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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送人)

작품명
송인(送人)
저자
정지상(鄭知常)
장르
한시
작품소개
고려시대의 문신 정지상(鄭知常)이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칠언절구(七言絶句).
저자
정지상(鄭知常, ?∼1135) 고려 중기의 문신. 서경 출신. 초명은 지원(之元). 호는 남호(南湖). 1114년(예종 9) 과거에 급제하였다. 1127년(인종 5) 좌정언으로 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한 공을 믿고 발호하는 척준경(拓俊京)을 탄핵해 유배하도록 하였다. 1129년 좌사간으로 기거랑(起居郎) 윤언이(尹彦蓬) 등과 당시 정치의 득실을 논하는 소(疏)를 올리니 왕이 받아들였다. 음양비술(陰陽秘術)에도 관심이 많아 묘청(妙淸)·백수한(白壽翰) 등과 함께 삼성(三聖)으로 불렸다. 서경출신으로 서울을 서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해 김부식(金富軾)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사대적 성향이 강하던 개경 세력과 대립하였다. 서경을 거점으로 묘청 등이 난을 일으키자, 적극 가담해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며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하였으나 김부식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패해 개경에서 참살되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만이 아니라, 뛰어난 시인으로서 문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의 시재(詩才)는 이미 5세 때에 강 위에 뜬 해오라기를 보고 “어느 누가 흰 붓을 가지고 乙자를 강물에 썼는고(何人將白筆 乙字寫江波).”라는 시를 지었다는 일화가 야사로 전해올 만큼 뛰어났다. 1130년 지제고(知制誥)로 왕명에 따라 곽여(郭輿)를 위해 <산재기(山齋記)>를 짓기도 하였다. 고려 12시인 중의 하나로 꼽혔으며, 노장사상에 심취하였고, 역학(易學)·불교(佛敎)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림·글씨에도 능통했는데, 특히 사륙변려체를 잘 썼다고 한다. 작품으로는 <동문선>에 <신설(新雪)>·<향연치어(鄕宴致語)>가,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백률사(栢律寺)>·<서루(西樓)> 등이 전하며, <정사간집(鄭司諫集)>·<동국여지승람> 등에도 시 몇 수가 실려 있다.
원문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洞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국문풀이
비 개인 긴 둑에 풀빛이 짙은데 그대 보내는 남포에 슬픈 노래 절로 나네 대동강 물은 어느 때나 다할 것인가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여지네
해설
이별의 정한(情恨)을 노래한 시로 <동문선(東文選)>·<파한집(破閑集)>·<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등에 수록되어 전한다. 이별을 제재로 한 송별시 중 백미로 꼽히며, 당나라 왕유(王維)의 칠언절구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에 비견된다. 대동강가에서의 이별을 노래한 고려가요 <서경별곡(西京別曲)>과도 주제가 일치한다. 기승전결로 구성되었으며, 대조법과 도치법·과장법 등의 표현기교를 사용해 임과 이별하는 애달픈 정서를 애틋하게 노래하였다. 제1구와 제2구에서는 비온 뒤 대동강변의 싱그러운 풍경과 이별의 슬픔을 대비시켜 이별의 안타까움을 한층 더 고조시키고, 제3구에서 시상(詩想)을 반전하여 시의 묘미를 살리는 한편, 이별의 한을 대동강물에 비유해 표현의 극대화를 꾀하였다. 즉 비 온 뒤 대동강 물은 한층 더 유유히 흐르고 있거니와 해마다 이별하는 이들의 눈물은 쌓이고 쌓여서 강물이 마를 날이 없으리라는 뜻으로, 쉼 없이 흐르는 강물은 이별의 서글픈 정을 한없이 짙게 만든다. 신운(神韻)이 감돈다고 할 정도로 극찬을 받은 제4구는 해마다 보태지는 이별의 눈물로 대동강물이 마를 날이 없다고 노래하여 서정의 극치를 보인다. 이 작품에서 물의 이미지는 이별의 아픔으로 인해 흘리는 눈물을 의미하는 동시에, ‘눈물’의 이미지와 결합되어 한(恨)으로 충만된 이별의 정서를 고조시키고 있다. 이 시의 뛰어난 점은 풀빛 짙은 강둑에서 흘린 눈물을 대동강물의 이미지로 확장시켜 표현한 것에 있으며, 이별의 슬픔이라는 인간사를 자연에 대응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 이별의 눈물 때문에 대동강 물이 마르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만큼 이별의 슬픔이 깊은 것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별의 눈물로 인해 강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그 과장법이 과장을 넘어 슬픔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제4구의 ‘첨록파(添綠波)’는 원래 ‘첨작파(添作波)’였던 것을(破閑集에 의함) 뒷날 이제현(李齊賢)이 ‘첨(添)’과 ‘작(作)’은 그 뜻이 중복되는 것이라 하여, ‘작(作)’이 ‘녹(綠)’으로 고쳐진 것이다. 그러나 이 결구의 ‘별루연년첨록파(別淚年年添綠波)’는 명구로 알려져 있다. 이 시는 일찍이 대동강 부벽루에 걸려 이를 본 중국 사신들까지도 모두 극찬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시인 이인로(李仁老)는 <파한집>에서 이 작품을 극찬하였으며, 조선시대의 문신 김만중(金萬重) 역시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이 시를 왕유의 작품에 견주어 해동의 위성삼첩(渭城三疊)이라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허균 역시 <성수시화>에서, 연광정(練光亭)에 걸려 있는 많은 시들은 중국사신이 그곳을 지날 때 모두 철거되는데, 단, 이 시만은 걸어 두었다고 하여 이 시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말하고 있다.
연계정보
-동문선(東文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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