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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화성(朴花城)

예술가명
박화성(朴花城)
전공
소설
개요
박화성은 1930년대에 장편 <백화>, <북국의 여명>을 비롯하여 단편 <논 갈 때>, <홍수전후>, <한귀>, <중굿날>, <고향없는 사람들> 등 주목할 만한 작품을 많이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주로 빈궁을 소재로 하여 강렬한 이념과 사상성을 보여준 작품들이다. 당시 계급문학을 지향했던 카프와는 직접적인 상관없이 활동하면서도 동반자적 내지는 경향적인 소설 성향을 드러냈다. 1940년경 절필하고 목포로 낙향하였다가 해방 후 다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50년대 초까지는 <검정사포>, <광풍 속에서> 등 단편 위주였다가 1955년부터는 장편소설 창작에 주력했다. 박화성의 작품은 해방 전·후로 이분할 수 있으나, 그 바탕에 일관되게 현실고발적인 면이 유지된다. 특히 일제강점기 하에 발표된 소설들은 사회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와 빈, 지주와 소작인, 강자와 약자 등의 계급적 대립관계의 모순을 포착하여 궁핍의 원인을 해명해보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성급하고 도식적인 저항성을 표면에 드러내는 일 없이 섬세하면서도 박진감 있는 문장을 바탕으로 현실을 꿰뚫어보는 수작들을 산출했다. - 참고: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한국현대문학작은사전>, 가람기획편집부 편, 가람기획, 2000
생애
전남 목포에서 출생한 박화성은 숙명여고 졸업 후 1926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여자대학 영문과를 중퇴하였다. 1925년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발표된 <추석전야>가 등단작품이지만 본격적인 작품활동은 1932년 단편 <하수도공사>부터 시작되었다. 단편 <호박>을 <여성>지에 발표한 것을 끝으로 해방이 되기까지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항거하여 절필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한국문인협회이사,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여류문인회 초대회장,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문단활동을 하였으며, 1968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91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기념관인 소영 박화성 문학기념관이 목포에 세워졌고, 1992년부터는 한국문인협회 목포지부와 소영 박화성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주최로 소영 박화성 백일장을 개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약력
1904년 전남 목포 출생 1918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 천안공립보통학교 · 아산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 1921년 영광중학원 교사로 부임 1925년 춘원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단편 <추석전야>가 실려 등단 192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4학년으로 편입 · 졸업 1927년 조우회 동경지부 위원장 1930년 일본여자대학 영문학부 3년 수료 1932년 박세랑이란 필명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엿단지> 당선 1947년 조선문학가동맹 목포지부장 1961년 한국문인협회 창립 · 이사 선임 1962년 교육제도 심의위원 피촉 1963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피촉 1964년 가정법원 조정위원 위촉 / 오월문예상 심사위원에 위촉 / 한국여류문학인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69년 제1회 문화공보부 예술문화상 심사위원 위촉 1970년 서울시문화상 심사위원 위촉
상훈
1958년 목포시문화상 1961년 이화여자대학교 제정 문학선구공로상 1966년 한국문학상 - <증언> 1970년 대한민국예술원문화상 1974년 은관문화훈장 1984년 3·1문화상 단편소설집 <고향없는 사람들>(1947) <홍수전후>(1948) <잔영>(1968) <휴화산>(1977) 장편소설집 <백화>(1932) <고개를 넘으면>(1956) <사랑>(1958) <열매 익을 때까지>(1965) <창공에 그리다>(1965) <내일의 태양>(1972) <이브의 후예>(1979) 수필집 <추억의 파문>(1969) <순간과 영원 사이>(1974) 기타 <타오르는 별>(1960)
작가의 말
(……) 문학이란 한 번만의 영화로 스러져버리는 선인장의 꽃의 생리가 아니라 줄기찬 생명력으로 층층이 가지를 뻗어 긴 장래를 기약하는 줄기의 생리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화려하고 즐거워 보이는 범귀의 일생을 등지고 스스로 인고와 명암의 이 길을 택하였던가? 그러면서도 나는 내게 잠재하였던 폭탄질이 일찍 터져버린 이 사실에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다만 내 영의 고백과 내 혼의 몸부림이, 그리고 내 의지와 사상의 형상이 질실로 통하여 진실을 부르짖고 있음에도 남들이 여기에 무관하거나 알아주지 못할 때에는 절절한 슬픔을 맛볼 뿐이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젊은 꿈과 장밋빛 낭만을 내게서 박탈하여 나를 사로잡아버린 현실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깊이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 현실에 굳건히 뿌리를 내려 현실을 정시하고 해부하여서 그 굳건한 뿌리 위에 나의 작은 세계를 창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의 결과는 환경과 주위의 여건에 영합하지 못하였고, 도리어 위증을 강요당하기 십상팔구였다. 허구와 우회! 위장과 도피! 협소한 실내의 미동의 진자만으로 광범한 역사의 진동이라고 감히 부를 수 있을 것인가? 협착한 상자 속의 한줄기 광명으로 족히 넓은 시야를 밝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두려운 일이다. 이 망상과 과장 속에서 내일을 잊고 오늘에 빠져서 우물대는 군상에서 우선 나 자신을 먼저 빼내야 하겠다고 나는 몸부림치는 것이다.(……) - ‘문학과 인생’, 박화성, <추억의 파문>, 국민문고사, 1969
