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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편(東明王篇)

작품명
동명왕편(東明王篇)
저자
이규보(李奎報)
장르
한시
작품소개
고려 후기에 이규보(李奎報)가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설화를 오언시체(五言詩體)로 엮은 장편 서사시. 오언 장편 282구의 장편 인물서사시로 약 4,000자에 이른다.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 제3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동명왕 탄생 이전의 계보를 밝힌 서장(序章)과 출생에서 건국에 이르는 본장(本章), 그리고 후계자인 유리왕의 경력과 작가의 느낌을 붙인 종장(終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
고려 후기의 문신·재상. 본관은 황려(黃驪: 지금의 경기도 여주). 초명은 인저(仁泗),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만년에는 시·거문고·술을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9세 때부터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기 시작했고, 문재가 뛰어났다. 14세 때 사학(私學)의 하나인 성명재(誠明齋)의 하과(夏課: 여름철에 절을 빌려 행한 과거시험준비를 위한 학습)에서 시를 빨리 지어 선배 문사로부터 기재(奇才)라 불렸다. 16세부터 4, 5년간 자유분방하게 지내며, 기성문인들인 강좌칠현(江左七賢)과 기맥이 상통해 그 시회(詩會)에 출입하기도 하였다. 1189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 이듬해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관직을 받지 못하자, 25세 때 개경의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가 시문을 지으며 세상을 관조하며 지냈다. 백운거사라는 호는 이 시기에 지은 것이다. 26세(1193, 명종 23)에 개경에 돌아와 빈궁에 몹시 시달리면서 수년 동안의 무관자(無官者)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한편 왕정(王廷)에서의 부패와 무능, 관리들의 방탕함과 민의 피폐, 10여 년 동안의 남부지방의 농민폭동 등은 그의 사회·국가의식을 크게 촉발시켰다. 이때 지은 것이 바로 <동명왕편(東明王篇)>·<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 등이다. 1197년(명종 27) 최충헌(崔忠獻) 정권의 요직자들에게 관직을 구하는 편지를 썼는데, 이 갈망은 32세 때 최충헌의 초청시회(招請詩會)에서 그를 국가적인 대공로자로서 칭송하는 시를 짓고 나서 비로소 이루어졌다. 1207년(희종 3)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 참군사(參軍事)·사재승(司宰丞)·우정언(右正言)을 거쳤는데 1219년(고종 6)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지방관의 죄를 묵인하여 계양도호부부사(桂陽都護府副使)로 좌천되었다. 1220년(고종 7) 예부낭중(禮部郞中)·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를 거쳐 1230년 위위시판사(衛尉寺判事)가 되었으나, 팔관회(八關會) 행사에 잘못을 저질러 한때 위도(蝟島)에 유배되었다. 1232년(고종 19) 비서성판사(書省判事)에 승진하고, 이듬해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정당문학(政堂文學)·참지정사(參知政事)·태자소부(太子少傅) 등을 거쳐 1237년(고종 24)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감수국사(監修國事)·태자대보(太子大保)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는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문한(文翰)의 관직자이며, 양심적이나 소심한 사람이었다. 학식은 풍부하였으나 작품들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나타낸 자기표현이 아니라 그때그때 의식에 떠오르는 바가 그대로 표출되는 양상을 보인다. 가문을 세우고 문명을 떨치고자 하는 명예심이 강하여 입신출세주의자이자 보신주의자일 수밖에 없었으며, 최씨정권하 일반 문한직 관리층의 한 전형이었다. 문집으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
내용
<동명왕편>의 서문에서 이규보는 “처음 동명왕의 설화를 귀신(鬼)과 환상(幻)으로 여겼다. 그러나 연구를 거듭한 결과 귀신이 아니라 신(神)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시로 쓰고 세상에 펴서 우리나라가 원래 성인의 나라임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고 저작동기를 밝히고 있다. 우선 <동명왕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해동의 해모수(解慕漱)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다. 고니를 탄 100여 인의 종자(從者)를 거느리고 하늘로부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채색 구름 속에 떠서 내려왔다. 