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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형일(安亨一)

예술가명
안형일(安亨一)
분야
성악가
생애
정주운전초등학교를 거쳐 정주중학교로 진학한 안형일은 중학교 3학년 때 당시 음악교사였던 최용린 선생으로부터 목소리가 좋으니 노래를 하라는 권유를 받고 성악 개인 교습을 받으며 음악의 길에 들어섰다. 성악 외에도 학교 취주악대에서 트럼본을 불면서 지휘도 맡아 하는 등 교내외에서 적극적으로 음악 활동에 가담했다. 5년제 중학교를 졸업한 후 광복을 맞게 되자,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그는 가족을 고향에 남겨둔 채 1946년 3·8선을 넘어 단신으로 서울에 발을 디뎠다. 미군 대령집에 일자리를 얻고 시간을 내어 혼자 노래 연습을 했는데, 어느날 그의 노래를 듣던 미군 대령이 칭찬하며, 미군 장교 정기모임 때 노래를 해주면 음악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해 그 후부터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로 음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입학하면서 테너 이상춘 교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한국전쟁 발발로 해군정훈음악대 합창단에 들어가 위문공연을 다니게 된다. 위문공연 중에도 학교 생활도 계속해 재학 중에 그의 전공실기는 단연 으뜸이라고 손꼽힌다. 졸업시에는 성악기술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졸업연주회에서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 중의 아리아를 불러 큰 인기를 얻었다. 그 후 안형일은 평생을 통해 <라 보엠>의 루돌프 역만 9회를 기록함으로써 가장 인연 깊은 오페라가 되었다. 흔히 음악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넉넉한 집안 출신이라고 말하지만 안형일은 홀홀단신으로 남으로 내려와 어쩔 수 없이 인생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런 어려움을 내색하지 않고 언제나 부드럽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줌으로써 후학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약력
1945년 정주고등학교 1953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1960년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조교수 1966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1974년 이태리 로마산타체칠리아국립음악원 졸업 1983년 이태리가곡연구회 회장 역임 1983년 국립오페라단장 역임 1992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명예교수 1995년 추계예술학교 대우교수 199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97년 국립오페라단 자문위원장
상훈
1982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1982년 문화공보부장관상 1984년 평안북도 문화상 1984년 서울시문화상 1986년 월간음악상 1991년 한국음악대상 1992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92년 국민훈장 목련장 1996년 예총예술문화상
공연
<카르멘>(1955, 1975) <춘희>(1957) <리골렛토>(1958, 1966, 1978) <춘향전>(1958, 1981, 1990) <라보엠>(1959, 1965, 1970, 1977, 1978, 1981, 1983, 1992) <루치아>(1964,1981) <토스카>(1964, 1979) <아이다>(1965) <파우스트>(1968, 1979) <나비부인>(1970) <카바레리아 루스티카나>(1971) <투란노트>(1972) <라죠콘다>(1977) <노르마>(1988) KBS 교향악단, 서울시립교향악단, 코리안심포니 서울아카데미심포니 등 다수 협연 일본교향악단 협연 일본, 미국, 태국, 독일, 네팔, 대만 등 각국 순회공연 국내외 각종 연주회 500여 회 출연
저서
<이태리가곡집> 전8권, 안형일 편, 음악춘추사, 1992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 안형일 편
리뷰
테너 안형일은 우선 고음이 어느 누구보다도 찬란하다. 황금 트럼펫과 같은 소리라면 과언일까? “오형 엊저녁에 소주가 좀 과했더니 오늘 영 소리가 안 나오는데 큰일났수다.” 라고 할 때가 있다. 이건 엄살이 아니라 사실인데도 <라보엠>의 아리아 <그대의 찬손>의 하이 C와 2중창 마지막 부문의 C를 상대역의 미미를 질리게 할 정도로 거침없이 내뽑는 것이다. 그의 노래는 오밀조밀한 잔재주나 또는 간드러진 멋은 없으나 오소독스한 창법은 성악의 정도를 걷고 있는 것이다. - <오페라 실패담>, 오현명, 출처미상 테너 안형일의 오페라 인생은 1955년 비제의 <카르멘>에 이어 당카이로 역을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이미 음대 졸업연주회에서 그의 열창은 가수로서의 기량을 인정받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선배 테너들이 활동하고 있어 주역 자리를 맡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1957년 <라 트라비아타>에서 가스통을 맡아 자신의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내자 이듬해인 1958년,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를 무대에 올리게 되었을 때 현제명 박사가 안형일을 주역으로 추천함으로써 드디어 만토바 공작 역을 맡아 오페라 주역 시대의 문을 열게 되었다. 이때부터 안형일의 오페라 인생은 장장 35년을 이어가면서 주역 가수의 자리를 내어놓지 않았는데 1992년 그가 가장 많이 출연했던 <라보엠>의 루돌프 역을 끝으로 오페라 무대를 마감했다. 그의 회갑기념음악회 서문에서 전봉초(첼리스트, 예술원 회원)는 이렇게 적고 있다. “20여 년 동안 서울 음대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우리 악단에 기라성같이 많은 중견음악가를 배출하였으며 우리나라 오페라 운동의 태동기에 선구적 역할을 해온 이인선, 이상춘, 이인범 등 세 분의 뒤를 이어 1958년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주연을 필두로 근 30년간 주연의 왕좌를 지켜 온 명실공히 우리 성악계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나는 최근 일본 악단의 몇몇 인사들과의 만남에서 안교수가 동양권에서 단연 으뜸가는 테너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기회를 가져 우리 악단이 좀 더 안교수 같은 분들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아끼고 받드는데 마음을 써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 ‘오페라에 대한 열정의 삶’, 한상우,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 한상우, 지식산업사, 2003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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