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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黃秉冀)

예술가명
황병기(黃秉冀)
분야
국악인
생애
황병기는 1936년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삼대 독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엄한 가풍 때문이기도 했지만 귀한 자식이었기에 더욱 엄한 교육을 받았다. 그를 위해 부모는 아들의 공부를 도와 줄 시골의 아저씨를 모셔왔는데, 그 분이 바로 황병기의 일생에 큰 영향을 준 김소열이라는 외당숙이었다. 김소열은 황병기에게 공부하는 방법과 스스로 탐구하는 즐거움, 아는 것과 깨달음에 대한 긍지를 느끼게 해주는 방법을 가르쳤다. 황병기가 중학교 3학년 학생으로 가야금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집안에서는 극심한 반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하는 이유도 그 당시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필 그 고리타분하고 궁벽스러운 것을 배우려 하느냐”, “전쟁판에 가야금 배워 신세 망치고 싶으냐.”는 이유였다. 그러나 황병기의 고집도 대단하여, 학교 공부에 아무 지장이 없게끔 할 뿐만 아니라 장차 큰 인물이 되려면 편파적인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되고, 전공이 무엇이든간에 예술은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황병기가 처음 가야금 음악을 접하고 배운 것은 김동민고전무용연구소의 선생에게서였다. 이후 국립국악원에 찾아간 황병기는 김영윤 선생을 만났고, <영산회상>을 옛날 아악수법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황병기는 정악만 잘 배운 것이 아니라 민속기악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가야금 산조 역시 제대로 배웠다. 김윤덕 명인에게 정남희제 가야금 산조를 전통적인 방법으로 배웠으며, 김병호, 심상건, 함동정월에게도 사사했다. 황병기는 가야금을 꾸준히 배우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서울대학교 법대에 입학했다. 그렇게 열심히 해 법대 2학년 때에 KBS가 주최한 전국국악경연대회에 나가 1등을 해 주위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대학교 4학년이던 어느 날 서울대학교 음대 현제명 학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는데, 1959년에 서울대학교 음대에 우리나라 최초로 신설되는 국악과에 강사로 나와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자격도 없고 시간도 없다고 한사코 사양했지만 결국 1959년 법대를 졸업하고 음대 강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가야금 연주자이던 그가 작곡을 하게 된 계기는 어느날, 젊은 작곡가의 부탁으로 가야금과 서양 오케스트라의 협주곡을 작곡 의뢰 받은 이후부터이다. 그는 임원식 지휘로 국립극장에서 <가야금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주제와 변주곡>을 초연, ‘국악과 양악의 악수’라는 등 신문의 문화면에 실리게 되었다. 대중적으로도 성공적이었고, ‘국악의 현대화 또는 세계화가 이루어지는 하나의 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획기적인 연주회였다. 그러나 ‘우리를 떳떳이 증언할 수 있는 참된 내것을 갖고 싶었던’ 그에게 어떤 찬사도 그의 갈급함을 채울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들은 그는 생명력으로 약동하는 충격적인 리듬과 원색적인 관현악법을 만나면서 20세기 현대음악의 거장들에 심취해 갔다. 1974년 그는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가 신설되면서 부교수 직급으로 국악과장을 맡아 음악을 직업으로 가진 본격적인 음악가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후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연주회를 가지며 그가 작곡한 가야금 작품과 함께 호평을 받았다.
약력
195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1963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강사 1974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교수 1978년 한국작곡가협회 부회장 1994년 ‘국악의 해’ 조직위원장 1996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음악대표 2004년 국악축전 조직위원장
상훈
1965년 대한민국 국악상 1992년 중앙문화대상 예술대상 1999년 에밀레대상 2004년 호암상
저서
가야금작곡집 <침향무>(1974) <비단길>(1977) 가야금과 인성을 위한 <미궁>(1979) 작곡집 <영목>(1979) 작곡집 <전설, 산운>(1979) <밤의소리>(1990) <출설, 달하노피곰>(1997) <정남희제황병기류 가야금 산조>(1998) 에세이집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황병기, 풀빛, 2000 <가야금 산조>, 황병기, 이화여자대학교, 1998 <나는 나답게 산다>, 황병기, 산하, 1998
음반
<황병기 가야금 작품집>, 성음, 1987 <Silk Road> Byungki Hwang / New Music of Korea, 미국 Arcadia사, 1992 황병기 가야금 작품집 1, 성음, 1993 황병기 가야금 작품집 2 <비단길>, 성음, 1993 황병기 가야금 작품집 3 <미궁>, 성음, 1993 황병기 가야금 작품집 4 <밤의 소리>, 성음, 1993 황병기 초기 가야금 작품집 <가야금>, C&L뮤직, 2001
리뷰
