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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양균(朴暘均)

예술가명
박양균(朴暘均)
전공
개요
박양균의 시는 사물의 정관과 세밀한 묘사를 통해 대비를 형성한다. 특히 현실의 가열한 상황과 자연 생명의 대비에 의한 이미지의 형상은 큰 감명을 준다. 그의 작품은 자연발생적인 주관적 서정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의 의미와 맞서는 서정, 즉 비평의 서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비평의 서정은 그 자신의 시인적 성장과 더불어 그로 하여금 현대문학 속에서 객관화된 서정을 추구하는 시인으로 정착하게 했다. 비평의 서정을 통해 그의 언어는 두 가지 인식을 동시에 하게 된다. 하나는 서정이 본래 지니는 농도 짙은 감수성의 작용으로 되는 감각적 인식에 의한 사물의 본질 발굴이고, 또 하나는 그 비평성의 작용으로 되는 논리적 인식에 의한 사물의 객관적 파악이다. 그의 주요한 작품의 대부분이 항상 형상성과 구상성의 희한한 믹스로 되는 원인이 거기에 있다. 그는 시 <꽃>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사물에 대한 고요한 들여다보기와 세밀한 묘사를 통하여 시를 썼고, 특히 냉혹한 현실상황과 자연의 생명력을 대비하는 이미지의 형상화에 노력하였다. <화병>은 존재에 대한 잔잔한 투시와 인식을 통한 경이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 참고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누리미디어, 2002 <국어국문학자료사전>, 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편, 한국사전연구사, 1995
생애
경북 영주에서 출생한 박양균은 1950년 성균관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중, 1953년 <문예>지에 <창>, <계절>, <꽃> 등으로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첫 번째 시집 <두고 온 지표>, 두 번째 시집 <빙하>를 간행한 뒤 20여 년간 과작으로 일관하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치과에서>, <낙과> 등의 문제작을 발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7년간의 교원생활과 10년간의 공무원생활을 했고.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 한국문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약력
1924년 경북 영주 출생 1946년 조병화 · 김창석과 동인시지(同人詩誌) <형상(形象)> 발간 1948년 시지(詩誌) <죽순> 동인으로 참가 1950년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 <문예>지에 시 <창> 추천 1951년~1960년 대구여상·원화여고·대포고등공민교·경북대학·효성여대에서 교편 생활 1952년 종군작가단 참가 1955년 한국시인협회 발기에 참가 1961년 한국문인협회 경북지부장 /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경북지부장 1974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분과 회원 1989년 영남일보 전무 및 논설주간
상훈
1990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시집
<두고 온 지표>(1952) <빙하>(1957) <일어서는 빛>(1974) <전시장에서>(1985)
작가의 말
(……) 연작시 <일어서는 빛>은 1973년 10월에서 1976년 1월까지 현대시학지에 연재한 것으로 내 나름대로는 시를 생각하며 써 보았다. 나이 50이 넘고 보니 공연한 것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아무렇지도 않는 사사로움을 대견하게 여기게 되며 걸핏하면 심경토로가 앞서려고 한다. 이러한 나의 일상에서 벗어나 시를 나와는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를 떠나 시 스스로가 갖는 질서를 세워보고 싶어진 것이다. 나의 무딘 일상에 ‘빛’을 더한다는 바람 같은 것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젖은 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물리적인 현상으로서의 빛을 소재로 택했다. 그러나 빛의 일반적인 개념은 어쩌면 우리에게 정서로서 투영되어 왔을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제까지 있어온 우리 시에는 이러한 영향이 감상이나 서정으로 취급된 바가 허다하였다. 나 자신도 열외는 아니었을 줄 안다. 이러한 자각은 나의 시작과정에 있어 새로운 전기를 재촉하는 데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실재의 빛과 그릇된 빛의 인식이 갖는 이질적인 양면의 모순에 끌려 나는 이를 자신의 목소리로서가 아니라 감정을 멀리한 시 스스로의 질서의 운용 속에 나를 발견코자 했다. (……) - ‘자서’, 박양균, <일어서는 빛>, 형설출판사, 1976
평론
1952년에 첫 시집으로 <두고 온 지표>를 내놓은 박양균 씨는 4년 후에 다시 두 번째의 시집 <빙하>로서 집요하리만큼 성실겸허하게 시와 인간존재와의 해후라는 일련의 근원적인 동일성을 찾아 헤매었다. 1950년대의 그는 적어도 30대의 젊음답지 않게 중후한 미학적 관념으로 사로잡혀 있다. 좌절이나 회의로 노오란 해진 표정은 물론 아니지만 싱싱하고 발랄한 기운은 그 스스로도 기대하지 않았다. 더러 어미의 어디엔가에 낭만성이라고 할 만한 어떤 아이러니의 부유가 기웃거리고 있다고 해도 역시 그의 언어는 천성 날렵한 기지와는 남인 듯싶다. 독자를 위해서, 또는 일종의 감동을 유발하기 위해서 시인이 되고자 한 그런 배우(俳優)로서의 시인은 아니다. 거의 철저하게 누군가의 이해를 돕고자 하지는 않는다. 누구를 위하여 쓰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렇다고 스스로를 위하여 쓰는 것도 아니다. 가혹하게 말할 수 있다면 시인 박양균은 ‘아니다’에서 출발한다. 그의 모든 언표에서 오늘날 우리 시대의 많은 독자들이 손쉽게 얻어내려고 하는 그 어떤 역사성이나 사회성도 구경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살림살이의 푸념이나 또는 어떤 사실을 두고 찝적거리는 손찌검질 같은 것도 그의 시에서는 있을 수 없다. 