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예술지식백과

문화 관련 예술지식백과를 공유합니다

장사훈(張師勛)

예술가명
장사훈(張師勛)
분야
국악인
생애
운초(云初) 장사훈은 1916년 11월 26일(음력 8월 15일) 경북 영주군 이산면 운문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고 홀홀단신으로 서울에 왔던 그는 어디 하나 의지할 데 없는 처지였지만, 1931년 공립인 청운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의 소망은 법관이나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을 만큼 꿈을 간직한 소년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과 같이 중학교에 진학할 만한 여유가 없었던 그에게 6학년 담임 선생님이 그를 불러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에 가라고 권유한다. 그곳은 학비가 면제되고 옷과 책, 학용품도 거저 줄 뿐더러 매달 수당까지 나온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왕직 예식과의 수석 전사로 있는 친구의 할아버지도 그에게 “네 재주가 아깝다.”며 꼭 시험을 보라고 당부하였다. 그는 막상 다른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며칠 동안 밤을 새며 울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국악에 관한 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시기이기에 어린 마음으로는 그런 곳에 몸을 담기 싫었던 것이다. 1931년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에 입학한 장사훈에게 국악이란 큰 희망이 없는 공부였다. 생소한 음악, 생소한 악기는 그를 고통스럽게 했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한 번 들어선 길을 바꾸기도 어려워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방법으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학과목은 학교에서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수많은 아악곡, 즉 문묘 제향 음악, 종묘 제향 음악, <보허자>, <낙양춘>, <여민락 만>, <여민락 령> 등의 곡들은 모두 등교와 귀가길에 외우는 습관을 들이고 집에 가서는 일일 한 권 독파를 목표로 하여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가 3학년이 되던 1933년 가을, 스승 함화진은 그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암시해 주었다. 그가 졸업하게 되면 이왕직 예식과에서는 그의 동기생 중에 세 사람을 뽑아 동경음악학교에 3년간 유학시키기로 하고 그 예산까지 정해 놓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는 3학년부터 전공이 정해졌는데 그때는 마침 3학년이라서 그는 전공으로 정해진 거문고를 큰 뜻을 가지고 매우 정열적으로 공부했다. 물론 그의 일본유학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전통음악공부에 매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그때 동경예술대학에 유학했더라면 그 동안 생활은 안정되었겠지만 사이비 음악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르니 못 가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고 회고했다. 1936년 아악부원양성소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가 되었다. 지금도 국악실기만 가지고는 입신하기가 어려운 터에 그때는 더욱 그러하였고 또 평생을 아악부의 좁은 울타리 안에서 보내야 한다는게 그로서는 마땅치 않았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조선 고전문학 전집>을 비롯하여 이광수, 심훈, 윤백남, 홍명희 같은 이가 펴낸 소설과 수필, 시들을 거의 다 읽었다. 이것은 당시 이왕직아악부를 졸업하고 전문학교나 대학으로 진학한 친구들에게 지지 않으려는 장사훈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좌절하지 않고 전문학교와 대학의 교과과정을 조사하여 영어와 논리학, 윤리학 등을 독학으로 하나하나 헤쳐 나갔던 이 시기는 그의 고집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싹 트는 시기였던 것 같다. 어쨌든 당시가 그에게는 가장 어려운 시기였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런 노력이 훗날 그의 학문세계에는 많은 밑거름이 되었다. 그가 24세 되던 1939년부터 그에게는 새로운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아무리 아악이 존귀하다 하더라도 실기만으로 입신이 되고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또 생애에 보람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찾아오게 된 것이다. 고민 끝에 그는 ‘실기도 중요하지만 학문적인 이론과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는 이 때부터 이왕가(李王家)의 도서관과 아악부에 있는 모든 국악 자료와 악보를 수중에 넣기로 작정하고 필사(筆寫)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1937년부터 1943년까지 7년간을 그는 한국음악에 대한 문헌을 수집하고 아악곡을 채보하는 한편, 세종실록 악보, 대악후보, 속악원보 같은 고악보를 전사하는 등 학자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그렇게 모은 자료는 모두 34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바탕이 되어 그의 비중있는 논문 <보허자 논고>가 탄생되었다. 