성 북쪽에 청하(靑河)가 있고 거기에 하백(河伯)의 세 딸 유화(柳花)·훤화(萱花)·위화(葦花)가 있었다. 해모수가 사냥을 갔다가 이들 세 미녀를 만나서 그 중에 맏딸인 유화와 혼인하도록 해달라고 하백에게 간청하였다. 하백은 해모수의 신통력을 시험한 뒤에 그에게 신변(神變: 人智로 알 수 없는 무궁무진한 변화)이 있음을 알고 술을 권하였다. 하백은 해모수가 술이 취하자 유화와 함께 가죽가마에 넣어서 하늘로 보내려 하였다. 그런데 술이 깬 해모수는 놀라서 유화의 비녀로 가죽가마를 찢고 혼자 하늘로 올라가 돌아오지 않았다. 하백은 유화를 꾸짖으며 태백산 물 속에 버렸다. 유화는 고기잡이에게 발견되어 북부여의 금와왕(金蛙王)에 의하여 구출되었다. 유화는 뒤에 해모수와 관계하여 주몽(朱蒙)을 낳았다. 주몽은 처음에는 되 크기만한 알이었다. 금와왕은 상서롭지 않은 일이라 하여 마구간에 버렸다. 말들이 이것을 짓밟지 않아서 깊은 산 속에 버렸더니 짐승들이 이것을 보호하였다. 알에서 나온 주몽은 골격과 생김새가 영특하여 자라면서 재주가 뛰어났다. 뒷날에 부여를 떠나 남으로 가서 비류국(沸流國)의 송양왕(宋讓王)의 항복을 받고 나라를 세웠다. 이것이 고구려의 건국이다. 그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이다. 종장에는 동명성왕의 아들 유리(類利)가 부왕(父王) 동명왕을 찾아서 왕위를 계승한다. 참고적으로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朱蒙)에 관해서는 3가지 설이 있다. ① 광개토왕 비문(碑文)과 <위서(魏書)> <고구려전>에 의하면 주몽은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모친은 하백(河伯)의 딸이었다. 방안에서 이상한 햇빛을 받은 후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을 깨고 나온 것이 주몽이다. 그가 자라나서 천제의 명을 받고 전국을 순수(巡狩)하러 남하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부여 땅의 엄리수(奄利水)라는 큰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주몽은 나루터에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니 나를 위해 다리를 놓아 달라”고 하자, 거북들이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놓아주어 강을 건너 졸본(卒本)으로 남하하여 고구려를 건설하였다는 설화이다. ②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주몽은 북부여 사람으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왔는데,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는 부여왕이 주몽의 비범함을 알고 둘째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고, 뒤에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설화이다. ③ <삼국사기>의 <고구려기(高句麗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명왕편주(東明王篇註)> 등에 의하면 주몽의 어머니가 유화(柳花)이며 주몽이 알에서 나왔다는 점과 졸본에서 건국하였다는 내용은 ①의 기록과 같으나, 주몽의 어머니가 햇빛을 받기 전에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에게 유인되어 욕을 당하였다는 점과 유화를 방에 가둔 것이 동부여 금와왕(金蛙王)이라는 점, 그리고 주몽이 자란 곳과 죄를 지은 곳이 동부여였다는 기록이 있는 점이 다르다.
해설
<동명왕편>은 5언(五言) 282구로 된 영웅 서사시이다. 이규보가 26세 때(1193년) 고구려의 건국 신화인 주몽 신화를 노래한 것으로 체제를 보면 앞에 서문이 있고 본문 속에는 부분 부분 <구삼국사(舊三國史)>에 수록되어 있다는 <동명왕 본기(本記)>의 신화를 옮겨 놓고 있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중요하다. 이 작품은 주몽의 영웅적 행적과 위업을 찬미한 작품인 만큼 주몽 신화의 내용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서 그 갈등의 폭을 넓히고 주몽의 영웅적 포부·의지·지혜 등을 더욱 부각시켰다. <동명왕편>은 동명왕의 신이한 출생에서부터 북방대륙에서 한반도의 남단에 이르기까지 넓은 강토와 천상·해상이라는 삼계(三界)를 무대로 하여 영웅호걸들의 상호 갈등을 통하여 사건이 전개·발전되고 있다. 힘과 힘, 꾀와 꾀, 신통력의 대결을 통하여 부족사회적인 힘을 집결하여 고대국가의 건설이라는 역사적인 대업을 완수하는 사실이 작품을 통하여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당시 중화중심(中華中心)의 역사의식에서 탈피하여 <구삼국사(舊三國史)>에서 소재를 취하여 우리의 민족적 우월성 및 고려가 위대한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고려인의 자부심을 천추만대에 전하겠다는 의도에서 쓰인 것이다. 이규보의 국가관과 민족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외적에 대한 항거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즉 <동명왕편>은 북방민족과의 대결 속에서 주체적이며 진취적인 민족의식의 역사적 산물이라 하겠다.
연계정보
-그날, 새벽
-고구려의 불꽃-동명성왕
-주몽(朱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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