서양음악의 영향이 전혀 없는 유니크한 황병기의 음악세계 국악인이라고 하면 어딘지 옛스럽고 고풍스러운 풍류객이라는 선입감을 갖기 쉽지만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온 엘리트에다 미학을 영어원서로 읽고 희랍어와 라틴어를 독학으로 해득하고 있으며 수학과 과학, 중국의 고전문학에 두루 해박하여 담예논도(談藝論道)를 즐기는 철학자의 풍모다. 그의 집에 가면 식사 때도 반드시 책을 들고 나타난다. 소설책이 아니라 칸트나 비트겐슈타인, 공자의 논어나 우주과학책이다. 지난 봄 이화여대를 정년퇴임하고 그가 처음 한 일은 서점에 가서 중학교 과정 수학책을 사온 일이다. 수학으로 공부의 맛을 길들인 후 그의 예술인생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다.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고 조용한 편이지만 음악과 철학에 대한 모든 대화에서 그는 열정적으로 자기이론을 설파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엉뚱하고 기발해서 그의 음악적 행적을 돌아보면 히피적이며 첨단적인 행동들이 많다. 대학때는 4년 동안 고교시절에 입던 교복차림에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친구들은 그를 ‘괴짜’나 ‘기인’으로 부르면서 “그의 두 눈은 언제나 이 세상 밖 아득히 먼 곳에 있는 별빛을 보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법대에 다니고 있지만 그가 변호사나 법관이 아닌 신비로운 영감으로 가득찬 예술가가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의 엉뚱한 행동은 ‘전위’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1968년 뉴욕의 전위음악가들의 집합소인 일렉트릭서커스에서 미국 현대음악계를 주름잡던 존 케이지, 백남준과 함께 오페라섹스트로닉에 출연한 일이다. 그의 가야금 즉흥 연주에 맞춰 백남준의 공연 파트너인 첼리스트 샬롯 무어맨이 벌거벗고 무대에 나와서 첼로를 안고 뒹굴었던 바로 그 사건이다. 나체 등장은 당시의 미국 사회에서도 큰 물의를 빚었고, 백남준은 연행되었다. 백남준이 뉴욕경찰을 상대로 재판 중일 때도 그는 뉴욕타운홀에서 열린 재판기금 모집연주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또 다른 사건은 1973년 공간사 주최로 명동국립극장에서 열린 가야금과 목소리를 위한 <미궁(迷宮)>을 들 수 있다.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던 현대무용가 홍신자가 출연한 이 작품은 삶의 한 가운데 던져진 한 생명이 희로애락의 고통과 갈등 끝에 결국 공(空)으로 돌아간다는 인생무상을 그린 것으로 그의 가야금 연주에 맞춰 홍신자가 울다 웃다 괴성의 절규로 발버둥치자 여성관객이 비명을 지르며 극장 밖으로 뛰쳐나가는 해프닝을 빚었다. (……) 끝없는 황병기의 새로운 소리 창출 시도 (……) <미궁>과 그의 최근작 <달하노피곰>이 연주되고 국악은 물론 클래식음악과 재즈와 록, 무용·미술·퍼포먼스·비쥬얼 아트 등 모든 예술분야가 망라된 거대한 이벤트로 다시 한번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다. 하버드 대학에서 동양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조슬란 클락은 “황병기 음악이 국적을 초월하여 다양한 분야와 다양한 층이 이를 수용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한 전통적인 고전성과 모더니티 때문이며 모더니티가 더 이상 서양음악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음악평론가 윤중강도 “황병기 음악에서는 중심으로 향하는 힘(전통)과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힘(미래)이 팽팽하게 맞선다. 황병기 음악은 전통의 속살을 간직한 현대음악”이라고 쓰고 있다. 가야금의 수많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우리시대의 명인 ‘동양적 신비로 가득찬 수채화’에 비유되는 수많은 주옥편을 탄생시켰으나 그의 가야금으로 향한 길은 마냥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실험적이었고 처음부터 전통적이었다. 그가 무엇을 하던 그의 탐구와 연마는 모든 것이 음악을 위한 것이었음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것들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금선(琴線)을 울릴 때가 많다. 황금은 불변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겠지만 피었다가 지는 꽃, 그 꽃잎에 맺힌 이슬, 심지어 그 이슬의 그림자조차도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가치가 있다. 음악은 사라지는 것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처럼 섬세하다. 형식적인 것, 사교적인 것, 의례적인 것을 냉엄하게 외면한 채 자신이 목표로 세운 것에 침몰하듯이 몰두한다. 서양적인 것을 쓰면서 서양적인 것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어떤 난관도 바위에 물방울이 계속 떨어지면 구멍을 뚫는다는 절차탁마의 자세로 득음의 진취를 얻고 있다. 누군가 “음악가는 은퇴하는 법이 없다. 음악가는 오로지 그 내부에 음악성이 없어졌을 때만 그만둔다”고 했지만 그의 음악은 들리는 멜로디보다 들리지 않는 멜로디의 아름다움으로 사람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절조의 항적을 남긴다. 그리고 그의 꾸미지 않은 청정무구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동양적 신비를 끝없이 길어올리면서 그의 음악인생이 영혼의 숨쉬는 산소 같은 것으로 완성될 것을 믿는다. 그의 예술은 예술적 재능에 의한 순수한 영혼의 표현이며 동시대 이만한 명인을 가진 것은 우리의 행복이다. - ‘동양적 신비 길어올리는 황병기의 금선’, 이세기, <문화예술>, 2001년 1월호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황병기 가야금의 독주곡 리듬 분석>, 박지연, 이화여자대학교, 1999 <우리 국악 100년>, 한명희, 현암사, 2001 <황병기 가야금과 장구를 위한 전설 분석>, 장승희, 전주대학교, 2002 <방일영국악상 10년>, 최종민, 방일영문화재단, 2003 <황병기 가야금 창작곡의 주법연구>, 안영단, 공주대학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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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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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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