고악보를 필사하면서 실로 우연히 <보허자>와 그 파생곡에 대한 연관 관계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보허자 논고>는 ‘외솔 최현배 선생 회갑기념 논문집’에 발표되었고, 1968년 서울대학교에서 받은 문학박사의 주논문이기도 하다. 이 논문원고와 비교악보는 6·25 동란때도 배낭에 넣고 부산까지 몸에 지니고 다니던 소중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경성중앙방송국에서 국악담당 PD를 거쳐 문교부 편수관을 지내게 된다. 당시 편수국에는 최현배, 장지영, 이윤영, 이병기, 최재희, 신동엽과 같은 학자들이 장사훈과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이들과 함께 하는 동안 그는 진정한 학문의 분위기란 무엇인가를 맛보게 된다. 한편 그는 문교부 편수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또 한번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최현배 선생을 모시고 편찬사업을 돕고 있는 동안 허현 선생이 개성 모 고등학교 교사로 장사훈을 추천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국악 이론에 대한 집념으로 이를 사양했다. 이런 일이 있은 바로 직후 6·25 전쟁이 터졌다. 만약 그가 개성으로 갔더라면 국악학 연구는 고사하고 전쟁의 와중에서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장사훈은 이를 하늘의 뜻이라 생각했다. 이후 1954년에는 덕성여자대학교에 국내 최초로 국악과를 개설하는데 산파 역할을 했으며 1960년까지 덕성여자대학교 국악과 과장 및 교무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1960년에는 제3회 방송문화상을 수상했고, 1961년 국악진흥회에서 주관한 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1965년에는 제3회 5월문예상 음악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저서
<국악해설사전>(1960) <국악개요>(1961) <국악기연주법>(1963) <국악논고>(1966) <시조연구>(1968) <한국악기대관>(1969) <한국음악소사>(1970) <시조음악론>(1973) <여명의 동서음악>(1974) <한국전통음악의 연구>(1975) <국악총론>(1976) <한국음악사>(1977) <한국전통무용연구>(1979) <하규일, 김기준 전창 십이가사>(1980) <한국전통음악의 이해>(1981) <화전태와 화류태>(1982) <세종조음악연구>(1982) <국악사론>(1983) <국악의 전통적인 연주법 1>(1982) <한국무용개론>(1984) <국악대사전>(1984) <증보 한국음악사>(1985) <최신 국악총론>(1985) <읽기쉬운 국악이론>(1986) <예술과 학문의 만남>(1987) <국악명인전>(1989) <여명의 국악계>(1989) <일본 무용소사>(1989) <국악문헌자료집성>(1990) <일본음악사>(1990) <국악문헌>(1990) <여명의 양악계>(1990) <우리 옛악기>(1990) <한국음악사연표>(1990) <여명의 양악계>(1991) <국악논고>(1991)
리뷰
평생 소원이 자신의 책으로 책꽂이 한 단을 채우는 것이었다고 하는 그는 평생동안 한 단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써냈다. 첫 논문을 발표한 이래 총 1백 80여 편의 논문 조사 보고서를 썼으며, 원고지 1만 4천장에 달하는 <국악대사전>을 비롯한 40여 권의 저서를 냈다. 그의 이런 노작(勞作)은 다름아닌 그의 꼼꼼한 자료 정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무슨 책을 읽든지 옆에 독서카드를 두고 거기에 필요한 대목을 옮겨가면서 읽었다. 학문하는 사람들이야 다 이렇게 하는 것이지만 그의 남다른 점은 그 양의 방대함과 그 정리의 치밀함에 있다. 그는 자신이 쓴 원고의 대부분과 자료의 모두를 손수 제본하여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었다. 심지어는 50여 년 전에 쓰다 남은 이왕직아악부의 악보 용지마저도 보관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의 꼼꼼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또한 평소 남달리 학구열이 높아 밤늦도록 붓을 놓지 않았던 그는 우리나라 음악의 변천사를 집대성한 <한국 국악사 연표>와 태종에서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백 72년간의 조선왕조 실록 1천 8백 93권에서 국악관련 자료를 발췌한 <국악문헌 자료집대성> 등의 저서도 남겼다. 생전에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장사훈’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자료수집에 대한 열정이었다고 한다. 선생의 국악관련 자료수집의 포석은 멀리 1940년대부터 시작된다. 중간에 6·25전쟁으로 인하여 어렵사리 모았던 소중한 자료들 모두가 소실당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으나 다시금 자료수집에 착수, 평생동안 모은 서적이 5,000여 권, 악기가 30여 점에 달한다. 그는 연구 진행 사항까지도 낱낱이 기록한 노트 및 초고 원고지, 그가 입수할 수 없었던 악보나 서적의 필사본 및 하찮게 보이는 단 한 장의 등사본 팸플릿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결국 그런 자료들을 정리하여 청주대학교 내에 ‘운초 장사훈 박사 기념관’을 세우게 된다. 