시 서울대생만이 아닌 1960∼1970년대 젊은이들의 문화공간으로서, 수많은 예비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자신들의 재능과 열정을 배출하고 공유하던 단골 장소였다. 학림다방을 드나들던 사람들로는 천상병, 전혜린, 김승옥, 박태순, 김지하, 김민기, 유홍준, 장선우, 이애주 등이 있었다. 현재의 대학로를 중심으로 북서편에는 성균관대학교가 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에 성균관이 있었던 곳이고 그 왼쪽에는 창경궁, 창덕궁, 종묘가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의 혜화역이라는 이름을 있게 한 혜화문(惠化門)은 서울의 성곽 문 중에서 동소문(東小門)에 해당하는 문이었다. 동대문(東大門)과 동소문(東小門) 사이에 있던 산이 낙산(駱山)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지만, 다른 세 개의 산인, 남산, 인왕산, 북악산에 비해 규모가 작고 낮다. 2002년 서울시는 동대문에서 혜화문까지 연결되는 성곽을 복원하고 성곽을 따라 산책로와 역사탐방로를 조성한 낙산공원을 개장하였는데, 현대 도심 속의 전통 공간이 내뿜는 독특한 정취로 인해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현재 이 대학로와 서울대학교와의 끈은 대학로 서편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연건캠퍼스와 서울대학병원, 그리고 이화 로터리 부근에 있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초등학교와 부속 여자중학교뿐이다. 이 부속학교의 교문은 상당히 오래된 4개의 돌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본래 탑골공원에 있던 돌기둥을 1969년 3·1절 50주년 기념으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문으로 기증하였다가 서울대학교의 이전으로 부속학교 교문으로 남게 된 것이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이전하고 난 빈 자리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부지 일부만 빼고 나머지는 주택공사가 인수해서 택지를 만들어 일반에 분양했다. 처음 서울시의 계획은 이 일대를 고급주택지구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경제개발 우선 정책 속에서 미처 확보되지 못했던 문화공간을 조성하자는, 건축가 김수근을 비롯한 일부 문화적 소양을 갖춘 사람들의 뜻이 받아들여졌다. 이 시기는 경제발전에 대한 자부심을 도시공간 상에 가시화할 필요성과 여유를 서울시가 의식하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1976년 옛 서울대학교 본부 건물에 문예진흥원이 들어온 것을 필두로, 문리대 정원으로 쓰이던 공간이 마로니에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여기에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로 만들어진 빨간 벽돌의 미술회관, 문예회관, 샘터사 사옥이 마로니에공원을 둘러싸면서 문화공간다운 문화공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또한 1985년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되면서 혜화역이 들어서자 신촌 지역에 있던 소극장들이 보다 임대료가 싸면서도 쾌적한 조건을 갖춘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 이때부터 지금과 같은 연극공연의 메카, 대학로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이 일대가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젊음이들의 문화 및 소비 공간으로 뚜렷하게 각인된 것은, 1986년 문화예술의 거리로 지정되면서부터이고, 이와 함께 1989년까지 이곳은 주말마다 ‘차 없는 거리’가 되었다. 대학로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었던 신촌의 대학가 문화와는 달리, 서울대학교의 이전으로 사대문 안에 생긴 금싸라기 같은 빈 땅을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조성해보려는 서울시의 야심찬 기획의 결과였던 것이다. 이 기획 덕택에 이곳은 다른 곳과 달리 우리의 시야를 압도하는 높은 빌딩도 들어설 수 없고, 마로니에공원 같은 공공 공간이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대학로와 쌍벽을 이루는 젊은이들의 문화공간인 신촌에도 다양한 문화집단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 많지만, 마로니에 같은 개방적인 노천극장은 없다. 현재 대학로를 대학로답게 하며, 여느 흔한 소비향락 공간과 다르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개방공간이자 공공 공간인 마로니에공원이다. 그러나 대학로의 높은 유동인구를 노린 상업자본에 의해 대학로 일대의 임대료가 높아지면서, 대학로를 문화공간답게 했던 소극장이나 화랑이 밀려나고, 그 자리에 먹고 마시는 소비업종이 들어차면서 대학로의 미래를 걱정하는 소리들이 많다. 하지만 대학로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젊음과 자유와 예술의 아우라를 지키고자 하는 이 시대의 수많은 문화 교양인들의 염원이 꺼지지 않는 한 대학로는 영원히 대학로로서의 젊은 패기와 도전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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