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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구(李惠求)

예술가명
이혜구(李惠求)
분야
국악인
생애
이혜구는 1909년 1월 10일 궁내부 비서승 기호흥학회의 창립발기인 한산 이우규의 4남으로 태어났다. 4형제는 겸구·관구·민구·혜구로 모두 구(求)자 돌림이었다. 부모는 위로 3형제를 모두 일본으로 유학 보내고, 막내인 혜구는 집에서 학교를 다니도록 했다. 서울 토박이로 명문가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에도 아버지께서 오르간을 장난감으로 사줄 정도로 환경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유학하는 형들을 통해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중학교 3학년이던 1923년 여름, 방학이 되어 일본에서 돌아온 그의 셋째 형(민구)이 바이올린으로 베토벤, 모차르트의 소나타 앨범을 펴놓고 켜는 것을 보고 그의 아버지를 졸라 바이올린을 샀다. 바이올린을 배운 이혜구는 후에 경성제국대학 시절 한국 최초의 비올라 연주자로 활동했고, 1932년에는 경성방송국 아나운서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또한, 경제학을 전공하던 그의 둘째 형은 1926년 여름방학에 빅터 축음기와 레코드를 가지고 귀국했다. 이런 환경 덕분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집안의 반대로 음악대학은 진학하지 못하고 서울대학교 예과(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였다. 그 후 현악사중주단을 만들어볼 작정으로 바이올린에서 비올라로 방향을 바꿨다. 즉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비올라를 탄 것이다. 비올라를 하는 사람이 희귀한 탓에 그는 그 후 중앙악우회 관현악단의 초청을 받아 매주 월요일 저녁에 YMCA에서 관현악 연습을 했다. 한때 채동선(제1바이올린), 최호영(제2바이올린), 본관신광(첼로)과 함께 현악사중주단의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국악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는 서양음악을 하는 시기여서 국악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졸업 후 1933년, 경성방송국에서 음악연예프로 편성을 담당하게 된 때였다. 당시 제2방송과장 고(古) 윤백남 선생이 젊은 과원을 보고 ‘판소리 장단 하나 모르면서 어떻게 사례(謝禮)의 등급을 결정하느냐 그러니 장단이라도 배우라’고 일러 주셔서, 나는 집에서 무릎장단을 치면서 국악 방송에 귀를 기울이게 된 이후로 국악에 흥미를 느껴 국악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생각하면 공부하기 좋은 기회가 자기도 모르게 왔다가 가는 이런 예가 우리 인생에 허다할 것 같다.” - 이혜구, <인연>, 출처 미상 1934년 경성중앙방송국이 일본에 방송할 프로그램으로 아악을 결정하고, 출연을 교섭하기 위해 담당인 그가 이왕직아악부로 함화진 악사장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분의 차근차근한 어조와 높은 콧대는 왕 전하(殿下)의 앞에서 연주하는 아악을 함부로 일반에 공개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 의도를 일축해 버렸다. 그래서 방송국에서는 공문서를 이왕직 장관에게 보냄으로써 아악방송을 성사시켰다. 그 과정에서 이혜구와 함화진 사이에 다소 언짢은 말이 오가기는 했지만, 1934년 6월 19일에 아악은 국내 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에 울려퍼지게 되었다. 그 이후 아악은 매월 한 번씩 아악부의 일소당에서 계속 방송되었다. 그는 아악방송을 하면서 함화진과도 좋은 사이가 되었고, 아악을 연주하는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실제 음악을 접하면서 악보를 구하려는 노력도 하고, 문헌도 찾아보는 등 아악에 대한 자료를 찾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국악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묻고 굿판을 찾아다니며, 음악의 현장을 체험하고 그 내용을 메모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과 노력들은 후에 그가 논문을 쓰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1933년 경성방송국의 방송제도가 제1방송과 제2방송으로 나뉘면서 조선어와 한국음악을 방송하는 제2방송 음악연예담당 프로듀서 역할을 하게 되었을 때에야 그는 국악을 접하고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맡은 일을 성실히 하다 보면 더 좋은 일을 하게 된다’는 식의 교훈을 한다. 본인도 방송국에서 국악과 관련된 일을 맡으면서 국악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 이야기는 1957년에 출판한 <한국음악연구>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다. “내 당초 영문학도로서, 한국음악에 호기심을 갖게 된 것은 방송사업에 연고를 맺은 뒤부터였다. 거기서 처음으로 국악인을 접하였고, 또 외국인에게 우리 음악을 설명하여야 할 처지에 있었다. 그러기 위해 그에 관한 막연한 구전설화보다 확실한 문헌을 찾게 되었다. 그런 우리 음악에 관한 문헌은 적고, 있어도 거의 다 읽기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었다. (……) 고악보는 겨우 20여 년 전 이병기 선생과 고(古) 송석하 씨 수집으로 사계(斯界)의 관심을 끌었던 것인데 그 해독에 힘썼고, 또 예전 음악 연주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그에 관한 그림을 섭렵했다. 그 후 대학에서 국악사의 강좌를 담당하게 되자, 전체 역사를 구성할 부분에 해결할 문제가 많음을 느껴 기회 있는 대로 그에 관한 졸문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이럭저럭 20여 편이 되었고, 그것을 지금 책으로 엮게 되었다” 이혜구는 영문과 출신이어서 영어를 불편 없이 구사한다. 그런 장점이 한국음악을 서양에 소개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한 예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음악회의에 참석했던 일은 한국음악이 공식적으로 유럽에 처음 데뷔하게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1958년 10월 3일 파리에 도착한 그는 한국이 국제음악회의(IMC)에 정식 가입하게 했고, 그 회의에서 10월 25일 한국음악에 대한 강연을 했다. 대개 처음 듣는 외국음악을 오래 들려주면 거북하게 느낄까 봐, 각 음악을 불과 30초 내지 1분 정도 들려주게 계획했지만, 가야금 산조만은 모험일지라도 진양조를 빼고 약 15분 동안 들려주게 짰었다. 한참 가야금의 그림이 은막에 비취어 있고, 그 막 뒤에서 가야금 산조가 스피커로 흘러나오고(……) 음악이 자진모리로 죄어가다가 턱 풀어지면서 불이 켜지며, 객석에서 웅성웅성 수근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손님들이 지루한 것이 끝났다고 시원히 여겨서 사담(私談)이 벌여졌구나 하고 실패한 줄 알고 풀이 죽어 있는데, 그 소리는 이상하게도 그치지 않고 점점 더 커져서 자세히 귀를 기울였더니, ‘브라보’ 하는 갈채와 박수소리가 터져나와 마치 시들던 풀이 소낙비를 만난 것 같았다. 그 곳에는 세계적인 학자들이 많이 와 있었기 때문에 한국음악을 알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며칠 후 마효준 씨가 F. 미셸 씨 감수의 음악백과사전에 한국음악에 관한 글이 실릴 수 있도록 타자기로 10매 쳐서 1월 31일까지 보내줄 수 있겠냐고 해서 그렇게 해주었다고 한다.