자신이 소장한 국악기 명품과 4천권에 달하는 희귀 국악관련 서적을 후학을 위해 만년에 몸담고 있던 청주대학교에 몽땅 내놓았다. 교육의 공익정신을 일찍이 체득했기에 가지고 있던 지식과 더불어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국악기를 미련없이 내놓고 세상을 훌쩍 뜬 것이다. 문 현(국립국악원 학예연구관)은 장사훈 박사가 생존 시절인 1991년 7월, 개관 준비중이었던 ‘운초 장사훈 박사 기념관’에 관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운초 장사훈 박사 기념관’은 청주대학교 내에 100여 평 규모로 관장실을 비롯하여 관리실, 악기진열실, 자료실, 서고, 열람실 등으로 마련되어 있다. 1940년대부터 장사훈 선생이 평생을 바쳐 모으기 시작한 그의 서재에 가득 쌓아두던 국보급 희귀서적, 악기 등이 포함된 국악관련 서적, 팸플릿, 사진, 음향자료, 노트 및 악기 등 일체를 청주대학교에 기증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후학들을 위하는 선생의 깊은 뜻새김과 또한 선생이 국악학계에 남긴 뚜렷한 족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호를 딴 ‘운초 장사훈 박사 기념관’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20평 정도 되는 악기진열실에는 서울에 거주하는 제자들이 기증한 악기들도 포함, 모두 50여 점의 악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국보급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악기들이 있다. 세종 9년 정미년에 박연이 임금께 올린 석경 12매 중 하나인 황종경, 그리고 흥선대원군 사랑방에서 나왔다는 가야금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1922년 이언직이 만든 거문고, 고종때로 추정되는 방자 호적, 조선조 말기의 징, 나발 등도 특기할 만하며 그밖에 1964년 국립국악원 주관으로 국악기 개량 위원회가 결성되어 국악기 개량 사업이 공식화될 당시 선생이 직접 시안하여 김세준이 제작한 월금이 거문고와 같은 우리 진열실 안에 있었고 이 때 함께 개량된 가야금은 현재 서울대학교 국악과의 이재숙 교수가 소장하고 있다. 자료실에는 선생의 저서 중 <장단경>에 인용된 김진환과 박영복의 장구보와 아악부원 양성소 제3기생인 임장길(대금 전공)이 채보한 평조다스름 악보 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이는 1936년 최순영(피리 전공)에 의하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국립국악원의 가락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음으로 해서 한 번쯤 비교해 볼 가치가 있는 악보인 듯 여겨진다. 함화진과 김영제가 채보한 1933년 <천년만세> 등사본 악보는 양청도드리에 오늘날과 같은 장별 구분이 없고 현재 양청도드리에서 속도가 느려지는 7장이 우조가락 도드리의 도입가락으로 된 점 등에서 차이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에 더해 정재무 창사에 있어서도 선생이 김영제에게 배웠을 때에는 ㄱ,ㄹ,ㅂ 등의 철자가 첫 음절로 시작하는 단어는 예외 없이 높은 음에 배속되었던 점으로 보아 이 점에 있어서도 오늘날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석재 채보의 <유초신지곡> 피리보(1939), 김기수 채보의 우, 계면 가곡보(1962), 하규일이 정리한 둘째 바탕 가곡보, <배뱅이 굿> 사설집(1949) 및 1936년과 1937년에 와공후, 수공후, 소공후, 운라악기를 국악원에서 구입했다는 기록 등이 적힌 함화진 당시 아악수장의 보고서와 이왕직아악부 시절 악서편찬을 위해 촉탁으로 근무했던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출신 성낙서의 <조선음악사> 원본을 선생이 직접 필사하여 묶어 놓은 책 등도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다른 편의 창작국악 악보 진열실에는 비스듬히 누워있는 김기수의 여러 육필 악보 중 창작국악곡의 효시로 기록된 1939년에 작곡된 <황화만년지곡> 악보도 진열되어 있다. 그야말로 선생의 꼼꼼함이 드러나는 또 다른 서가에서는 <국악대사전-소장본-문헌류>라는 글씨를 붙여 하나로 묶은 1984년 출간된 국악대사전 집필을 위해 기록한 자료 카드와 초고를 비롯하여 <국악논고>(1966), <시조음악론>(1973), <국악총론>(1976), <한국음악사>(1976), <한국전통무용연구>(1977), <세종조음악연구>(1982) 등 고 9년간의 각고 끝에 1990년 편찬된 국악문헌자료집성 및 한국음악사 연표 등에 이르기까지 선생이 1년에도 몇 권씩 펴낸 수많은 책들의 초고 원고가 망라되어 있다. 또한 1932년 10월 이왕직아악부에서 만든 모임인 이습회에서 같은 달 13일부터 제1회 연주회를, 그리고 이듬해부터는 매년 1회씩 특별기념 연주회를 개최하기 시작하는데 이에 대한 등사본 프로그램이 1944년까지 특히 9월까지의 약 8년간은 한 회부의 누락도 없이 고스란히 수집되어 두 권의 스크랩북에 정리되어 있다. 영조 이전의 악보인 <신작금보>, 헌종 때의 전통가곡반주보인 <우헌금서> 등 희귀자료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 ‘국악의 이론적 기틀을 세운 학자’, 윤중강,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 대한민국예술원, 1998 <우리 국악 100년>, 한명희, 현암사, 2001 <국악대사전>, 장사훈, 국립국악원, 2000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관련사이트
국립국악원
관련멀티미디어(전체0건)
이미지 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