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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기(洪元基)

예술가명
홍원기(洪元基)
분야
국악인
생애
청운(淸韻) 홍원기는 1922년 2월 1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홍성우와 김수창의 5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청운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사양성소가 국비임을 알고 여기에 들어가게 된다. 이왕직아악부는 당시 우리 전통음악의 맥을 잇는 유일한 관립 음악교육기관이었다. 그의 부친은 궁내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관리였으므로 그가 이왕직아악부에 들어가 궁중음악을 전수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울러 부친은 홍원기의 사주에 예(藝)자가 세기둥이었기 때문에 예술 방면에서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었다고 한다. 홍원기는 5년 과정인 아악부 5기생으로 입소하게 되고 여기에서 3학년부터 가야금을 전공하게 된다. 이왕직아악부를 졸업하게 된 것은 1941년 3월이며 이후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사로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전공은 가야금이었으나 일찍이 가곡, 가사, 시조 등의 정가(正歌)를 통해 두각을 나타낸다. 이왕직아악부에서 그에게 가곡을 가르친 사람은 이병성과 이주환이다. 이병성(1909~1960)은 당시 가곡으로 크게 이름을 날렸던 인물로 이왕직아악부의 거문고 명인 이수경(1882~1955)의 아들이었다. 이병성의 전공은 피리였으나 하규일(1867~1937)에게 가곡을 이수하여 이 길에서 대성한 인물이다. 이주환(1909~1972)은 아악부의 선배로 원래 타고난 목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각고의 노력을 통해 가곡으로 대성한 인물이다. 홍원기는 이왕직아악부에서 이들 두 사람에게 가곡의 기초를 닦았으나 실제 아악부의 교육에만 전부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늘 자신의 음악을 살찌우는데 최상욱(1872~1950)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고 되뇌이곤 했다. 최상욱은 고종 때 궁중 액정서(掖庭署)의 가무별감(歌舞別監)을 지냈고 당대에 이름을 날린 하순일, 추교신 등과 교우하며 남녀창·가곡에 통달하였고 12가사와 여러 시조에도 능하여 명성을 누렸으나 이왕직아악부와는 인연을 맺지 않고 민간에서만 활동을 했다. 당시 젊은 학도인 홍원기는 최상욱 밑에서 열심히 기량을 갈고 닦았고 최상욱은 홍원기를 자신의 수제자로 여겼다. 그러기에 홍원기는 이왕직아악부나 다른 가객들이 잘 모르는 최상욱만의 시조제(時調制)를 전수할 수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우조시조(羽調時調)>와 <우름지름시조> 등이다. 이렇듯 그는 일찍이 좋은 스승 밑에서 수학하여 가객으로서 보다 이름을 날리게 된다. 홍원기가 최초로 시조를 녹음한 것은 1941년에 서울 중앙방송국에서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인 1946년 12월 당시 문교부가 주최한 제1회 전국음악경연대회에서 가야금 부문에서 1등, 시조 부문에서 2등에 입상했다 홍원기는 이후 진주여중에서 국악교사를 맡았으며 수복 후에는 서울로 올라와 서울사범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1960년 5월부터는 국악예술학교(지금의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의 교사로서 국악개론과 시조창 등을 맡아 1947년까지 약 15년 동안 가르치게 된다. 또한 그는 1965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에 입단하여 제1악장(樂長)을 맡으면서 작곡에도 보다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또한 교체 지휘를 하기도 했다. 그가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1962년 7월 국립국악원이 주최한 신 국악작품 공모에서 <향수>가 입선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이런 습작기를 거쳐 1963년에는 <산장의 밤>이라는 곡을 쓴다. 이후 그가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에 입단하여 발표한 작품으로는 1966년 5월 18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초연된 <관현6중주>, 1968년 4월 11일에 발표한 <추모의 정>, 1968년 12월 4일에 발표한 <만추의 야상곡> 등이 있다. 