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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절

작품명
동절
저자
이찬(李燦)
구분
1940년대
저자
이찬(李燦, 1910~1974) 호는 무종(務鍾). 1910년 1월 15일 함남 북청 출생. 연희전문, 일본릿교대학(立敎大學)을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노문과를 중퇴하였다. 1931년에는 동지사를 결성하여 카프에 가담하였다. 1928년 <신시단>에 <봄은 간다>, <잃어진 화원>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기의 시적 경향은 <가구야 말려느냐>, <사과>, <불안>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이 목적의식을 지닌 정치성과 불안의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한때 카프의 중앙위원을 지내기도 한 그는 ‘우리동무’ 사건으로 피검되기도 하였다. 1937년 이후 북청, 혜산진 국경지대를 전전하며 창작활동에 전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집 <대망>(1937), <분향>(1938), <망양>(1940) 등을 발간하였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 시부위원회에 소속되었고, 평양을 중심으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 결성되자 서기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는 사회주의혁명을 찬양하고 당의 과업을 선전하는 정치적 목적의식이 강한 시를 썼다. 북한에서 예총 서기장, 조선문화협회 서기장, 문화선전성 문화부국장을 역임했다. 1974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뷰
(……) 흘러간 1930년대는 과연 어떠한 시대였던가? 일제의 식민 통치 체제가 강화된 파시즘적 억압 질서로 접어들면서 일제의 폭압 정치는 식민지 구성원의 삶을 집단적으로 파괴시켜갔다. 그리고 그 구성원의 팔십 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던 농민과 농촌의 해체, 붕괴 과정은 민족의 삶의 형태와 그 내용을 바꾸어버렸다. (……) 말 그대로 민족 말살, 경제 파탄의 위기 앞에서 민족문학의 위기 또한 극심한 것이었는데, 1930년대 후반의 민족문학은 식민지 상황의 장기화와 이념의 상실 등 현실적 고립감과 허무주의에 쌓여 그 내면적 허무를 형상화하는 체념의 세계로 빠져갔다. 이 위기의 시대에 시인 이찬은 고향 북청을 중심으로 국경과 변방 지역을 오가며 독특한 민족의 토착정서를 시집 <대망>(1937)과 <분향>(1938), <망양>(1940)을 통해 보여주었다. 흔히 북국 정서로 불리는 시적 정취를 우리는 일찍이 김소월과 백석, 혹은 이용악과 김동환의 시에서 찾을 수 있다. 이찬은 이들의 시와 일정한 정서를 교환하면서도 변방의 비극적 실체에 적극적으로 다가감으로써 식민지 시대 삶의 구석과 그늘진 곳을 한 폭의 스크린처럼 보여주는, 가히 생생한 리얼리즘의 성취라 할만한 시편들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그의 시적 형상에서 그의 정신이 늘 토착민의 생활과 함께 한 이유에서부터 민족의 시대적 상황을 아우르는 역사적인 인식으로까지 발전해간 모습을 알 수 있다. 특히 그의 시는 슬픔과 고난의 모습이 각색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모습으로 드러나 있어 북방의 거친 바람과 함께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형상화된 미학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찬의 시는 그렇게 민족의 모습과 함께 하면서 식민지 민중의 변방 생활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어, 그것 자체로 일제와의 분리를 이루고 있는 민족시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 - ‘해설 : 우리 시의 변방 체험과 북국 정서’, 이동순·박승희, <이찬시전집>, 소명출판, 2003 (……) 이찬은 바로 이들 신인들(이용악, 오장환, 안용만 등)이 활동을 시작하던 때 과거 카프 시인으로서는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임으로써 임화, 윤곤강 등과 함께 자신들의 과거활동과 이들 신인들의 시세계를 연결시키는 문학사적 역할을 감당한다. 그의 시집 <분향>과 임화의 <현해탄> 그리고 윤곤강의 <대지>, <만가> 등은 30년대의 시문학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닌다. 이들의 시는 이때의 절망적인 상황을 자신들의 비관주의적 감상과 자기 비판 또는 항거정신을 통해 표출하고 있다. 