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전미애 (1956.2.25~)

예술가명
전미애 (1956.2.25~)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88.8.1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 조교 선정
생애(약력)
1970.~2003. 이충무공탄신일 헌무, 한산대첩 승전무 공연 1971. 제12회 전국민속경연대회 문화공보부장관상 수상 1973.10. 영남무용대회 특상(개인무) 수상 1977.~2003. 충렬여자상업고등학교 특활시간에 승전무 강사 1989.1. 미국 LA 초청공연 1994. 일본 담노시 초청공연 1997. 중국 영성시 초청공연 1998. 대통령취임 경축행사 초청공연
리뷰
인간문화재 후계자 22 북채와 활옷 속에 충무의 자랑이…. 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는 충무의 자랑이다. 어제의 충무에 대한 자부심이고 오늘의 충무에 대한 보람이다. 승전무의 전수조교 전미애(全美愛)씨는 그 자랑 그 보람으로 춤을 추고 가르친다. 승전무는 가운데 커다란 북을 눕혀 걸어놓고 4명의 원무가 북을 치고 12명의 협무가 주위를 감싸는 형태로 진을 펼치며 추는 북춤이다. 이런 형태의 춤을 고려시대부터 구중에서 추어지던 무고, 동동같은 춤과 같은 맥으로 짚어지는 춤이다. 활옷을 입고 화관을 쓰고 양손에 한삼을 끼고 한삼 속에 북채를 들고 추는 춤사위가 장중하면서도 힘이 있고 지화자를 부르는 창사가 축하의 의미를 보여준다. 이 춤은 궁중정재로 시작했지만 지방 관아에서도 추어졌다. 교방 예인들에 의해 전해진 가(歌)·무(舞)·악(樂) 중에서 공식적인 행사용 순서였던 셈이다. 이 춤은 관아와 교방이 있는 여러 곳에 전해졌겠지만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곳이므로 통제영의 영향에서 많이 추어져 그 전수의 맥이 다른 고장보다 든든했던 것이다. 이 춤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968년 12월이었다. 지금은 지정당시 보유자들은 없고 1976년 장고로 지정된 이기숙씨가 제일 어른이다. “나는 어릴 적에 할머님께 우리 춤을 배우다가 중학교 들어가면서 중단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고1때부터 승전무를 배우기 시작한 거죠.” 그는 승전무가 충무의 문화재고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들까지 모두 좋아하고 구경하며 사랑하는 ‘내 고장의 문화유산’이어서 배우는게 자랑스러웠다고 말한다. 그의 스승은 보유자 후보인 한정자(韓貞子, 1982년 지정), 엄옥자(嚴玉子, 1986년 지정)씨다. 처음에는 학교운동장이나 체육관에서 시작을 했다. 그가 졸업할 무렵에 한옥형태를 살려 만든 단독 건물인 전수회관이 생겼다. 그는 거기서 이수자 인정을 받은 30세까지 꾸준히 공부를 했고 이제는 전수회관을 지키며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승전무는 우리 고장의 자랑이어서 전승에 바탕을 키우기 위해 여고1년 때부터 학교 중심으로 가르칩니다. 고3쯤 되면 춤도 좀 익게 됩니다만 졸업하고 나면 한차례 변동을 겪게 되죠. 취직이나 결혼으로 떠납니다. 좁은 고장이라 겸해서 두 가지 일을 하기가 더 어렵구요.“ 지금 이수자는 그를 포함해서 모두 7명만 남아있다. 열세 살짜리 딸아이가 엄마가 추는 승전무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이 춤을 배우는 일에 절대 반대다. “승전무 전수조교로 살림하랴 전수회관에서 일하랴 뛰어다니는 것은 이 집안에서 엄마 하나로 족하다는 거죠.” 힘들고 어렵게 배우며 일하며 사는 속에서 그는 더 많이 배우고 싶어한다. “춤 속에 나오는 창사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창을 익히는 게 급선무인데다가 장구도 제대로 익혀야 하거든요.” 어렵지만 보람이고 자랑이어서 그는 배울 욕심이 그치지 않는다. <일간스포츠>, 구히서, 1990년 12월 1일관련가치정보
연계정보
-승전무(勝戰舞)
관련멀티미디어(전체2건)
이미지 2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