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김자경(金慈璟)

예술가명
김자경(金慈璟)
분야
성악가
생애
김자경은 1917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약제사 시험에 합격한 후 개성 갓골에 약방을 내게 되어 개성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김자경이 태어났다. 3년 여를 개성에서 약방을 하면서 열심히 교회에 나가던 아버지가 선교사의 권유로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어 이들 가족은 다시 서울로 올라왔던 것이다. 아버지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전도사와 한방의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지방으로 돌아다녔는데, 어머니는 16세 때 시집와 1년 후인 17세에 김자경을 낳았고 그가 대학에 들어간 직후 어머니가 나이 38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김자경은 무남독녀 외동딸로 어머니 없이 대학생활을 해야 했다. 춘천에서 자란 그는 서양 선교사에게 피아노를 사사하고, 루씨여고에서도 계속 피아노를 쳤는데 그는 팔방미인으로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여러 가지 능력들이 한꺼번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피아노, 노래뿐만 아니라 육상종목에서부터 정구, 탁구 등에 이르기까지 선수로 활동했고 피겨스케이트로부터 스키까지 했으니 무엇을 하든지 모든 힘을 다하는 정열적인 성격은 후일 그가 우리 음악계에 끼친 많은 공로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화여전 피아노과로 입학한 그는 음악회 때마다 독창을 맡아 하며 그 기량을 발휘했다. 결국 학교에서도 졸업반이 되자 “너는 성악과 피아노 양 과의 졸업을 인정하겠다”고 해서 전 장학금을 받고 성악과로 전과, 채선엽 교수로부터 집중적인 레슨을 받아 1940년 이화여전을 졸업했다. 이화여전을 졸업하는 해에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제3회 신인음악회에 출연해서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 중, <정결한 여신>을 열창, 만장의 갈채를 한몸에 받기도 했다. 이화여전을 졸업한 후 그는 홍난파 선생의 권유로 이화여고의 음악선생으로 취직하고, 여기서 평생의 반려자가 된 남편 심형구를 만나 그 해 12월 결혼하게 된다. 김자경은 1948년 1월, 이인선이 주동이 되어 한국에서 최초로 무대에 올려진 오페라 <춘희>에서 비올레타 역을 맡아 열연했으며 그 해 4월 앙코르 공연에서는 혼자 10회의 전 공연을 맡아 세인을 놀라게 했다. 이후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줄리어드에서 성악을 공부하는 한편, 1950년에는 카네기홀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독창회를 개최했으며 이어서 전 미국을 돌며 1백회 이상의 독창회를 갖는 한편 세계적인 테너 리처드 터커와 함께 오페라 <카르멘>을 공연하기도 했다. 1958년 김활란 박사의 간곡한 귀국 종용에 따라 1958년 10년 만에 귀국하여 정년을 맞을 때까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봉직했다. 그러나 성악가로서의 그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라 70세를 훨씬 넘기고도 계속해서 독창회를 가졌으니 음악에 대한 그의 정열은 누구도 따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렵게 결혼한 남편 심형구는 같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한국 화단의 중진이 되어 그야말로 예술가 부부로 좋은 시절을 만났다 싶더니 1962년 여름 해수욕 중 심장마비로 어이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아 김자경은 또다시 깊은 슬픔을 맛볼 수 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오직 제자들을 키우는 일에 온 정신을 쏟아 아픔을 이겨 냈고 성악과장 등을 거치며 1백 20여 명의 제자를 길러내며, 196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민간오페라단인 김자경오페라단을 창단, 첫 공연으로 자신이 최초로 출연했던 <춘희>를 다시 무대에 올려 20년만에 다시 자신이 비올레타 역을 맡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메리 위도우>와 <카르멘>을 잠실올림픽공원 야외무대에 올려 국내 야외오페라공연의 막을 열었고, 신창악 오페라로 김동진의 <심청>을 성공적으로 초연한 후 다시 1997년 가을에는 제53회 공연으로 김동진의 <춘향전>을 무대에 올려 한국적 오페라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훈
