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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모(鄭勳謨)

예술가명
정훈모(鄭勳謨)
분야
성악가
생애
정훈모는 1909년 4월 19일 평양시 상수리에서 태어났다. 상수리보통학교를 거쳐 서문여고의 전신인 평양공립여자고등학교에 다녔는데 당시 평양에서 이름을 날리던 윤심덕의 노래를 듣고 감명을 받아 음악을 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성악가로서의 자질도 가지고 있어 음악선생이었던 박윤근과 서울에 있는 이화여전의 성악교수 루스로부터 성악 지도를 받으며 1927년, 서문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가 일본에서 들어간 동경국제음악학교는 그때 처음으로 설립된 학교였고, 정훈모는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정훈모는 국제학교를 졸업한 1931년부터 광복을 맞이한 1945년 사이에도 세 번이나 동경 유학을 결행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으며, 그때마다 독창회를 열어 자신의 성장도를 만인에게 보여주었다. 동경국제음악학교를 졸업한 해 황해도 안악 대지주의 아들인 바이올리니스트 김형량과 결혼, 가정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1932년 제1회 독창회를 필두로 3년을 연속해서 독창회를 개최했고, 1935년에는 남편의 곁을 떠나 홀로 동경으로 건너가 독일인 교수였던 네트케 레베를 사사, 독일 리트의 진수를 터득할 수 있었다. 1936년에 귀국한 그는 제4회 독창회를 가지면서 이화여전 교수로 부임했으나, 1년 만에 사직하고 시가가 있는 황해도 안악으로 돌아갔다. 광복 후 부군과 함께 월남한 그는 1946년 서울 음대의 전신인 예술대학 교수로 취임, 1947년 제7회 독창회를 가졌으나 그 해 부군인 김형량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생계 때문에 독창회보다 동호인들의 그룹 연주에 더 참가하기 시작했다. 1948년에는 김원복, 박민종, 김순열, 김창락 등과 5인음악회를 개최했고, 고려교향악단이 연주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에 독창자로 나서는 등 활동의 영역을 넓혀 갔다. 1951년 부산 피난시에 서울대학교 음대 교수로 부임한 이래 1974년 정년으로 퇴직하기까지 음대 교수로 재직했고, 한때는 효성여자대학교 음악과 과장직을 겸임하기도 했다. 1954년 광복 10주년 기념 여성 건국공로상을 수상, 1955년에는 서울시문화상을 받았으며, 1953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성악가로서, 교수로서 8남매를 훌륭히 키워낸 공로가 인정되어 1961년에 제정된 제1회 새싹회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는데 같은 해 정부로부터 문화표창을 받기도 했다. 1974년 65세로 정년퇴직 후, 1975년 고혈압으로 쓰러진 그는 1978년 1월 3일 혈전증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3년간 끈질긴 투병생활을 통해 주위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약력
1972년 서문여자고등학교 졸업 1931년~1945년 동경 유학, 동경국제음악학교 졸업 1946년 서울예술대학(서울음대의 전신) 교수 취임 1951 서울대학교 음대 교수 부임 1953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 1974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퇴직
상훈
1954년 광복 10주년 기념 여성건국공로상 1955년 서울시문화상 1961년 제1회 새싹회 장한 어머니상, 문화표창 수상
공연
1932년 제1회 독창회 1933년 제2회 독창회 1934년 제3회 독창회 1936년 제4회 독창회 1938년 제5회 독창회
리뷰
(……) 예술가의 보람은 생의 환희와 감동을 심어주는 데 있다. 삶의 온갖 변천과 시련 속에서도 생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지고 아름다운 것임을 다짐하고, 인간의 심정을 격려하고 희망을 심어 주는 일이 예술가의 기쁨이다. 선생님은 이 일을 위하여 일행을 바치셨다. 그것은 참으로 보람 있고 값진 삶이다. - <서울대학교 동창회보>, 김영의, 1984년 4월 1일 (……) 우리 악단의 명인 정훈모씨는 암흑한 듯한 우리 악단에 봉화를 들고 나온 명 소프라노이다. 그의 심각한 인생관을 노래하는 듯한 무거운 성량과 때로는 아리따운 금반 위에 청옥을 굴리는 듯한 고운 목소리는 그야말로 명랑하고 아리따운 나이팅게일의 노래와도 같을 것이다. 그가 작년 가을에 정동 모리스홀에서 그의 부군인 김형량 씨(바이올린)와 부부음악회를 한 것이 경성에서의 첫 번째 데뷔일 것이다. 그가 부르는 슈베르트나 슈만의 가곡 속에서 인생의 심각한 어느 모퉁이를 엿볼 수 있었으며 섬세하고도 심중한 감정을 엿들을 수 있었다. (……) 또 작년 중에 평양서도 일차 출현하여 평양악단에 큰 파문을 일으킨 일까지 있다고 하니, 과연 그의 소프라노가 앞날의 완벽을 기다려 조선 제일 아니, 세계악단에까지 진출하게 될 것을 감히 말한다. - ‘조선 음악가 인 퍼레이드’, 1936년, 출처 미상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 한상우, 지식산업사, 2003
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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