이찬은 특히 이들 가운데 가장 짙은 절망감을 보여주었는데, 그의 퇴폐적 경향의 시들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생활고 속에서 솟아나오게 될 때 거의 허무주의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찬의 시들은 자신의 삶이 지니는 깊은 고통을 통해서야 비로소 비관적 낭만주의의 시적 형상들을 획득한다는 의미에서 다른 어느 시인보다 현실적인 삶의 진정성에 연결되어 있다. (……) 이찬의 동경유학은 아마도 1929년쯤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여러 가지 문헌을 통해 추정해 볼 때 그는 1929년에서 1930년 사이에 일본의 와세다대학 문과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본격적인 문단활동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는 그의 글 곳곳에서 임화와의 친분을 암시하는데 임화가 29년 무렵에 이미 <무산자>를 중심으로 김남천, 안막 등과 함께 활동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동지사> 가입이 대개 어떤 맥락에 놓여져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 그가 북청에 돌아간 이후 여전히 지속하고 있는 시에 대한 열정은 과거 목적의식을 강하게 드러내었던 시들에 대한 자기 반성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박세영에 의하면 이찬은 (……) 편지를 부쳐왔는데 거기에는 “과거의 우리들의 시는 막대기였고 리듬이 없는 시였다”는 반성적 내용이 들어가 있다. 박세영은 이후 이찬의 시가 창작에 있어서 새 경지를 찾아 ‘센티멘털리즘’의 주류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 대표적인 예로 이찬이 출소 후에 쓴 <북만으로 간 월회>와 <면회>를 꼽고 있다. 이찬의 이러한 면모를 보여주는 최초의 시들은 35년에 씌어진 <녹음방초!>, <양춘>, <북관천리>, <동무의 회상>, <독소>, <월야>, <귀향> 등이다. 이들 시는 대체로 깊은 애수를 담고 있다. 3년간의 감옥생활은 그의 혁명적 신념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는데 그는 이러한 황폐한 현실 속에서 목적의식을 잃어버리고 고독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의 시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인공들은 이제 파란만장한 생을 살아온 자기 자신이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친구나 애인, 그리고 가족(특히 그의 처와 모친) 등이다. 이들은 운동이 후퇴한 상황에서 좌절한 채 무력하게 남아 있거나 자신의 감옥생활 때문에 또는 현실 자체의 궁핍화로 인하여 더욱 몰락한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찬은 3년 만에 엄청난 변화를 겪은 자신의 이러한 환경을 자신이 감옥 속에서 키워왔던 그리움과 고독 그리고 깊은 비애의 감정과 결합시킨다. 그의 센티멘털리즘은 이렇게 자신의 변화된 환경과 핍박받았던 자기 자신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북관철니>, <녹음방초>, <양춘> 등의 시는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감회와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가득하다. 이 중에서도 <양춘>은 자신의 열정적인 시절을 일에 시달리는 현재의 처지와 대비시키면서 떠올린다. <독소>와 <월야>에서는 자신의 아내와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생애에 직면해서 자신에게 다가드는 회한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서 봉건적인 인종적 삶을 발견하고 그것에 연민의 정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거의 파탄된 그녀와의 관계 때문에 갈등을 느끼는 감정을 그려낸다. 어머니의 삶은 더욱 큰 애수를 가져다 주는 파란만장한 우여곡절들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이러한 애수의 감정은 송계월과 연애하던 시절을 회상하는 <동무의 회상>에도 나타나는데 그의 시 <귀향>은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이들 모두에 대한 그리움이 어머니와 동반하는 귀향길에서 벅찬 감정으로 승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감격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뿌리깊은 애수가 잠겨 있는 것이다. <월야>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은 그것을 ‘도시 도시 풀니지 않는 큰악한 애수’로 표현하고 있다. (……) ‘이찬 론: 현실주의적 흐름과 비관적 낭만성’, 신범순, <문학사상>, 1989.3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이찬시전집>, 이찬, 소명출판, 2003 <해금작가작품론>, 박덕은, 새문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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