이외에도 <망향>·<회상>(1966), <바다의 향수>(1967), <청추의 야상곡>(1968), <산장의 추억>(1968) 등 총 20여 곡에 이르는 작품을 썼다. 그는 또한 1966년 13년간 경희대학교 음악대학에서 국악과 관련된 이론과 실기를 가르쳤다. 아울러 동양방송 시절에는 노인대상 프로그램인 ‘장수무대’에서 반주와 심사를 맡기도 했다. 홍원기는 19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매주 기차를 타고 다니며 전남대학교까지 강의를 나가는 등 건강하게 지냈으나 1993년부터 갑자기 당뇨의 악화로 해서 크게 고생을 했다. 뒤에는 몸이 자유롭지 않았고 언어장애까지 와서 주위에서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러던 중 1997년 1월 26일 홍원기는 다시는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경기도 성남시 분당동 샛별마을 삼부아파트 403호 1001호 자택에서 별세했다. 홍원기는 많은 음향자료를 남겼다. 1974년 3월에는 문화재관리국의 청탁으로 정악가야금 전곡을 녹음했다. 또 같은 해 8월에는 역시 문화재관리국의 청탁으로 남창가곡 중 13곡을 녹음하였다. 또한 1976년 10월에도 문화재관리국의 청탁으로 남창가곡 중 11곡을 녹음하였다. 이것은 한국문화재보호협회가 주관한 <한국전통음악대전집>의 음반 속에 실려 있다. 이 음반은 또한 1988년 중앙일보사에서 <국악의 향연>이라는 음반으로 다시 제작되었다. 또한 1979년 9월에는 국립국악원의 청탁으로 남창가곡 중 <우조 초수대엽>, <삼수대엽>, <언락>, <편락>, <태평가> 등 5곡을 녹음했다.
약력
1941년 이왕직아악사 양성소 졸업 1941년 서울중앙방송국, 문화, 동양, 동아방송국에서 남창가곡 가사 시조창 및 가야금 등 방송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 1959년 전승기록 자료(문화공보부) 남창가곡 시조창 등 녹음 1960년 한국국악예술학교 교사(국악개론 및 시조창) 15년 1961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강사(가야금) 9년 1965년 서울특별시립국악관현악단 근무(작곡-악장-교체지휘) 10년 1966년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강사(이론·실기) 13년 1968년 건국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3년 1974년 정악가야금 전곡(여민락 제외) 녹음(문화재 관리국)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보유자 인정 199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보유자 사망해제
상훈
1946년 제1회 전국음악경연대회 가야금 1등, 시조 2등 수상
공연
1966년 <관현6중주> 초연(서울시민회관) 1968년 <추모의 정> <만추의 야상곡>
리뷰
(……) 그는 남창가곡의 명인이었으나, 여창가곡에도 출중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고, 많은 여성들을 지도했다. 특히 여창가곡에만 존재하는 속청을 잘 표현했다. 이것은 한자어로 세성(細聲)이라고도 하며, 서양의 발성에서 팔세토(falsetto)의 표현에 능했다. 이것은 소리를 질러내는 것이 아니고, 감춘 듯이 숙여서 내는 발성법인데, 그는 남성임에도 이 여창의 속청을 제자들에게 잘 전수시켜 주었다. 또한 홍원기는 생전에 특히 우조지름시조를 잘 부르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석인이 이승 황학거하니>와 <금강산출 해동두하니>가 그의 장기이다. 이 두 편의 우조지름시조는 역시 모두 최상욱 선생에게서 배운 것으로, 아마 그 이상으로 이 시조를 잘 부르는 이는 그 후에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청운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고고한 학이 목청을 가다듬는 모습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는 평생 자신의 정가 연마에 정진했을 뿐 아니라, 제자들을 지도할 때도 늘 단정히 앉으셔서 무릎을 치며 장단을 잡곤 했다. 그가 정가를 부를 때의 단정히 정좌하고 앉아서 부르는 청아한 음성이라거나 또 가야금정악을 탈 때의 세련되면서도 단아한 솜씨는 가히 따를 이가 없다 하겠는데, 그러기에 그를 가리켜 왕가의 마지막 가객이요, 마지막 명금으로 부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찬사라 할 것이다. - ‘왕가의 마지막 가객(歌客)’, 윤중강,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관련도서
<우리국악 100년>, 한명희, 현암사, 2001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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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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