약력
1931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 졸업 1945년 서울 중앙방송국 국장 1947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학장 1954년 한국국악학회 회장 1959년 서울대학교 문학박사 1974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75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79년 Executive Board Member, International Council for Traditional Music 1982년 영국 던햄대학교 명예음악박사 1984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객원교수
상훈
1960년 3·1문화상 1973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저서
<한국음악연구>(1957) <한국악기圖錄>(1962) <한국음악서설>(1967) <晩堂續文債錄>(1970) <世宗狀憲大王實錄 22권의 음악解除>(1973) <음악理論叢> (1976) <국역樂學軌範>(1979) <한국음악논집>(1985) <晩堂續文債錄>(1985) <井間譜의 井間, 大綱 및 장단>(1987) <한국음악논고>(1995) <三竹琴, 樂學軌範>(1997) <譜의 譯譜 및 譯註>(1998) <신역 악학궤범>(2000)
리뷰
한국음악학의 주춧돌 이제까지 우리나라 학자로서 가장 많은 논문을 썼고, 지금껏 그 기록을 지키고 있다. 그의 논문은 다방면에 걸쳐 있으며 학술만을 위한 논문이 아닌, 한국음악의 성격을 규정짓고 또 한국음악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살아있는 논문이었다. 한국음악을 한국음악답게 만든 사람. 그의 삶에는 한국인의 참된 삶이 어려 있다. 그는 진정한 한국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새 선비정신을 심어준 거인이었다. - ‘한국 음악학의 주춧돌’ , 이상만, <한국예술총집 음악편>, 대한민국예술원, 1998 “그건 나도 모르네.” 이혜구는 늘 학생들에게 경어를 쓰시며 강의 중간이나 마친 다음 반드시 질문이 없느냐고 묻는다. 강의를 듣고 질문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 스스로도 강의 도중 “이 문제를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런데 그 다음은 나도 모르네.” 식으로 한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살피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고, 그러면서 학생들이 계속 의문을 가지고 탐구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니 의문이 없다든지 질문이 없다는 것을 이상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 “그건 나도 모르네.”인데, 그 어조도 독특하고 내용도 진지하다. 그 말은 제자들 대부분이 그를 기억할 때 떠올리는 단어일 것이다. 그는 “교수가 학생에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분명히 말하는 것을 절대로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백 퍼센트 모른다는 말도 믿을 수 없지만, 백 퍼센트 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몇 퍼센트까지 알고 몇 퍼센트 모른다고 기지(旣知)와 미지(未知)의 한계선을 명백히 그을 수 있고, 미지의 퍼센트를 감소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학자의 자격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1959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처음부터 학위를 받기 위해 애쓴 공부도 아니요, <한국음악연구>라는 저서도 매명(賣名)을 목적으로 이 책에서 조금, 저 책에서 조금씩 끄집어내어 쓴 사본도 아니요, 30년이란 세월을 꾸준히 하루도 변함이 없이 걸쳐서 읽고 자기대로 생각해 내고 이 곳 저 곳의 고증을 찾아보고 너그럽게 남의 의견도 들어보고 해서 자연적으로 쌓인 것이 그 결과이다. 학문이라는 것은 이래야 할 것이라는 것이 학문다운 학문을 못 해본 필자에게는 하나의 경종같이도 생각이 된다.” - ‘이혜구 교수를 말한다’, 윤태림, <만당문채록> 세대 탓인지 모르지만 요즘 학자들은 나를 포함해서 선비답지 못하고 신사답지 못한 면이 너무 많다. 그래서 그런지 날이 갈수록 선생님이 더 귀하고 훌륭해 보이고, 더 커 보인다. (……) - ‘한없이 귀하고 훌륭한 스승’, 최종민, <방일영 국악상 10년>, 방일영문화재단, 2003
관련도서
<한국예술총집>, 대한민국예술원, 1998 <우리 국악 100년>, 한명희, 현암사, 2001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 한상우, 지식산업사, 2003
관련사이트
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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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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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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