1974년 9월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1974년 10월 대한민국문화훈장 은관 수상 1976년 10월 중앙일보문화대상 수상 1983년 2월 국민훈장석류상 수상 1984년 10월 올해의음악가상 수상 1987년 10월 세종문화상 수상 1992년 11월 프랑스문화예술훈장 수상 1993년 12월 체육부장관으로부터 문화공로패 수상
공연
1940년 조선일보사 주최 신인음악회 출연 1940년~1948년 서울 및 지방 독창회 6회 1941년 일본 빅터 레코드 취입 1948년 한국 최초 오페라 <춘희> 주역 1950년 미국 뉴욕카네기홀에서 한국인 최초 독창회 1950년~1958년 미국 각 주 80여 도시에서 100여 회 순회독창회 / 미국 메트로폴리탄오페라하우스 가수들과 하기순회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카르멘> 1958년~1992년 서울 및 지방 독창회 60회 1959년~1979년 한국가곡 및 민요 취입 1960년 오페라 <오텔로> 주역 1962년 국제음악제 독일 오페라 내한 <피델리오> 출연 1968년~1987년 김자경오페라단 창단 이래 29년간 정기공연 52회 및 지방 및 소극장공연 400여 회 1971년~1989년 국제음악인대회(I.M.C) 한국대표로 9회 참석 1975년~1997년 한국가곡 독창회 19회 1979년 김자경오페라단 오케스트라 창단 1981년 청소년합창단 25명 인솔 전미 순회연주 1982년 여선교회 창단 40명 동남아 순회연주 1983년 오페라 연구차 유럽(영국, 프랑스, 이태리, 독일) 방문 1987년 미국 뉴욕카네기홀 독창회 1988년 미국 뉴욕카네기홀 독창회 1991년 결혼 50주년 기념 독창회(서울 및 부천) 1992년 일본 동경가꾸라사까도모노회관에서 한국가곡 독창회 1992년 미주순회공연 1993년 김자경오페라단 종교부 창설 1993년~1997년 김자경오페라단 종교부 합창단 제3회 정기공연 1996년 김자경오페라단 국제부 창설
리뷰
1948년 해방 후 처음으로 우리의 손에 의해 오페라 <춘희>가 무대에 올려진 이래 40여 년이 흐르면서 우리 오페라계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많은 발전을 거듭해 왔고 특히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창단한 김자경오페라단은 이 나라 오페라발전에 밑거름이 되는 역할을 감당해 왔다. 특히 오페라 운동에 모든 것을 바쳐온 김자경 선생의 업적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겠으나 선생이 항상 부르짖던 오페라 전용극장의 탄생이 현실로 나타나 개관축하공연으로 오페라 <카르멘>을 무대에 올리게 되었으니 그 감회는 참으로 남다른 뿌듯함으로 꽉 차 있으리라 생각된다. 종합예술로서의 오페라는 음악 이외에 전문적 기능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문화적 선진국에서는 멋진 오페라극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를 크게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좋은 오페라를 만들어도 이를 수용할만한 전문극장이 없다면 그건 결코 종합예술로서의 감동을 나누어줄 수 없다는 점에서 예술의전당 서울오페라극장의 개관은 드디어 우리도 오페라다운 오페라를 맛볼 수 있는 문화적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전문관에 대한 간절한 염원은 일반 애호가들보다 오페라를 만드는 제작자들에게 더욱 간절한 것이었고 그래서 <카르멘>을 무대에 올리는 김자경오페라단의 각오는 각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오페라하우스의 개관 공연으로는 세 편의 오페라가 선정되었고 그 중에서 두 편은 이미 공연이 끝났지만 대중과 가장 친밀한 공감 속에서 축제의 의미를 나눌 수 있는 것으로는 <카르멘>의 무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김자경오페라단은 금년이 창단 25주년이고 공연횟수로는 44주년에 이르고 있어 그동안 축적된 힘과 전문 공연장에서의 첫 무대라는 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오페라의 재미를 만끽시켜 주리라 믿는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의 오페라무대는 오랜 동안 했다는데 의미를 찾았을 뿐 철저한 쟁이 정신이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다시 말하면 오페라는 상업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질 좋은 상품을 만들어 관중들에게 팔아야 하며 더 비싸게 더 많이 팔기 위해서는 그만큼 감동적이며 멋이 철철 넘치는 오페라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업주의에서 출발된 오페라무대를 김자경오페라단이 시도해 왔고 입장료 수입에 의해 운영되는 오페라단으로 키워왔던 것이다. 