평론
(……) 박화성은 1932년과 1933년, 그리고 1935년에 각각 장편을 1편씩 발표하였는데, 1932년의 <백화>, 1933년의 <비탈>, 1935년의 <북국의 여명>이 그것이다. <백화>는 역사소설이고, <비탈>은 그 길이 등으로 보아 중편이라 할 만하고, 지금까지 거의 소개된 바 없는 자전적 소설인 <북국의 여명>에서는 이 시기의 작가의식이 보다 선명히 드러난다. <조선중앙일보>에 1935년 4월부터 12월까지 208회 연재된 이 소설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주인공의 선민적 성격이다. 전기(傳記)에서의 작가와 흡사하게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던 효순은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나고 위대하고 훌륭한 여자가 되려는” 이상을 갖고 있다.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효순이 성심껏 추구하는 것이 교육이다. 그는 결국 독지가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하고 사상가가 된다. 이는 1930년대 그의 소설의 지식인 주인공들이 한결같이 머리가 수재이고 인물 잘나고 체격이 좋은 가히 선민에 해당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과 동궤의 조건이다. 주인공의 선민적 성격은 처녀작 <추석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비록 여직공의 신분이지만 여학교 4년 중퇴인 영신은 “인물이나 공부도 첫손가락을 꼽는 단정한 처녀였다.” 작가 박화성은 이만한 조건을 갖춘 인물이라야 소설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며, 이 선민적 성격의 주인공은 그의 전 문학기간 동안 등장하는 그의 문학적 특질로서 주목되는 것이다. 둘째, 그의 절의적 이념의 추구이다.(……) 그는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의식 없는 대중의 각성을 위한 운동, 즉 이론의 순수성을 신봉하는 매우 관념적 형태의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복본주의(福本主義)의 영향 아래 파생된 ML당, 또는 카프의 제일차 방향 전환과 관련된다. 그가 일본 유학기에 접했으리라고 보이는 복본화부의 주장, 즉 직업혁명가가 노동자들의 의식을 전위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지식인 중심의 이론에 근접한 것이며, 따라서 그의 문학에서는 노동자·농민의 현실을 다루되 지식인, 즉 지도적 인물의 역할에 보다 역점이 주어지는 소설 구조를 낳게 된 것이다. 일본 유학기에 사상적 영향을 받는 계기가 되는 ‘독서회’는 “바로 정열적 희생정신과 지적 흥분으로 충만해 있지만 사회현실-또는 노동대중-과는 어느 정도 유리된” 것이었다. 따라서 1934년 무렵까지의 그의 소설은 사회현실 내지 궁핍한 노동대중의 삶을 박진감 있게 묘사하기보다 이념을 앞세우는 도식적 소설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박화성은 이러한 자신의 창작방법에 한계를 느끼고 ‘빈궁의 참맛’을 알고 표현하기 위하여 궁핍의 현장을 취재, 작품화하기 시작한다. 1935년은 카프가 해산한 시기로서 문학 경향이 중대한 변화를 보이는 분기점이지만, 박화성의 경우 이 시기는 창작방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현장소설을 시도하는 전환점을 의미한다. <신혼여행>은 궁핍의 현장을 향한 여행이며, <눈 오던 그 밤>은 궁핍의 사회적 의미를 처음으로 절실하게 발견하는 이야기이고, <홍수전후>, <이발사>, <중국날>, <고향 없는 사람들> 등은 바로 궁핍의 현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지식인 주인공이 궁핍한 현실의 원인을 파악하고 궁핍한 대중을 각성시키는 것을 주로 다룬 상반기의 작품들과는 달리 궁핍의 현장 속에서 직접 취재하여 그들의 고통을 리얼하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그는 특히 홍수나 가뭄 등 자연재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고 이민을 떠나거나 극한의 궁핍을 겪는 농민들의 비참상을 그려 당대에 문제작으로 평가를 받았는데, 궁핍의 원인을 인재인 식민지 현실에 묻고 있기보다 자연재해에 두는 인상이어서 오늘의 시각에서는 식민지 현상의 고발에서는 미흡함을 느끼게 하나, 당시 문단을 지배했던 빈궁문학에서 단순한 이민의 주제란 참신성을 얻기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연재해를 계기로 하여 그 궁핍상이 더욱 극에 달하는 것을 그린 작가의 창작 동기가 이해된다 하겠다.(……) - ‘박화성의 작품세계’, 서정자, <박화성문학전집>, 푸른사상사, 2004
관련도서
<박화성 문학전집>, 서정자 편, 푸른사상사, 2004 <박화성 소설 연구>, 변신원, 국학자료원, 2001 <1930년대 여성작가 소설 연구: 박화성, 강경애, 최정희, 백신애, 이선희를 중심으로>, 윤옥희, 성균관대 박사논문, 1997 <박화성 소설 연구: 사회의식과 여성의식을 중심으로>, 변신원, 연세대 박사논문, 1996 <1930년대 한국여류소설 연구: 박화성, 강경애, 백신애의 작품을 중심으로>, 임선애, 효성여대 박사논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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