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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순수시

작품명
이 시대의 순수시
저자
오규원(吳圭原)
구분
1970년대
저자
오규원(吳圭原, 1941~) 본명은 오규옥(吳圭沃). 1941년 12월 29일 경남 밀양 출생. 부산사범학교, 동아대 법과를 졸업했다. 문장사 대표를 지냈으며, 현재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68년 <현대문학>에 <우계(雨季)의 시>, <몇 개의 현상> 등으로 추천 완료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시집 및 시선집으로 <분명한 사건>(1971), <순례>(1973), <사랑의 기교>(1975),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1981), <희망 만들며 살기>(1985), <하늘 아래의 생(生)>(1989),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1995), <순례>(1997),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1999) 등이 있다. 한편 시론집 <현실과 극기>(1982), <언어와 삶>(1983) 및 시창작론집 <현대시작법>(1990)을 출간했다. 현대문학상과 연암문학상을 수상했다. 오규원은 초기 시에서는 이른바 해사적(解辭的) 기법과 기지에 찬 언어 구사를 통해 독특한 내면 공간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이후 기존 형식의 파괴에 더욱 힘써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타락상과 허구성을 방법론적으로 비판하였다. ‘현대성의 무의식’이라 할 수 있는 일상성의 세계를 아이러니 정신과 패러디 수법으로 비춤으로써 산업사회의 세속적이고 속악한 소시민적 삶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비판하였다. 그가 스스로 ‘인용적 묘사’라고 명명한 기법에 바탕을 둔 이른바 광고시는 대표적인 예이다.
리뷰
오규원의 시집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를 읽으면 최근에 쉬워지고 있는 한국시의 한 경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난삽한 단어나 이미지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오규원의 시들은 상당히 경쾌한 리듬에 의존하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언어와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오규원의 시를 읽으면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장면들이 쉽게 우리의 눈 앞에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들을 읽고 난 다음에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일상 속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혹은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삶의 모습 뒤에 감추어진 것이다. 이것은 시의 언어가 쉬워졌다고 해서 시 자체가 쉬워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중요한 예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오규원의 시들이 가지고 있는 평이한 외양은 어디까지나 외양일 뿐 시인의 시적 조작을 거친 언어의 깊은 뒤틀림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뒤틀림은 여기에서 사용된 ‘조작’이라는 어휘로 인해서 자칫하면 ‘꾸밈’으로 오인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일상적 언어가 시적인 질서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데서 겪는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흔히 쉬운 시가 ‘있는 그대로의’ 언어의 사용이라고 생각하는 오해는 여기에서 유래하고 있다. 그러나 오규원의 시는 일상적 언어를 사용한다기보다는 일상적인 언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실제로 시를 창조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에 새로운 질서감을 부여함으로써 일상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벗어나서 새로운 의미를 태어나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시란 엄격한 의미에서 창조된 것이라기보다는 언어의 뒤틀림을 통한 새로운 질서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시인의 절망이 시인의 노력을 포기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시인 자신이 자신의 무력한 언어와의 절망적인 싸움을 계속하는 데서 얻어진 것이다. 이 시인의 싸움이 절망적인 것은 일상적인 언어 자체에 아무런 견고성이 없는 것을 아는 데서 연유할 뿐만 아니라 그 견고하지 않은 언어로 된 현실을 ‘안녕’의 표본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 데서도 연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규원은 ‘門’이라든가 ‘시계’라든가 ‘창문이라든가 하는 수많은 일상적 사물들을 뒤틀리게 하고 있으며, 동시에 ‘진리란, 하고 누가 점잖게 말한다/ 믿음이란, 하고 또 누가 점잖게 말한다/ 진리가, 믿음이 그렇게 점잖게 말해질 수 있다면/ 아, 나는 하품을 하겠다’고 극단적인 비꼼을 말하면서 ‘우리 시대의 純粹詩’를 쓰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서 순수시는 순진한 ‘아이들이 눈’과 ‘놀이’가 불길한 것처럼 불온한 것이다. 왜냐하면 순수시는 절대적인 시로서 다른 것은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시가 읽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심각성을 느끼게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경쾌한 이미지와, 동어반복에 유사한 속도감 있는 리듬 때문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시인 자신이 의식이 패배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고도의 詩的 조작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규원의 시를 읽고 난 다음에 돌아보게 되는 현실은 희극 속에 내재하고 있는 비극성을 짙게 풍기고 있다. 그것은 말을 다루는 시인의 의식이 말을 떠나서 혹은 말의 탐구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오규원의 시적 정신의 높이를 말해 준다.