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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구(李軒求)

예술가명
이헌구(李軒求)
전공
평론
개요
이헌구의 비평활동은 일제하와 광복 후로 나눌 수 있는데, 민족의 자유·독립·자주를 기본 골간으로 하고 있다. 즉 일제하 평론에서 서구문학 소개에 치중하면서도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았고, 아울러 문학의 보편성에 대한 확신도 견지하고 있었다. 대표적 평론이라 할 수 있는 <조선문학은 어디로>는 일제에 의해 전면 삭제되었는데, 거기서 그는 문학인은 우선 “우리가 의식 못하는 동안에 나날이 없어지려는 운명에 있는 조선말을 가장 중요시해야 하며 작가 자신이 체험하는 무한정한 고민과 불안을 또는 그의 절망적 오열을 여실히 반영하는 문학”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1932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해외문학인의 임무와 장래>는 폐쇄적이고 국수적인 문학풍토를 비판, 조선문학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외국문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그는 이 글에서 해외문학파의 소명의식을 밝히고, 카프의 활동을 비판했다. 이후에도 마르크스주의자의 활동을 비판하면서 <행동정신의 탐조>, <앙리 바르뷔스의 일생>, <대전과 불란서문학> 등을 통해 파시즘에 대항하는 행동주의 문학의 일단을 소개하기도 했다. 한편 1931년부터 1939년 해산될 때까지 극예술연구회 책임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문학가협회 결성에 제하여>, <민족문학정신의 재인식>, <예술인의 현실적 태도> 등의 평론을 통해 좌익문학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문학노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 참고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생애
함북 명천에서 출생한 이헌구는 보성중학을 거쳐 일본 와세다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시절 김진섭, 이하윤, 정인섭 등과 함께 해외문학연구회 창립동인으로 참여, 서구문학을 한국에 소개했으며 함대훈, 이홍종 등과 함께 신흥문학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귀국 후 본격적인 비평활동을 시작했는데, 이후 1940년에 이르는 10년간 해외작가 소개를 비롯한 작가론에 치중했다. 1931년 극예술연구회 창립동인, 1936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활동했고, 일제 말기에는 침묵을 지키며 칩거했다. 광복 후 중앙문화협회, 전조선문필가협회 창립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주의 문학노선에 입각해 좌익계 프로문학 타파를 위한 반공자유문화를 강력히 제창했다. 민중일보 사장 겸 편집국장을 역임했으며, 1954년 문총 대표 최고위원, 1956년 자유문학자협회 부회장, 이화여대 교수 및 학장을 역임했다.
약력
1905년 함북 명천 출생 1916년 광진보통학교 졸업 1920년 중동학교 입학 1925년 와세다대학 제1고등학원 문과대학 입학 1926년 해외문학연구회 조직 1931년 일본 와세다대 불문과 졸업 / 극예술연구회 창립 / 경성보육학교 교원 1936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 창립회원 194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창립회원 1949년 공보처 차장 역임 1954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대표 최고위원 1956년 자유문학자협회 부회장 1970년 이화여자대학 교수 · 문리과대학 학장 역임
상훈
1973년 대한민국예술원상 평론집 <문화와 자유>(1953) <모색의 도정>(1965) 수필집 <미명을 가는 길손>(1973)
작가의 말
(……) 작가가 없이 문학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재론할 것도 없거니와 작가가 있으므로 해서 반드시 문학은 형성되고 발전되는 것이라고 단안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니, 우리가 내외 국문학사상에서 이따금 진공된 연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요, 또 우리의 일제 경험으로 해서라도 10년을 지내놓고 다시 그때를 냉정히 비판할 때 실로 군소작가만에 그치고 하나의 본격적 문학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으로도 용이하게 간취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문학 이전에 돌아가 당의 문학, 복무의 문학 등의 시대착오적 문학제창은 그것이 이념을 달리하는 별개의 문학행동이라고 해서 평론할 여지도 있거니와 그러지 아니한 문학만을 위한다는 작가층에서 너무나 안이한 문학관으로서 조숙 대가연하는 경향도 우리는 솔직히 지적할 수 있다. 우리는 조선문학의 세계적 수준을 위하여 노력 분투해야 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에 앞서서 우리는 문학이란 것이 그 어느 다른 예술보다도 한층 더 현실적이요, 사실적이요, 대중성을 띤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문학이 가지는 현실적 제약성과 시대적 생명감이라는 것을 더 깊이 절감하여야 할 일이다. (……) 역사는 변전되는 것이요, 따라서 인간의 활동은 새로운 국면을 지향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름지기 문학인은 자의식의 심화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공통될 세계의식-범아의식에로의 비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작품행동 이전에 치열하고도 가혹한 수련과 노력은 물론 이러한 시기에 향유하기 쉬운 안이한 문단적 출세와 같은 비양심적 사실이 용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그릇된 민주주의의 남용에서 기인하는 무질서와 방자 등으로 문학뿐 아니라 문단으로서의 독자적 미풍이 오손되는 등 소극적에 대한 기우만이 아닌 ‘진실’과 ‘겸허’가 요청됨이 오늘과 같이 절실한 때가 없다는 것도 이 혼란기에 있어서는 더 한층 강조되어야 할 일이다. (……)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오로지 필요한 것은 우리가 여하히 재생되고 우리 민족이 여하히 재건될 것인가라는 이 일점에만 총집결되어야 할 일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정치는 최대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민족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절대요, 절대의 명제다. 민족의 독립이 없는 곳에 문학이 있을 수 없다. (……) - ‘민족문학정신의 재인식’, 이헌구, <한국의 문학비평>, 민음사, 1995
