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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옹패설(櫟翁稗說)

문헌명
역옹패설(櫟翁稗說)
저자
이제현(李齊賢)
개요
1342년(충혜왕 복위3) 역옹 이제현(櫟翁 李齊賢)이 지은 목판본 4권 1책의 시화집(詩話集). 이 책의 책명을 ‘낙옹비설’로 읽는 것이 서문에 밝혀 둔 저자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늑옹패설’이라고 읽는 이도 있으나, 현재 ‘역옹패설’로 읽는 것이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체재는 전집·후집으로 나누어 각 집이 다시 1·2권으로 되어 있어, 모두 합하면 4권이 된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과 아울러 고려시대의 3대 비평문학서로 꼽힌다.
저자
이제현(李齊賢, 1287∼1367) 본관 경주(慶州). 자 중사(仲思). 호 익재(益齋)·역옹(櫟翁)·실재(實齋). 초명 지공(之公). 시호 문충(文忠).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했으며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 등을 지냈다. 1308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등용되고 제안부직강(齊安府直講)을 역임했다. 이듬해 사헌규정(司憲糾正), 1310년(충선왕 2) 선부산랑(選部散郞), 이듬해 전교시승(典校寺丞)·삼사판관(三司判官) 등을 거쳐 1312년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고 성균악정(成均樂正)·풍저창사(豊儲倉使)를 지냈다. 이듬해 내부부령(內府副令)·풍저감두곡을 거쳐 1314년 원나라에 가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琅) 등 한족(漢族) 출신 문인들과 접촉을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혔으며, 이 시기 세 번에 걸친 중국 내륙까지의 먼 여행을 통해 견문을 크게 넓혔다. 1316년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이 되고, 1320년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같은 해 충선왕이 모함으로 유배되자 원나라에 그 부당함을 밝혀 1323년 풀려나게 하였다. 이듬해 광정대부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使)에 승진, 1325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1336년 삼중대광영예문관사(三重大匡領藝文館事)에 오르고 1339년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하자 연경(燕京)에 가서 해명하고 돌아왔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원나라 사신이 왕을 잡아가자 사면을 요청했고, 이듬해 삼사판사(三司判事)에 복직,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으로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요청했고,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右政丞)·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가 되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이듬해 우정승에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후 사직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로 호종,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도입하여 유행시켰으며, 특히 문학부문에서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 또한, 사(詞)의 장르에서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櫟翁稗說)>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益齋集)>이라 한다.
내용과 특징
<역옹패설(櫟翁稗說)>은 이제현이 56세(忠惠王 3, 1342년)되던 해 은퇴하여 시문(詩文)·사록(史錄)에 걸친 각종의 고사(故事) 등을 만록체(漫錄體)로 엮은 것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역옹패설>은 초간본은 아니며, 1814(순조 4)년 후손들에 의하여 간행된 <익재난고(益齋亂藁)>에 수록된 것이다. 목판본 외에 1911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활자·양장본으로 출판된 바 있고, 1913년 일본 동경에서 영인되기도 하였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역옹패설>은 전2권, 후2권으로 나뉘어 있고 전집과 후집에 각각 간단한 자서(自序)가 있다. 전집 서에서는 책제목에 대한 해석을 하였고, 후집 서에서는 시문(詩文)에 관한 설화를 다룬 것을 밝히고 있다. 전집 2권에는 고려 왕실의 조종(祖宗) 세계(世系)부터 학사(學士)·대부(大夫)들의 언행 등 역사·인물일화(人物逸話)·골계(滑稽)가 실려 있다. 후집은 시화(詩話)인데, 제1권은 대체로 중국의 것을, 제2권은 고려의 시인 또는 그들의 시에 관한 것을 주로 다루었다. 이 책에 나타난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고려가 몽고, 즉 원나라로부터 치욕을 당한 것에 대해 반성하는 한 방법으로 부당한 사대주의에 저항하고 있다. 전집 권1에서 조정의 중신이 몽고어를 능숙히 구사할 줄 아는 역관 출신이라 해도 공식석상인 합좌소(合坐所)에서 역관의 통역도 없이 직접 몽고어로 원나라의 사신과 대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민족자존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던 그의 주체적 자세를 반영한 것이다. ② 전통성, 즉 민심의 기반이 없는 위조(僞朝)에서의 영화로운 생활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이 책에서 삼별초(三別抄)정권을 부정적 입장으로 보아 위조라고 생각한 것에 기인한 것으로 이제현은 정문감(鄭文鑑)이 삼별초정부에서 승선이 되어 국정을 맡게 되자, 위조에서의 부귀보다 죽음으로써 몸을 깨끗이 지키고자 하였던 행위를 마땅한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③ 무신정권의 전횡을 폭로하고 그 폐단을 고발하고 있다. 이제현은 오언절구와 시를 인용하여 주먹바람(拳風), 즉 무신의 완력이 의정부를 장악하는 공포정치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이제현은 예전에는 우리나라의 문물이 중국에 필적할 만큼 융성하였으나 근래에 산중에 가서 장구(章句)나 익히는 조충전각(雕蟲篆刻: 수식을 일삼는 것)의 무리가 많은 반면 경명행수(經明行修: 경전공부와 심신수련)를 하는 사람의 수요가 적게 된 이유를 바로 무신의 난에서 찾고 있다. 곧 학자들이 거의 다 무신의 난이 일어나자 생명의 보존을 위하여 깊은 산으로 찾아들어 중이 되는 이가 많았다. 그래서 문풍(文風)이 진작되는 시점에 오게 되어도 학생들이 글을 배울만한 스승이 없어 도피한 학자였던 중들을 찾아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지적은 무신집권기가 초래한 반문화적 폐해를 단적으로 밝히고 있는 예이다. ④ 이 책에는 고려 말기 문학론에 있어서 용사론(用事論)과 신의론(新意論)의 현황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이제현은 한유(韓愈)·이백(李白) 등의 당대(唐代) 시인들을 비롯한 유명한 중국 문인들의 시를 거론하기도 하고 정지상(鄭知常)을 비롯한 우리나라 시인들도 거의 망라해서 그들의 시에 대한 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배척이나 악평은 삼갔다. 용사에 있어서는 이치에 맞지 않는 단어의 사용은 권장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지명의 사용도 실제정황과 일치하지 못할 경우에는 호된 비판을 가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평태도는 시어의 현실성을 강조하였다는 측면에서 특기할 만한 것이다. <역옹패설>은 저자가 스스로 ‘박잡한 글로 열매 없는 피 같은 잡물’이라 말하였지만 실제 후대인들에게 작자 당대의 현실과 문학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남겨준 요긴한 책이다. 또한 <파한집>이나 <보한집>의 성격을 계승하였으면서도 그 외의 다양한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어 흥미롭다.
연계정보
-소악부(小樂府)
-보한집(補閑集)
-파한집(破閑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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