희망에 부풀지도 않고 심정의 울먹임 따위야 아예 생각할 수도 없거니와 신념의 표백(表白)은 물론 주장 나부랭이를 늘어놓는 일은 거의 금물처럼 보인다. 그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시이다. 시야말로 그에 있어서 인간적 현실의 한 기적이다. 그 모든 인간적 현실을 다 보태어도 시는 없고 그 같은 인간적 현실에 종지부를 찍은 자리에서 기묘하게도 그 시가 피어나기 때문이다. 그에 있어 시는 그대로가 한 송이의 연(蓮)꽃의 의미이자 생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현상이 끝내 인간적 숙명의 뜻을 띠고 나타나는 데에 또한 그가 시를 쓸 수밖에 없는, 끝내 시인일 수밖에 없는 내적명령을 받고 있는 듯하다. 그에 있어 시와 현실은 시종 어울릴 수 없는 별도의 영역이었다. 적어도 이러한 별도의 의식에서 그는 길을 나섰다. 아무리 시가 그 말들에게 호미나 칼을 쥐어줘도 현실은 눈 한번 돌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이미 그는 20대의 시인으로서 알고 있었다. 현실과 시는 적어도 그에 있어서는 끝까지 남남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화해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때로 습기 젖은 언표로 화해하였던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시는 현실의 거부 위에 존재하고 현실은 시가 없는 데에서만 이야기될 따름이다. 현실에 대해서 시는 너무도 간지럽다. 현실의 부정이 아니고서는 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시야말로 없음에서 비롯하는 있음이다. 시의 근거는 저 무한한 영원성의 무(無)에 다름 아니다. 두 개의 시집, 그러니까 1950년대의 박양균 씨는 한마디로 무의 표류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은 곧 무를 찾아나섰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가 첫 시집을 펴내는 이유를 “존재를 건설하기 위해서”라고 했었다. 그러나 이 존재는 무의 들판에서만 비로소 나타난다. 어떠한 사물도 그것이 있기 위해서는 그밖의 다른 모든 것이 없어야 한다. 없지 않고서는 있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말들은 단순한 관념적 언어의 장난이 아니다.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실재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박양균 씨의 존재건설은 결코 대상화 작업을 말하지 않는다. 시는 대상화와 더불어 죽는다는 것을 그는 그의 초기의 시작업부터 알고 있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시각적 대상도 아니거니와 그 스스로가 살고 있는 생명적 존재도 아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속속들이 의미가 없어진 다음에, 이른바 변화의 그 해괴한 무대 위에 나타날 변화의 기적-존재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물기이든 물기에 젖은 말씨들은 이 변화존재의 현현작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언어들이 1950년대 첫 해에서 서서히 그리고 아낄 것 없이 물기를 털어내고 메마르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다. 시가 정서적이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가르침에 대해서 외면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시인은 시의 시대적 운명을 남달리 예민하게 예감하였다고 할 수 있다. 현대가 시의 상실시대 또는 시의 위기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정서적 표현으로서도, 또는 어떠한 상징적 구성으로서도 시가 구출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정서를 느낄 수 없고 정서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정서 그 자체가 시의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시적이란 말과 정서적이란 말을 같은 뜻으로 음미할 수 있었던 시대는 박양균의 출발과 더불어 사라져버린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경고 없이는 이 시인의 시를 납득할 수가 없다. 그가 1960년대를 시를 떠나 현실에 파묻힌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재기는 그 용기만큼 무섭다. 33편으로 이어지는 그의 1974년의 연작시는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였다. 1960년대까지도 그의 언어의 눈빛에 어리고 있었던 정서에의 미련이 여기에 와서는 흔적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일전의 인격적 개성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 그러나 시인은 반드시 어느 땐가는 그 <일어서는 빛>을 만나리라고 절대적 정열로서 추구한다. 그것이 공허한 빛인 것을 너무도 알면서도 그 빛을 향하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뚜렷한 것이 있다. 그 <일어서는 빛>이야말로 시인 박양균의 본래의 그 자신이며 또한 우리들이 이 세계에서 만날 수 없는 우리들 스스로의 정체라는 미지수의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 미지수의 사실인 <일어서는 빛>이야말로 그와 나의 모든 것이 투명해질 수 있다는 역시 미지수의 사실이다. <일어서는 빛>이란 그런 어떤 내부의 요원하면서도 영원하고 무한한 손짓이다. - ‘박양균론, <일어서는 빛> 또는 뜻의 죽음을 위하여’, 원형갑, <현대시학>, 1975년 12월호
관련도서
<박양균 전집>, 김원중·채종한 편, 새벽, 1996 <만나서 기쁘지 아니하랴: 박양균 시문학 40년>, 김원중 외, 명문당, 1989 <존재론적 시의식에 관한 연구: 1950년대 박양균, 이철균, 김춘수를 중심으로>, 채종한, 영남대 박사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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