오페라는 고상하다던가 혹은 차원 높은 정신에서 의미를 찾기보다는 대중들로 하여금 오페라 속에 빠져들게 하는 요소들이 작용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김자경오페라단의 <카르멘> 무대는 서울오페라극장의 개관 기념공연으로 안성맞춤이며 보다 많은 대중들로 하여금 오페라의 진미를 느끼게 할 것이다. 고희를 훨씬 넘은 나이에도 이 나라 오페라 문화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김자경 선생의 정열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 한상우(음악평론가), 1993년 3월 많은 세계인들이 상대성원리를 모르면서도 아인슈타인은 잘 알듯이 한국인들도 평생 오페라 한 편 관람한 경험이 없는 이들까지 김자경을 안다.그만큼 그는 한국 오페라를 위해서 아낌없이 자신을 태웠다. 성은 ‘오’요 이름은 ‘페라’라는 남자와 재혼한 영원한 28세라고 농담같이 주장하면서도 실제는 더 젊은 에너지를 발산하며 살다 갔다.여성이 활동하기 힘든 한국 사회에서, 뿌리내리기 어려운 오페라에 한평생을 바쳤기에 그 광채는 더욱 빛난다. 한국에서 문화예술을 본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다.그 중에서도 문학, 미술과 달리 음악, 무용, 연극, 오페라 등 공연예술은 더더욱 가시밭길이다.기획, 출연, 입장권 판매까지 1인 다역을 해도 항시 허덕이는 상식적 고충부터 경제적 어려움까지 끝이 없기 때문이다.공연예술의 종합이라 할 수 있는 오페라는 명맥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다.우선 물량면에서 대규모다.생전에 김자경 씨도 토로했듯이 오페라 한 편에 출연자, 오케스트라, 스태프 등 수백 명의 인원이 동원된다.이에 따르는 비용은 물론 처리해야 할 일이 간단치 않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것이다. 또 오페라 자체가 한국에서 대중화하기에 걸림돌이 많다.가창력이 뛰어난 성악가가 출연자의 제 일차적 조건이지만 연기력도 이에 못지 않아야 한다.그러나 인적 자원이 풍부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이를 다 갖춘 연기자를 확보한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와 프랑스어 대사가 많아 일반인들은 유명한 아리아 몇 곡 듣는 걸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우리 말로 번역해서 불러도 관객의 감흥을 고조시키기가 쉽지 않다.연극, 뮤지컬 등과는 사뭇 다른 이런 점들이 많이 개선되고 있지만 그 태생적 한계는 여전히 대중화의 장애가 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은 아직까지도 오페라 불모지나 다름없는 곳이다.이 척박한 땅에서 오페라단을 창설, 30년이 넘도록 개인의 힘으로 끌어온 것은 그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음악계는 물론이고 우리 역사가 두고두고 기억할 발자취를 남기고 간 것이다. 평소 “예술가는 죽을 때까지 현역에서 활동해야 한다”던 주장대로 그는 오페라에 살다가 오페라에서 죽었다.1948년 한국 최초의 오페라 공연작품 <춘희>에 출연하고 김자경오페라단 창단 첫 작품도 이것으로 공연하더니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도 지난 8월의 <춘희>였다.‘영원한 춘희’라는 애칭에 걸맞은 생애를 살았다.이를 밑거름 삼아 그의 평생 소원인 한국오페라 발전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 것이다. - ‘영원한 28세 김자경’, 박연호, <칼럼니스트 제7호>, 1999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우리 양악 100년>, 이강숙, 현암사, 2001 <우리 국악 100년>, 한명희, 현암사, 2001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 한상우, 지식산업사, 2003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관련사이트
안형일 인물정보
관련멀티미디어(전체1건)
이미지 1건
  • 관련멀티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