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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극장

작품명
대한극장
소재지
서울시 중구 충무로 4가 125
건축가
김형만
장르구분
1951년~1970년
내용
1950년대 후반기는 한국전쟁 후 극도의 빈곤과 사회불안이 만연한 문화 부재의 암울한 시대라 할 수 있다. 당시 김형민 초대 서울시장과 전 주한미8군 사령관인 벤프리트 중장은 시민들에게 문화, 오락 및 휴식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국제 수준의 문화공간을 마련하기로 하고, 이에 건립한 것이 바로 <대한극장>이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철근콘크리트 구조이며,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 영화관의 하나로 2,000석의 객석과 한국에서 처음으로 70mm 스크린을 설치했다. 또한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중앙식 공기조화 설비 시설을 갖춘 극장이기도 하다. 중앙식 공기조화 설비는 당시 국내에서는 아직 그 건설기술이 부족하여 미국에서 도입한 공기조화 냉난방 시설을 설치하였다. 공사에는 우리 나라 설비계의 선구 역할을 했던 유동렬 씨가 참여했으며, 국내의 건축 설비기술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조시설을 갖춤으로 해서 외장부를 극히 제한하고 창을 전면에 두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외관은 단순미를 지니게 되는데, 면을 분할하고 곡면에는 면분할을 점증하여 운동감을 표현할 뿐 아니라 리듬감 있는 조소성을 띄고 있다. 극장 내부의 단면 설계는 과학적인 음향계획이 적용되었다. 당시 처음으로 채용한 흡음공은 현장에서 하나하나 구멍을 뚫어 제작하여 설치하였으며, 미국에서 수입한 의자를 설치해 당시로서는 좌석 간격이 매우 넓은 배치계획을 하게 되었다. 1차 설계에는 김세연, 차경순, 김창집 등이 참여하였고, 2차 설계에는 이광노가 참여하였다. 당시 국내 최대의 단일극장이었지만, 2000년에 헐리고 신축공사에 들어가, 현재 복합영화관으로 다시 지어졌다.
건축가
김형만 1930년생으로 1955년 동경공업대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1969년 호주 시드니대학 대학원을 수료, 1990년에는 동 대학교 도예학과를 졸업하였다. 196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제6연구부장, 1971년 일본교토대학원 연구원, 1972년 건설부 국토건설종합계획연구 심의실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1974년 국민대학교 교수, 1976년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대한극장>,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마스터플랜> 등이 있다.
리뷰
당시 세워진 대표적인 극장건물로는 <국제극장>과 <명보극장>을 들 수가 있다....(중략) 그리고 이것들과는 다른 형식의 극장이 퇴계로에 세워졌는데 바로 <대한극장>이다. 이 건물은 위의 극장들과는 달리 전면을 콘크리트 벽면의 루버로 둘러싸고 있어, 폐쇄적이며 중후한 감을 자아내고 위의 두 건물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국현대건축총람2-광복 직후, 모더니즘의 배태/1876-1960 > 한국건축가협회, 2000)
이미지
연계정보
*관련도서 <서울의 건축>, 한국건축가협회, 발언, 1995 <한국현대건축총람2-한국의 현대건축>, 한국건축가협회, 기문당, 2000 <전국건축문화자산>, ’99건축문화의 해 조직위원회, CD, 2000 *관련사이트
관련사이트
한국건축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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