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이상춘(李想春)

예술가명
이상춘(李想春)
분야
성악가
생애
이상춘은 1910년 10월 24일 5남매의 셋째로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소리가 좋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엄격한 집안 분위기는 그로 하여금 노래를 마음놓고 할 수 있게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초창기 음악가들의 대부분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교회를 통해 음악을 접하고 음악공부를 시작했는데 반해 이상춘은 기독교의 영향권 밖에서 음악에 입문함으로써 음악가로서의 성장에 남다른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만 해도 노래를 할 수 있는 무대가 교회밖에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이상춘은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마음 속으로만 음악에 대해 열정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1928년 중학교 과정을 마친 이상춘은 결국 18세의 약관임에도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물론 성악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지만 충청도 양반 가문에서 풍각쟁이가 되겠다는 그의 소원을 들어줄 리 만무하여 그는 고학으로 음악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가긴 했지만 정규학교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돈이 없었기에 당시 성악의 나라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테너 히라마를 찾아가 개인지도를 받는 한편, 바리톤 시모야가와가 세운 동경성악전문학교에 적을 두었다. 그러나 약간의 돈을 저축할 수 있게 되자 동경중앙음악학교 3학년에 편입, 1936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가을,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 볼 겸 마이니치전국콩쿠르에 출전해서 입상했던 것이다. 성악가로서의 자신감을 갖게 되자 그는 용기를 내어 이탈리아인 소프라노 노타르 자코모 여사의 문하에 들어가 벨칸토 창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자코모는 세계적인 테너 벤야미노 질리와 동문으로 그녀는 이상춘에게 발성법으로부터 시작해서 성악가가 되는데 가장 중요한 지름길을 알려 주었다. 1940년 드디어 이상춘은 동경군인회관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갖게 되었다. 비록 조선사람이었지만, 그의 독창회에 참석한 일본인들도 크게 감동한 나머지 당시 일본의 대표적 작곡가인 쿠레가 작곡한 오페라 <로자리오 부인>의 주역 가수로 선발되기에 이르렀다. 1941년 12월, 일본 최고의 소프라노 오츠야의 상대역으로 무대에 선 그는 성공적인 공연을 끝냈고, 계속해서 독일인 교수 켈레베 여사로부터 독일 리트에 대한 전문적인 가르침을 받아 레퍼토리를 확대해 나갔다. 해방 후, 그는 서울의 무학여고에 음악교사로 자리를 잡고 1946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 시간강사로 출발, 1961년에는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그 후 1976년 정년퇴직하기까지 서울대학교에 몸담고 있었다. 정년 2년 전에는 음악대학 학장직을 맡아 일했는데 언제나 중용지도를 지켜 나가는 온화한 성품은 학장으로 있는 동안에도 그 누구로부터도 비난받지 않고 음악대학을 잘 이끌었다는 평을 받았다.
약력
1936년 동경중앙음악학교 졸업 1944년 중앙음악학교 교사 1945년 서울 무학여자고등학교 음악교사 1946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강사 1961년 서울음악대학교 교수 1976년 서울음악대학교 정년퇴임, 단국대학교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상훈
1960년 소성훈장, 5월문예상 대한민국예술원상 서울시문화상 국민훈장 동백장
공연
1940년 제1회 독창회(동경군인회관) 외 11회 독창회 1972년 국립극장 독창회
오페라
<로자리오 부인> <춘향전> <왕자호동> <팔리앗치> 등
리뷰
이상춘의 성품은 서민적이어서 동료 혹은 후배들과도 기꺼이 술자리를 함께 했고, 흥이 나면 부르는 우리나라 민요창은 그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명창이었다고 하겠다. 집안의 선친 가운데 특히 음악과 관련된 사람은 없으나 아버지 이교만은 한의사로 특히 시조창의 명수였다니 그가 양악을 전공했으면서도 우리 민요를 서양 창법으로 잘 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 그의 일본인 스승인 테너 히라마 분주가 한국을 찾아 왔을 때 그의 환영 모임에서 이상춘이 우리 민요 <박연폭포>를 부르면서 고음을 시원스럽게 내자 히라마는 60을 넘긴 사람이 저렇게 소리를 잘 내니 ‘한국은 가히 테너의 나라’라고 하며 감탄했다는 일화도 남기고 있다. 우리가 경험한 바이지만 특히 테너의 경우, 젊어서 힘이 있을 때는 소리를 잘 내지만 나이가 들어 육체적으로 쇠잔해지면 더 이상 무대에 서기가 어려운 법인데 테너 이상춘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창법으로 독특한 발성을 유지함으로써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무대에 설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흔히 음악가들을 옹고집에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상춘은 그 누구와도 다투어 본 일이 없는 음악인같지 않은 음악인, 테너같지 않은 테너, 교수같지 않은 교수로 유유자적하며 무수한 음악적 업적을 이 땅의 음악계에 남겨 놓았다. - ‘독특하고 시원한 창법의 소유자’, 한상우,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 한상우, 지식산업사, 2003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관련멀티미디어(전체2건)
이미지 2건
  • 관련멀티미디어
  • 관련멀티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