평론
(……) 그의 문인적 삶은 해외문학파에서 시작되고 개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해외문학파라는 문학사적 사항은 이헌구의 문학적 궤적을 살펴보는 데 필수적이다. 와세다대학 시절, 김진섭, 이하윤, 정인섭 등과 더불어 조직하여 이헌구가 관여했던 해외문학연구회로부터 시작된 해외문학파는, 주지하다시피 1930년대 프로문학의 조직적, 이념적 퇴조와 더불어 문단의 새로운 활기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절실히 요청된다는 진단 아래 그에 대응했던 것으로 문학사적 위치를 매길 수 있다. 이헌구의 문화적·문학적 활동이 지닌 특징은 먼저 외국문학을 통한 조선문학의 개선을 의도했다는 점이다. 해외문학파 논쟁에서 외국문학의 소개라는 문제 제기가 번역을 둘러싼 문제점으로 협소화되는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이헌구의 경우 어디까지나 조선문학의 건설과 발전을 중심으로 외국문학의 조선적 수용을 주장했다. 이와 더불어 해외문학파의 위상이 순수문학의 온상으로 귀착되기는 했으나, 프로문학 진영과 맞서서 문학의 자율성과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데 있어서 이헌구는 문학과 사회의 필연적인 연관성에 대한 자각을 놓치지 않았다. (……) 이헌구는 <해외문학>을 창간하는 목적에 대하여 세 가지 항목을 꼽는다. 첫째는 일본에 의한 문학 사조의 간접적 수용으로 말미암은 아류의 수준을 벗어나기 위해 직접 외국어로 외국 문학을 접촉해야겠다는 의지이며, 둘째는 빈약한 조선 문단에 군소의 작품을 발표하기보다 문학적 토양을 비옥하게 하기 위해 먼저 조선어로 번역된 외국 작품을 제공할 필요이며, 셋째는 문학 건설을 위해서는 선진국 문학의 근본적 이해가 필요한데, 특히 어떤 한 가지의 경향이나 세력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 해방 직후 이헌구의 행적은 당시 좌우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민족문학 계열의 입장을 대변하고 좌익측의 문학과 정치의 일원론적인 시각에 대항하여 문학의 자유와 창작자의 개성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해방 직후의 문학 조직은 좌익측에 의해 상당히 발빠르게 결성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사회주의 문화 운동을 전면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단일 노선을 구축하는 일이 급선무였으므로, 그것을 명분으로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이기영, 송영, 한효 등이 주도하는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두 카프 계열의 조직을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 소천 이헌구는 1930년대 해외문학파 논쟁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근대 한국문학의 정립과 건설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국문학 전공자 제1세대로서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불문학을 수학하고 지속적으로 프로문학에 맞서서 문학의 자율성, 문학의 자유와 개성을 옹호했다. 그는 해외문학파 논쟁에서 해외문학파가 외국문학을 소개할 뿐 아니라 그것을 조선의 특수한 상황에 맞도록 수용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여 누구보다도 해외문학파의 역할에 자각적이었음을 보여주었으며, 또한 계몽운동의 중요성에 천착하여 대중성을 지닌 문학이어야 함을 역설했다. 또한 문학에서 ‘자유’와 ‘윤리성’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이는 조선의 문단적 상황에서 특히 요구되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진정한 문학적 자율성을 정립해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기본적 입장의 연장선에서 이헌구는 해방 직후 민족문학파와 해외문학파 중심의 문인들과 손을 잡고 조선문학협회를 발족시키고 <해방기념시집>의 발문을 쓰며 전조선문필가협회 창립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해방 직후 진정한 문학적 정신의 정립을 저해하는 좌익 문인들의 활동에 대하여 초지일관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한다. 그는 문학을 정치적 도구로 전락시키는 좌익에 대하여 항상 민족문학 건설을 위해서는 서구의 서사시 정신과 같은 문학 정신의 정립과 풍부한 문학적 소양을 구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좌파 문학을 비판하는 데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비난과 개념어의 남용과 같은 비논리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사실이다. (……) 조선적인 특수성을 고려한 외국문학 수용과 본격적인 문학 발전을 위한 문학 이념의 정립과 작가들의 발분에 노력을 기울인 것은 인정되지만, 결국 약소 민족의 역사가 문학 발전의 불리한 역사적 조건이었다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비성실성과 개별적인 태도의 문제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이헌구론: 민족문학의 정립을 위한 외국문학의 수용 문제’, 김경원, <한국현대비평가 연구>, 강, 1996
관련도서
<한국현대비평가 연구>, 김경원, 강, 1996 <한국의 문학비평>, 권영민 편, 민음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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