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힘은, 읽을 때 우리를 즐겁게 하면서도 나중에 고통을 느끼게 만드는, 완만한 감동에 있는 것 같다. (……) 밤 사이, 그래 대문들도 안녕하구나 도로도,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차의 바퀴도, 차 안의 의자도 光化門도 덕수궁도 안녕하구나 어째서 그러나 안녕한 것이 이토록 나의 눈에는 생소하냐 어째서 안녕한 것이 이다지도 나의 눈에는 우스꽝스런 풍경이냐 文化史的으로 본다면 안녕과 안녕 사이로 흐르는 저것은 保守主義의 징그러운 미소인데 안녕한 벽, 안녕한 뜰, 안녕한 문짝 그것 말고도 안녕한 창문, 안녕한 창문 사이로 언뜻 보여 주고 가는 안녕한 性戱…… 어째서 이토록 다들 안녕한 것이 나에게는 생소하냐 - <우리 시대의 純粹詩> 오규원의 시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아이러니는 두고두고 음미해 볼 만하다. ‘경쾌함 속의 완만함’, 김치수,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문학과지성사, 1981오규원의 작품 <개봉동과 장미>는 그의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에 수록돼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을 대하면서 우리는 먼저 <개봉동과 장미>라는 작품이 제목 앞의 대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듯이 이 작품에서 대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작품의 제목 <개봉동과 장미>는 우리들을 방임상태 속에서 시의 본문으로 들어가게끔 놓아두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시의 제목 <개봉동과 장미>에서 개봉동과 장미는 서로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두 존재를 한자리에 공존시킴으로써 양자 사이의 내적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따라서 작품의 제목이 주는 그 내적 긴장감의 덫에 걸려서 우리들은 작품 읽기의 시작에서부터 그 앞에 머무르며 긴장감의 해소를 위하여 노력하지 않을 수가 없다. (……) <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는 그의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에 수록돼 있다. 소비문화 속의 도시문명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앞장 서서 깊은 관심을 가져온 오규원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슬그머니 우리에게도 주식처럼 되어버린 우유(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를 보고 그로부터 상상되는 그의 여러 가지 상념들을 파격적인 시 형식 속에 담아놓은 작품이다. 우선 그는 ‘양쪽 모서리를/ 함께 눌러 주세요’라는 우유 패키지 위의 문구를 보면서 극좌와 극우라는 상반된 이데올로기의 대립장을 떠올린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이 시대 속의 수많은 인간들에게, 특히나 남북분단으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좌우익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얼마나 커다란 폭력적 실체였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선상에서 이 시인은 따르는 곳으로 ‘극좌와 극우의 흰/ 고름이 쭈르르 쏟아진다’고 부정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아마도 극좌와 극우가 대립하는 가운데서 쏟아지는 우유란 필히 ‘흰 고름’과 같은 것일 거라고 그는 생각하였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 시인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우유는 그 이름이 ‘빙그레’이다. 시인은 그 이름을 받아서 ‘빙그레!’라고 되뇌어보지만, 진정 그는 ‘빙그레!’ 웃을 수도 없고, 세상이 ‘빙그레!’ 웃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 대신 이 시인의 상상 속에는 ‘오월의 라일락’이 떠오른다. 물론 ‘오월의 라일락’은 문자 그대로 오월에 피는 라일락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5·16, 5·17, 5·18로 이어지는 이 땅의 역사가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한 ‘오월의 라일락’은 자연스럽게 어두운 역사적 함의를 지닌 것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빙그레 우유’가 말하는 것처럼 ‘빙그레’ 웃으며 우유를 마실 수도 없고, 또한 그렇게 웃으며 세계를 이야기할 수도 없다. 이 시인은 계속하여 상품 광고의 꼭두각시가 된 현대인처럼 우유곽 위의 문안을 따라 그 문안을 따라 그 문안이 시키는 대로 따라간다. 그러나 그가 우유곽 위의 문안을 따라가면서 상상하는 세계는 그 문안이 말해주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럼으로써 이미 그 상품적인 우유곽의 외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우유곽을 통하여 상상하고 생각해 낸 이 시인의 다양하고 진지한 세계만이 이 작품의 근저를 이룬다.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는 최근 시집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에 들어 있다. 도시문제에 계속 관심을 가져온 시인답게 그는 이 작품을 통하여 도시의 모든 것들을 우리 앞에 낱낱이 고해성사하듯 펼쳐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작품에서 시인은 말하기의 방식보다 보여주기의 방식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가 이 작품을 통하여 보여준 수많은 것들을 통하여 우리는 도시를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규정짓기보다 버라이어티쇼 장 같은 그 다면적 얼굴을 그저 담담하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괴물과 같은 도시 앞에서 더 이상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그냥 잡다한 세계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한 시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말 대신에 보여주는 공장·도시·운명·공해의 표상들’, 정효구, <한국대표시인선 50>, 중앙일보사, 1995
작가의 말
벽은 숨을 쉬려고 하는 게 아니라 굳어지려고 하는 생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벽은 언제나 주검의 냄새가 난다. 길을 가다가 보면 길과 발이 서로 배가 맞아 저희들끼리 잘도 갈 때가 있다. 이럴 때, 저희들의 몸뚱이를 완전히 잊어 버리는 게 근사한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신념과 신명의 갈림길-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느님, 아니면 아무라도 좋으니, 공자, 맹자, 노자여, 우리를 어여삐 여겨 무지하고 무죄한 저희들에게 이 표지판 하나만이라도 허락하소서. 말을 사랑하는 사람은 말을 사랑하지 않고 말과 말의 사이에 있는 골짜기를 사랑한다. 사랑은 그 골짜기가 높고 험할수록 깊다. 말을 사랑하는 사람과 말에 미친 사람의 차이는 골짜기의 끝을 얼마나 알려고 하느냐에 있다. - 이 시집을 내면서 이렇게 시대·삶·길·말을 생각해본다. 4부의 작품은 먼저 시집을 내면서 빠뜨렸던 것들을 좀 손보아 넣은 것이다. ‘자서’, 오규원,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문학과지성사, 1981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오규원 시의 현대성>, 이연승, 푸른사상사, 2004 <오규원 깊이 읽기>, 이광호 편, 문학과지성사, 2002 <돌멩이와 장미,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말들>, 문혜원, 하늘연못, 2001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정끝별, 하늘연못, 1999 <한국대표시인선 50>, 중앙일보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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